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여행, 혹은 여행처럼』 에서 만난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이야기...

 

 

1995년 2월 말,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소모뚜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날은 그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다. 공항은 집에서 택시로 40분 정도 거리였다. 그는 엄마가 해준 콩 볶음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볶음밥이라기보다는 콩을 삶아서 밥이랑 양파랑 비벼먹는 빼뽁이란 요리였다. 그날 이후 그 요리를 두 번 다시 먹어보진 못했기 때문에 빼뽁의 냄새는 언제나 코끝에 감도는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부모와 동생 둘,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에에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버마 양곤 국제공항이었다. 처음엔 난생처음 공항에 왔기 때문에 여기저기 구경을 했다. 그렇지만 비행 시간이 가까워오자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정말로 고향을 떠나는구나! 이제 몇 년 있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 3년쯤 걸릴까?' 탑승할 때가 되자 엄마가 그를 안아주고 양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울기 시작했다. 

 

"내 큰아들, 건강하고 무엇보다 네가 가장 소중해. 너보다 소중한 건 없어. 이별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지. 살아 있으면서 하는 이별, 죽어서 하는 이별. 살아 있으면서 헤어지는 건 견딜 수 없어. 하지만 죽어서 이별하는 건 견딜 수가 없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돌아와다오! 이렇게 건강하고 이렇게 믿음직한 모습으로."

 

소모뚜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 돌아올게요"라고 약속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울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다섯 명, 소모뚜는 혼자, 5대 1이니까 우리가 울면 안 돼.'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고 있다는 걸 소모뚜는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아빠가 말했다.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텐데 인내심을 갖고 살아라. 고통스런 것, 힘든 노동 다 참아내라. 하지만 단 하나, 올바르지 못한 건 참지 말아라."

 

소모뚜는 아빠에게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손을 흔들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소모뚜 소속 밴드 Stop Crackdown 앨범에서 들은 노래, '월급날'

 

 



오늘은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한참동안 받지 못했던 월급을 돌려준대요

나의 소중한 가족들 사랑하는 부모님

이제는 나의 손으로 행복하게 해줄게요

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 사모님 내 월급을 주세요

나의 꿈과 희망이 담긴 조그맣고 소중한 내 월급

얼마 전 하얀 봉투 들고 퇴근했던 동료들

내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 말라고 말하지

자정 시간이 넘어야 나의 일이 끝나네

봉투 없는 내 월급 오늘도 보이지 않네

나에겐 좋은 날이 언제 올런지...?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 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

날 욕한 건 참을 수 있어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

 

_ '월급날', Stop Crackdown

 

 

 

 

다시 또,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으로 돌아와서,

 

 



_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물었어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나? 한국에서 너는 무슨 죄를 지었나?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같이 살아갈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IMF도 같이 겪었다, 우리도 월급을 삭감했고 우리도 야근 수당을 받지 않았다, 사장이 조금만 참고 견뎌보자고 하면 우리도 그렇게 했다, 월드컵 때도 함께 응원했다, 기쁨도 슬픔도 같이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 친구 아닌가?

 

_ 내가 노동자란 걸 인정해달라. 우리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인정해달라. 우리는 Stop Crackdown이라고 외쳤어요. 그러다가 난 그 온갖 국적의 냄새 속에서 어떤 희미한 희망을 봤어요. 나는 당당했던 겁니다. 비자가 없는데도 나는 왜 당당한가? 나는 쫓겨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당당할 수 있는가? 나는 노동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자의 도장 하나가 나와 우리의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희망의 느낌으로 밴드 이름을 정했어요.

 

_ 나는 인권이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권은 나도 당신보다 못나지 않다, 그렇다고 잘나지도 않았다, 다만 나도 당신과 같은 인간이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나보다 못하지 않다, 당신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 내겐 그런 것이 인권입니다.

 

_ 우리가 출발점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는 딱 한 경우뿐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자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 경우, 안주할 경우. 그러니 소모뚜의 여행은 계속된다.

 

 

 

 

 

 

추석, 모처럼의 여유를 맞아, 가족들과 근처 산길을 걸었다.

오가는 길에, 조금씩 다른 피부색의 이들을 종종 스쳤다. 타국의 명절에, 고국 생각 간절할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집에 돌아와 스탑크랙다운의 앨범을 틀었다. 씨디 플레이어가 따로 있지 않아 컴퓨터를 켜면 들어야지, 하다보니 씨디를 받고도 며칠간 듣지 못했다.

 

오, 노래 괜찮은걸.

제법 흥도 겨웠다.

신이 나서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노래에서 하던 일을 가만히 멈추고 노래에 더욱 귀를 기울이며 가사집을 펴들었다.

'월급날'...

외국인 노동자들의 '흉내'를 내며 '농담'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한 마디가 생각났다.

"사장님 나빠요!"

 

사장님이 나빠서, "사장님 나빠요!"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슬퍼서, 사장님과 같은 나라 사람인 게 미안해서,

그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을 펼쳐 소모뚜의 이야기를 읽으며, 더 그랬다...

 

나는 출발지점으로 돌아가기 힘든 사람이다. 지금 있는 이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고, 안주를 바라니까.

나의 현실도 바꾸지 못하는 내가, 그깟 눈물 몇 방울로 뭘 할 수 있을까. 눈물 몇 방울 마저도 부끄러워진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도, 이런 노래를 듣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보름달의 효험 같은 것 믿지 않지만, 그래도 추석 보름달 향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원 하나 빌고 싶어졌다.

한국인도, 외국인 노동자도, 사장님도 아닌, 그냥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오게 해달라고.

 

 

가장 곤궁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_ 브레히트 

 



 

※ 스탑크랙다운은,

 

스탑 크랙다운은 공장에서 이주노동자로서 열심히 일하면서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노래로 밴드 활동을 하고 있는 다국적 노동자밴드이다.



2003년 11월15일 ‘고용허가제’ 도입과 함께 시작된 미등록노동자 단속에 맞서 결성되었다.

이주노동자 천막농성 중 만나게 되어 결성된 그룹으로 스탑크랙다운(stopcrackdown)의 이름은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반대의 뜻을 담은 ‘탄압을 중단하라’는 뜻이다.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노래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이들은 농성장인 천막 안에서 1집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처럼 이들은 전기부품공장, 종이공장, 철판공장, 봉제공장 등에서 일을 하면서 주말에는 노래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알리고 있다.



멤버들이 각각 인천, 동대문, 의정부 등에서 일하고 있어 연습이라곤 일요일만 가능하지만

휴일을 반납하고 최근 2집을 발매했다. 1집에서는 노동자의 수많은 요구사항을 담기 위해 상대적으로 '구호'로써의 성격이 짙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음악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화합’의 의미를 담았다. (출처: 스탑크랙다운 카페 http://cafe.daum.net/stopcrackdown/)

 

음반구매는 이곳에서 ☞ http://cafe.daum.net/stopcrackdown/Er4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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