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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한창훈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한창 티브이에서 "**을 글로 배웠어요~"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내게도 글로 배운 게 몇 가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섬'이다. 나는 섬을, 글로 배웠다. 섬에 산다는 것, 섬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 섬의 풍경 같은 것들. 내게는 기억할 만한 섬 방문기도 없고(제주도도 한 번 못 가봤으며, 혹시 제부도도 섬으로 쳐준다면, 그 섬은 몇 번 가봤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섬의 풍경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 내게 마치 섬을 내 마음속 고향이라도 되는 듯 새겨넣어 준 것은 바로 한창훈 작가의 책들이었다.
작가의 책을 읽으면,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해 파도가 찰싹이는 바닷가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문득 입안 가득 신선한 해산물의 맛과 질감이 퍼져 견딜 수 없이 괴로워지기도 하고(그렇다, 그건 행복과 동시에 괴로움이다!), 코끝으로는 짭쪼롬하면서 비릿한 갯내가, 귓가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바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이 증상은, 거문도를 다녀와서 더욱 심해졌다.
섬을 글로 배운 내가, 섬을 내게 가르쳐 준 한창훈 작가가 있는 거문도를 직접 찾아가 몸소 섬을 느껴본 것이다. (1박 2일 다녀와 놓고 섬을 느꼈다고, 섬을 알았다고 말하는 건 말도 안되겠지만, 적어도 실질적인 풍경과 냄새와 맛과 질감과 느낌을 조금이나마 내 안에 담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육지(!)에서의 생활이 서글플 때가 있는데 말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일견'하고 났으니, 책속의 문장 문장이 이제는 그냥 글이 아닌 거라. 책 속의 낱말 하나 하나가 그냥 가슴에 콕콕 와서 박히는 거라. 거문도를 구르던 돌멩이 하나도 그리워지는 책읽기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절절하게 만든 건, 바닷가 자갈이 파도에 휩쓸려 이리 또로록 저리 또로록 굴러 다니듯이, 육지에서 이리 저리 '굴러 다니며' 온갖 고생(이라고 쓰고 경험이라고 읽는다)을 하고 섬으로 돌아온 사내가 섬 외딴 곳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스스로를 닦음질 하는 장면들이었다.
고령의 외조모가 살고 있는 섬으로 돌아온 사내는 동네와 외따로 떨어진 '도깨비가 나오는 집'에 거처를 꾸미고 그곳에서 자신의 내면을 벼리는 시간들을 보낸다. 온갖 세간이며 집 구조물까지 다 뜯겨나간 집을 수리하면서 육지에서 헐어버린 마음 어딘가를 함께 수리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쳐 '내집'으로 만든 곳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적막에 맞서 홀로 '버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사내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낯선 여인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과거 자신 앞에서 훌러덩 속바지를 까내리고 오줌을 싸던 한 얄미운 계집을 중년의 모습으로 재회하기도 하고,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 온 파도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불나방과 밧줄과 날치의 각자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기도 하며, 과거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사내의 모습을 빌려 작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 중에는 섬 사람들의 '삶'도 있었을 것이다. 육지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은 결코 상상하지도 못할, 섬 사람들만이 아는, 그들만의 삶. 혹은 천형으로 여기고, 혹은 가혹한 운명으로 여기고 순응해야 하는 그런 삶. 가끔 바다를, 섬을 그리워하여 찾아가 그곳의 풍경에 흠뻑 빠져 낭만을 즐기는 도시것들의 행위는 그야말로 사치일, 바다로 울고 웃는 바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마음은, 어쩐지 조금쯤 쓸쓸하기도 하고,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이 느껴져 마음속에 자꾸자꾸 파도소리만 높아져갔다.
작가, 하면 책상 앞에 앉아 공책 펴 놓고 연필을 쥐고 있거나,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한창훈 작가만은 그보다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바닷가에서 갯것을 채취하거나, 포장마차에서 늦은밤까지 술꾼들의 고단한 술상을 봐주는 등의 모습, 그러니까 삶의 현장들이 떠오른다. 온몸 부딪쳐 직접 체험한 삶의 수많은 경험들이 작가의 문장들에 녹아 있음은, 책을 조금만 읽어봐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문장 곳곳에는 삶을 살아간다는 진지한 행위 뒤에 흐르는 땀방울이, 고뇌가, 고달픔이 그대로 묻어나있기도 하다. 마음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부분들이다. 삶이라는 건 거저 살아지는 게 아니지, 이렇게 온몸 부딪쳐 살아내야 하는 거지, 하는 깨침과 반성 같은 것들. 한창훈 작가가 들려주는 섬 이야기에서, 바다 이야기에서 내가 건지는 '갯것'들은 이런 것.
이 섬 이야기에서도 나는 많은 것들을 건져 올려 마음을 살찌우며, 또 한 번 글로 섬을 배웠다. 책을 읽는 밤마다, 거문도에서 먹고 마신 삼치회와 잎새주 생각에 침을 꼴깍거리기도 해가며...
_ "그때는 이런 노을을 보지 못했어요. 만약 그때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봤다면 혹시 삶이 바뀔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16)
_ 수십마리의 생선이 반찬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흔한 단어 하나로 통일되어 죽었다. 사람 하나 살기 위해 죽어가는 것이 얼마인가. 그리고 그들은 각각 얼마나 오래도록 플랑크톤과 해초와 새끼 물고기들을 먹으며 살았나. 내 손아귀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것은, 이것들의 살은, 결국 숱한 죽음들의 축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삶은 그러니까 죽음의 축적으로 인해 진행된다. 다른 것의 죽음이 내 삶을 진행시켜주는 것이다. (46)
_ 적막과 맞대면을 하면 무엇이 나오는지를, 사실은,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깨달았다기보다는 눈치챘다는 표현이 더 옳은데, 적막을 견디기에는 소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적막의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 소음을 내면 소음의 끝부분에서 적막을 다시 만나야 했고 그럴 때마다 그것은 더욱 크고 넓고 깊어져 있었다. (137)
_ 외로웠죠. 있잖아요, 외로움이라는 건 말이죠, 그걸 해소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찾아오는 거랍니다. 그 전까지는 외로움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그렇죠, 그건 심심한 거죠. 심심한 거와 외로운 것은 달라요. (179)
_ 하지만, 그렇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미래를 잘 몰라서이죠. 알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죠. (196)
_ 그래, 왜 세상에 나와 이런 고단한 삶을 살다가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알 수 없어도 할머니가 소녀시절 늙은 할머니의 머리맡을 지켰듯이, 훗날 늙은 내 옆에도 어린 누군가가 앉아 있겠듯이 삶은 할머니 대에서 끝나는 건 아니었다. 삶은 이어질 것이고 할머니나 나나, 대(代)를 이음으로써 우주의 적막한 시간을 견디는, 알 수 없는, 그 긴 행렬의 중간조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훗날 어린 내 피붙이에게 세상은 무어라고 나는 말하게 될까.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