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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평점 :
서른 즈음에는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아니, '뭐'가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나는야 시종일관 꿈도 없던 아이였고, 소녀였지. '장래희망' 칸을 채우는 일은 늘 어려웠고, 대충 '재미있게' 적어 넣었다가 교무실에 불려가 혼났더랬지.) 당연히, 모두가 그렇듯이 어느 나이가 되면 어느 것쯤은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다. '장래희망'에 무언가 적어 넣는다고 그게 되겠어? 때 되면 그냥 무언가 되겠지... (그때는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이 먹는다고 '당연히' 무언가가 되어 있지는 않아.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세월을 견디는 사람도 세상에 널렸단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무리 '장래희망' 칸을 채워넣기 힘겨워했다지만, 그 때에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고, 짐작할 수 없었던 사람이 되어 있다.
제출 직전까지의 그 네모칸과 같이, 나는 지금 '빈칸'이다.
소쩍새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그렇게 울어댔고, 나는 서른 넘어 빈칸이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그렇게 빈칸을 마주했던가 보다.
아무튼, 그렇게, 어쩌면 상상도 못했고, 어쩌면 '예지몽'처럼 마주하고 있던 그런 빈칸의 나.
전에는 나도 줄곧 무언가였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미취학아동이었고(노는 것이 의무의 전부인!),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18년 동안은 학생이었고(그 후 잠시 쉬고 2년 간 또 학생이었으니 총 20년을 학생이었고!!), 통역사인 적도 있었고, '교수님' 소리에 거부감 들던 시간 강사였던 적도 있었고, 결코 과거형은 아니지만 과거형으로 말해야만 할 것 같은 번역가이기도 했고...(왜, 시제에는 '일시정지'형이 없는가. '번역가이었 곧 다시 번역가일' 뭐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하시는 일이...?"하고 묻는다면 마지못해 "번역해요."라고 답하겠지만, 글쎄, 번역해서 통장 배불려준 게 언제였던가 까마득하다.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이렇게 대답하고 만다. "놀아요."(이것은 '임시진행'형으로 하면 안 될까? '놀 곧 끝날' 뭐 이정도로.)
그래서 나는 요즘도 내가 참 궁금하다.('그래서 나는 요즘도 내가 참 한심하다'라고 써야 좀 더 옳겠으나, 『뭐라도 되겠지』를 읽고 난 후, 마음이 바꼈다.) 도무지, 나는 뭐가 되려는 걸까...? 내게도, '평생 직업'이라는 게 찾아오기는 찾아올까?
사실, 여기까지는 넋두리. 가만, 그러고 보니 그냥 넋두리는 아닌,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한창 책을 멀리하고 있던 이 때에 사자마자) 펼쳐들었는지 그 배경화면 쯤 되겠다.
나는 정말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뭐가 하고 싶은지 몹시 궁금했다.(빈말이 아니고 정말로. 요즘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남는 시간을 주체 못해 시작했으나, 진심인지 대외용인지 종종 "곧 일어 번역가가 되겠어!"라고 큰소리 치고 있는 까닭이다. '넌 정말 뭐가 되려고 그러니?')
서른이 넘어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잠시 채워졌던 칸을 슬금슬금 지워버리고 다시 빈칸으로 마주하고 있던 이때,
무심한 듯, 냉정한 듯, 그러나 실은 위로의 말인 듯 들려온 음성.
"뭐라도 되겠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아, 그래 뭐라도 되겠지.
슬라이딩 퍼즐을 하다보면 꼭 그런 순간이 오더라. 거의 다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꼭 마지막 한 조각이 엉뚱한 곳에서 배회하고 있어서 모든 열을 다시 다 흐뜨려야 하는.(똑똑한 사람들은 그 순간 계산적이고 체계적으로 절묘한 슬라이딩을 선보이겠지만, 나는 그 한 조각을 맞추기 위해 애써 맞춰놓은 퍼즐을 죄 헝크러뜨리기 일쑤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 조각을 판에서 빼내어 '너의 자리'임이 분명한 그 자리로 갖다 꽂아버리고 싶지만(실제로 그렇게 뺐다가 다시 못 꽂은 퍼즐판이 있다) 얌전히 다시 흐뜨리고 현란한 (하지만 다시 맞춰지지 않을까봐 불안한) 손놀림을 해야 했다. 그 퍼즐들도, 그렇게 맞추다 보면 곧 뭐라도 될 것이었으니까. 꼭 어느 한 조각 삐그덕거려 "다시!" "다 됐다!" "앗, 또 한 조각! 다시!!"를 여러 번 반복해야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뭐라도 되는 그런 순간이 올 것을 믿기에,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퍼즐판.
그깟 퍼즐판 하나도 믿고,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나를 의심하고 포기할쏘냐.
나도 뭐라도 되겠지. (가만... 애초에 퍼즐판은 반드시 '뭐'가 되도록 만들어졌지만, 나는 설마 '뭐라도 되겠니?' 버전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긍정적이어졌고, 점점 태평해졌고 ('너는 지금 태평해야 할 때가 아니란다!'), 점점 포근해졌고, (약발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믿고 버티고 싶어졌다.
그 끝에는 뭐라도 된 내가 있을지도 모르고, 끝내 '뭐라도 되겠니?' 버전의 불량품이었음을 확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설마, 그렇기야 하겠니...), 나를 지탱해주던 긍정적인 연료들이 당장이라도 바닥을 드러낼 것 같던 때에 내 마음에 은혜와 같은 땔감 쌓아준 이 책이 있어, 나는 이 밤, 참 행복하다.
작정하고 웃기는 것도 아니고(아니, 이건 좀 작정했을지도 모르겠다. '글 멋있다는 말보다 웃기다는 말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니까), 작정하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울리는 것도 아닌데,
웃었고, 위로받았고, 울었다.(사실, 이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흘린다면, 당연히 배꼽을 흘릴 줄 알았지...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울었느냐고 물어봐도 절대 대답해주지 않을 거다. 거기에서 왜 울었냐고 할 테니까.)
요즘으로는 참으로 이례적으로 책을 사자마자 읽고, 또 읽자마자 리뷰를 쓴다.
쓰고 보니, 몇 줄 빼고는 '제목을 읽고나서...' 혹은 '제목, 그 후 넋두리...' 뭐 이런 식의 제목을 달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뭐, 그래서 이 밤 내가 끼적끼적한 게 독후감도 아니고 리뷰도 아니고 그렇다면, 뭐,
'재능'이란,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