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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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친한 친구 둘에게 물었습니다. 살면서 읽은 책들 중 가장 좋았던 책이 무엇이었느냐고. 두 친구의 답은 같았습니다. '앵무새 죽이기'라고.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이 최고로 꼽는 책을 (나름 독서가 취미인) 저는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왠지 자존심 상하고,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앵무새 죽이기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던 데다, 실은 나중에 읽어야지...하며 예쁘게 책장에 꽂아놓고 관상만 하고 있던 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로지 앵무새 죽이기 한 작품만을 썼다는 하퍼리의 숨겨진 신작이 전세계에 동시 출간될 거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불게 된 하퍼리 열풍. 그렇게 저도 시류에 편승해 마침내 앵무새 죽이기를 읽게되었습니다.

 

 흑인, 배려, 사회적 약자 등등의 키워드. 워낙 명성이 자자한 책인지라 저도 이 정도의 키워드를 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야기가 한없이 무겁고 진지할 줄로만 알았지요. 그런데 왠 걸... 전 시종일관 책을 읽으며 엄마 미소를 지었습니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스카웃과 그녀의 오빠 젬, 그리고 그들의 아빠 애티커스, 이들 가족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따뜻했거든요. 이제 갓 학교에 입학한 철부지 소녀 스카웃, 사춘기를 겪으며 점점 의젓하게 성장해 나가는 젬, 그 남매를 매우 개방적인 교육으로 대하는 애티커스. 이런 인물들의 경우 상당히 전형적인 느낌이라 현실성이 없게 느껴져 거부감을 일으킬 만도 한데(이런 점 때문에 사실 전 고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없이 정겹고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스카웃과 젬과 딜이 이웃의 부 아저씨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장면에선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요. 듀보스 할머니와의 일화에선 상당히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갖은 호기심으로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들 삼총사의 짖굿은 행동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엄하게 주의를 주던 애티커스의 모습에선 저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 p. 174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

 

 1부의 내용이 스카웃과 젬의 성장담이 주를 이루었다면 2부에선 흑인 톰의 소송 사건이 주를 이룹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남북전쟁이 북부군의 승리로 끝나고, 노예제도는 폐지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한번 생긴 의식이란건,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고착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지요. 때문에 메이콤 사람들은 '흑인'의 변호를 맡겠다는 애티커스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경멸하고 협박하고 위협까지 하는 수준까지 이르지요.  하지만 끝끝내 애티커스는 톰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그 재판 과정이 꽤나 세밀하게 그려지는데, 마치 법정 소설을 읽듯 긴장감 넘치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재판 과정과 결과 덕에 스카웃과 젬은 한층 더 성장하게 되지요.

 

『 p. 200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

 

 그런데 저는 이 '성장'이란 것이 비단 스카웃과 젬만의 성장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메이콤 사람들 모두의 성장이었고, 미국 전체의 성장이었으며, 전 세계의 성장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의식의 성장, 양심의 성장, 마음의 성장말입니다. 흔히 우리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하곤 합니다. 하지만 먼 과거를 뒤돌아 보고 지금을 보면 분명 많은 것이 변했고, 많은 부분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거란 매너리즘에 빠져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아마 자멸하고 말겁니다. 때문에, 쉽게 달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애티커스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영웅이며,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나갔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성장은 완결형이 아닌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 p. 213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

 

 고작 아홉살의 스카웃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 애티커스는 사랑스러운 딸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우리는 그들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다.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꼭 인종 문제 뿐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은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하니까요. 

 

『 p. 420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 』

『 p. 517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

 

  사랑스러운 소녀였던 스카웃은 20년 동안 얼마나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였을까요? 이제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숙녀'가 되었을까요?  앵무새 죽이기 이후 20년이 흐른 시점을 그리고 있다는 '파수꾼'이란 이야기가 굉장히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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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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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31 '이런 일에 관련되면 선의여도, 꺼림칙한 구석이 조금도 없어도 괴로운 경험을 겪게 돼. 그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서도 무언가가 변하고 말지." 나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무엇이 변하는 것일까.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원서의 제목은 '베드로의 장렬'

 

한글판의 제목도, 원서의 제목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십자가나 베드로라는 단어를 보고 종교적인 이야기인가도 싶었지요. 또 뜬금없는 '반지'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도 싶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며 제목의 의미를 파악했을 때, 조금 감탄했습니다. 조금 심오하지만 이 책의 주제를 참 문학적으로 잘 담고 있구나 싶었거든요.

