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껴 두었던 줌파 라히리의 장편을 드디어 꺼내 읽었다.

『축복 받은 집』으로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고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내게 '그저 좋은 작가'가 되어버린 줌파 라히리.

그녀가 태어난 곳은 영국이다. 부모님은 인도 벵갈 출신이다. 그녀는 출생 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에서 자랐다.

그녀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녀는 영국 사람일까, 인도 사람일까, 미국 사람일까?

줌파 라히리의 책에는 미국에서 이민자 2세로 자라며 그녀가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이민 2세, 3세들이) 느꼈을 정체성의 혼란과 인도 벵갈 출신의 부모 밑에서 전통 고수를 위한 일종의 강요와 억압 아래 느껴야 했을 수많은 번뇌가 담긴 글이 많다. (실제로는 작가가 그런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글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내 마음속에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해주며, 나를 작가의 열혈 독자, 작가를 내 마음속의 최고의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한국에서 나고자란 내가 어째서 미국 이민자 2세들이 느꼈을 고통과 고뇌에 공감을 느낄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내 인생에도 그와 비슷한 장면이 담겨 있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늘 줌파 라히리 작품 속 이민 2세들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내며 글을 읽곤 한다. 그들이 결코 원치 않음에도 그저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미국에서도 철저히 벵갈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기를, 거기에서 벗어나 그들이 바라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기를... 비록 그는 부모에게서 나왔으나, 그렇다고 그 삶이 반드시 부모의 '연작소설'이 될 필요는 없는 거니까(그러니까,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아무튼,

 

이 책 속 주인공도 바로 인도 벵갈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 고골리이다. '고골리'라는 이름은 짐작가다시피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에서 딴 것이다. 주인공 아버지의 삶을 바꿔놓게 되는 큰 사건에 이 고골리가 연관을 맺게 되어 아버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작가가 된다. 그러다가 후에 아들에게까지 (우여곡절 끝에) 고골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 것이다. 아버지 마음속에 고골리라는 작가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없는 아들은 후에 이 이름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미국에서 벵갈 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아무런 이음새도 찾을 수 없는 그 이름 아래 혼란스러울 법하다. 후에 고골리는 자신의 본명이 될 뻔 했던 '니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꾼다는 행위가 아니라 그에게 더 큰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고골리는 다른 미국 친구들과 달리 크리스마스 대신 벵갈 전통 명절을 지키고 늘 부모님의 벵갈 인 친구와 그 자녀 들로 북적대는 파티에 참석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캘커타를 방문해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친척과 지내야 하는 등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만 그건 '고골리'라는 이름처럼, 자신이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설령 진짜로 바꿔버렸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영원히 고골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듯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심 한 번 품지 않고 너무나 당연스레 부모님의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싫'지만 그렇다고 훌훌 벗어나버릴 수도 없는 그 현실의 굴레가 내게도 너무 절절하게 와닿아 읽는 내내 마음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고골리는 자신의 이름을 고골리로 받아들였는지 철저하게 니킬로 바꿔버렸는지, 확신은 가지 않지만, 아마, 고골리는 영원히 고골리일 것이다. 아무리 법적 과정을 거쳐 니킬로 이름을 바꿨더라도. 고골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결국 고골리를 다시 그 자리로 돌려 놓게 되는지도.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치명적인 사랑. 원망을 해야 할까, 수긍하고 감사해야 할까... 고골리의 문제는 고골리가, 내 문제는 내가, 각자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결정하고 잘 헤쳐나가야겠지.

 

외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부모님 혹은 다른 외부에서 오는 강요와 억압을 벗어날 수 없어 자신만의 삶을 그리기 어렵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 때문에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 들이 읽으면 정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볼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는 책이다.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오는 공감을 빼더라도, 그냥, 무조건 읽어보면 한없이 빠져들게 될 그런 작가, 그런 책이다. 줌파 라히리의 책들은.

다음 책은 언제 나오려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작가!

 

 

_ 고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네는 아직 젊네. 자유롭다고." 그는 강조하느라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더 늦기 전에 복잡하게 생각 말고, 베개 하나에 담요 한 장 챙겨서 가능한 한 많은 세상을 보고 오게나. 후회하지 않을 걸세. 언젠가는 너무 늦고 말 거야."

"할아버지께서는 그게 바로 책을읽는 이유라고 항상 말씀하셨는데요." 아쇼크가 그 틈을 타 손에 쥔 책을 펴들며 이렇게 말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여행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른 법이지." (28)

 

_ 애칭이란 인생이 항상 그렇게 심각하고, 형식적이고, 복잡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유물, 어린 시절이 남겨준 유물인 것이다. 애칭은 또한 사람이란 함께 있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41)

 

_ "디다, 곧 돌아올게요." 아시마는 이렇게 말했었다. 벵골 사람들은 안녕이라는 말 대신 언제나 이 말을 썼다.

"가서 마음껏 즐기거라." 할머니는 그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치듯 말씀하시면서 아시마를 일으켜주셨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아시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닦아주셨다. "가서 이 할미가 못한 일을 하거라. 다 잘되기 위한 거란다. 명심해야 한다. 자, 이제 그만 가거라." (56)

 

_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 삶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힘든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