 

미술에는 일자무식이고, 종교 분야엔 더더욱 백치여서 몰랐는데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라는 그림이 있다는군요. 관리들과 군중에게 붙잡힌 예수 곁에 홀로 끝까지 머물렀던 베드로가 엄한 추궁에 결국 자신의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맹세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 하네요.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에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진실을 말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해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장례 행렬을 뜻하는 '베드로의 장렬'이 원서의 제목. 거짓말은 했지만, 결국 그 거짓말을 회개한 베드로. 이는 이 소설 속 어떠한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한글판 제목에서의 '십자가'라는 단어의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네요.

 

p.406 하나의 꽃이 열매를 맺고 거기에서 수없이 많은 씨가 터져 나와 바람을 타고 퍼져서, 새로운 장소에서 작은 싹을 틔운다. 그런 것이다. 다만 그 꽃은 악의 꽃이었다. 』

 

어렴풋한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하루는 아버지 지인분께서 집에 찾아와 정수기 판매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단계, 혹은 피라미드. 저희 아버지는 그런 걸 끔찍히도 싫어하셔서 아주 곤혹스럽게 거절하시는 걸 목격한 경험이 있습니다. 피라미, 혹은 다단계라는 덫. 물건 하나쯤 사주고 보는 손해...라면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 조직에 가입하기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붓고 결국 그 재산을 되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그 덫에 끌어들이는 무서운 조직. 그들은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거지요. 그렇게 점점 퍼지고 뿌리 내려가는 악의 씨.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의 '절대 반지' 같습니다. 절대 반지는 그를 소유한 인물들은 점차 오염시키고, 마음을 좀먹고, 인격뿐만 아니라 용모도 바꾸어 버립니다. 그렇게 악은 전염되어 갑니다. 바로 여기서 제목에서의 또 다른 단어 '반지'의 의미도 찾을 수 있겠네요.

 

p.454 악은 전염된다. 아니, 모든 인간이 마음속에 깊이 숨겨 가지고 있는 악, 말하자면 잠복하고 있는 악을 표면화시키고 악행으로 나타나게 하는 '마이너스의 힘'은 전염된다고 할까.

 

이 소설은 반지를 통해 악을 퍼뜨린 인물이 결국 베드로처럼 회개하여 십자가를 지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발전하고 해결되는 과정이 조금 더디게 더디게 진행되지만, 이렇게 제목에서의 심오한 의미들을 찾고 되새기게 하여 어마어마한 분량인데도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p.512 거짓말이 사람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까닭은, 늦든 이르든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거짓은 영원하지 않다. 사람은 그렇게 강해질 수 없다. 가능하면 올바르게 살고 싶다, 착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한 거짓말이라도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게 되어 언젠가는 진실을 말하게 된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제가 이 책을 통해 행복한 탐정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지라, 주인공인 스기무라가 겪는 위기와 내적 갈등과 그를 극복하고 한층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처음부터 그를 지켜봐온 독자만큼은 깊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말을 보아하니, 스기무라의 이야기는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한층 성숙하여 돌아 올 진짜 "행복한 탐정 스기무라"를 기다리겠습니다.

 

p. 795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은 인연이다. 살아 있고 피가 통하는 인연이 어떤 이유로 약해지고 가늘어지고 결국 죽어 버리면, 그 인연에 더 이상 매달려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리뷰는 출판사나 작가와 전혀 상관없는 몽실 서평단에서 지원받아 읽고 내마음대로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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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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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미성년 성폭행 및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있다. 당시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로 풀려난 후 현재는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상태다. 당시 피해자와 깊은 연이 있던 현직 검사는 새로 맡게 된 사건의 용의자 목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목격하게된다.

 

자, 한번 생각해보라. 이 상황의 검사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것인가?

 

검찰 측 죄인이란 소설은 이런 의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다. '정의'... 글을 깨우치고 읽게 되는 수많은 동화 속 이야기에서 우리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게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게 되는 어쩌면 당연한 '정의'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정말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세상인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과 권력등에 휘둘리며 그 정의가 한껏 왜곡되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

 

주인공인 모가미는 '법'을 수호 해야하는 검사로서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다. 공소시효 제도라는 제약으로 인해 법은 '정의'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모가미의 선택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자신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정의'의 집약체라 볼 수 있는 '법'을 어김으로써 '정의'를 위반하고 마니 말이다. 즉, 어느 쪽을 선택해도 올바른 답안을 얻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만다.

 

재밌는 건 모가미와 함께 독자인 나도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검사가 당연히 법을 수호해야하지 않는가...하면서도, 한편으로 피의자인 마쓰쿠라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하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이지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단 몇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인 이 책이 쉴 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건 바로 그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수작 법정스릴러였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결말은 쓰디 썼다. 어쩔 수 없는 결말이기에...

 

일본은 강력 범죄에 한해 공소시효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끊임없이 공소시효 제도 폐지에 대한 의견이 도마에 오르곤 한다. 나는 법 전문가가 아니기에, 어느 쪽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시간이 얼마나 흐르더라도 꼭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그 단순한 정의가 지켜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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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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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믿고 읽는 이사카코타로^^ 획기적인 연작소설이래서 더욱 기대가 큽니다. 제목은 강렬하지만 분명 또 따뜻하고 밝은 이야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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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이사카 코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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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지극히 평범한 게 개성인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그 말이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평범한 일상. 그 평범한 일상에 무료하다고 때론 투정도 늘어놓지만, 그 평범함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그냥 계속 평범했으면 좋겠는데...하고 바라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평범한 일상에 자극을 주는 허구(그러니까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속 독특한 캐릭터들에 유독 매료되곤 한다. 어떤 소설을 읽고 만족도를 표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요소가 바로 '캐릭터'일 정도로.

 

 이 소설엔 여지껏 그 어느 소설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역대급 개성을 자랑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정법원 소년조사관인 '진나이'라는 인물. 직업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가정법원 소년조사관이란 생소한 직업은 '심리학과 사회학 지식을 활용하여 소년범죄의 원인과 발생 구조를 밝혀내, 판사에게 적절한 처우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비행 문제 전문가(본문 p.84)'라고 소개되어 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중간 형태 같기도 하고 뭔가 굉장히 그럴싸하고 정의롭게 들리는 직업 정의. 하지만 진나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결코  그럴싸 하다거나 정의롭지 않다. 때문에 그가 겪게 되는 일들도 결코 범상치가 않다. ATM기기를 이용하면 될 걸 굳이 폐점한 은행 창구를 이용하겠다고 셔터를 내리는 중의 은행에 쳐들어가 은행 강도를 만난다. 비행 청소년들에게 당하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는 진나이 본인이 오히려 당하는 학생에게 한방 먹이기도 한다. 말하기 좋아하고, 과대망상에, 단정짓기 또한 특기다. 결코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인물.

 

 한창 축구 경기가 진행중인데 난데없이 그라운드로 굴러들어온 럭비공. 바로 그 럭비공처럼 진나이는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에 뛰어들어 파문을 일으킨다. 그렇다. 사실 '진나이'는 이 소설의 공식적인 주인공이 아니다. 평범한 가정법원 조사관인 '무토', 평범한 은행원인 '유코', 평범한 시각장애인 '나가세'. 이 지극히 평범한 세 명의 인물이 이 소설 속 다섯편의 단편의 서술자이고 또한 주인공이다. '시각장애인이 뭐가 평범해?'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런 의문을 품었다면 진나이에게 분명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시각 장애인이라고 특별 대우라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실제로 본문 속에 이런 비슷한 상황과 대사가 등장했고, 나는 뜨끔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평범하다는 모호한 기준을 적용해 편견이란 것에 사로잡혀 있던 건 아닐까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 세사람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무토는 비행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이끌려 고군분투하지만 그 청소년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인 나가세는 밖에서는 늘 사람들의 딱하다는 시선을 받는다. 그런 그들의 일상에 진나이가 끼어든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고, 꼬이고, 풀린다.(그 과정에서 범죄, 추리, 반전등의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이런 저런 과정에서 그들은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어느새 진나이에게 동화되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 하지만 진나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크게 바뀌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무토는 수도없는 비행 청소년과 이혼 부부를 만나게 될 것이고, 유코는 지긋지긋한 직장 상사의 잔소리를 들을 것이며, 나가세는 앞으로도 쭈욱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진나이라는 인물이 그들 곁에 있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안도현 시인은 어떤 글에서 바다가 파란 이유가 바다가 잠이 들어 바닷물이 썩을까봐 파도가 자꾸 자꾸 바다를 깨워 멍이 든 것이라고 표현했다. 진나이는 바로 이 '파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진나이를 곁에 둔 주인공들이 부럽다. 이왕이면 내가 진나이 같은 인물이 되면 좋겠지만, 앞에서도 밝혔듯 나는 지극히 평범한 게 개성인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2004년에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었는데, 십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작가는 이 작품의 후속작을 구상중이라 한다. 이번엔 장편으로. 그 말많고 오지랖 넓고 엉뚱하기 짝이없는 진나이는 그 시간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전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나이의 말도 안되는 억측과 수다를 오랜만에 다시 들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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