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이사카 코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너는 지극히 평범한 게 개성인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그 말이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평범한 일상. 그 평범한 일상에 무료하다고 때론 투정도 늘어놓지만, 그 평범함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그냥 계속 평범했으면 좋겠는데...하고 바라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평범한 일상에 자극을 주는 허구(그러니까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속 독특한 캐릭터들에 유독 매료되곤 한다. 어떤 소설을 읽고 만족도를 표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요소가 바로 '캐릭터'일 정도로.

 

 이 소설엔 여지껏 그 어느 소설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역대급 개성을 자랑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정법원 소년조사관인 '진나이'라는 인물. 직업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가정법원 소년조사관이란 생소한 직업은 '심리학과 사회학 지식을 활용하여 소년범죄의 원인과 발생 구조를 밝혀내, 판사에게 적절한 처우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비행 문제 전문가(본문 p.84)'라고 소개되어 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중간 형태 같기도 하고 뭔가 굉장히 그럴싸하고 정의롭게 들리는 직업 정의. 하지만 진나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결코  그럴싸 하다거나 정의롭지 않다. 때문에 그가 겪게 되는 일들도 결코 범상치가 않다. ATM기기를 이용하면 될 걸 굳이 폐점한 은행 창구를 이용하겠다고 셔터를 내리는 중의 은행에 쳐들어가 은행 강도를 만난다. 비행 청소년들에게 당하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는 진나이 본인이 오히려 당하는 학생에게 한방 먹이기도 한다. 말하기 좋아하고, 과대망상에, 단정짓기 또한 특기다. 결코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인물.

 

 한창 축구 경기가 진행중인데 난데없이 그라운드로 굴러들어온 럭비공. 바로 그 럭비공처럼 진나이는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에 뛰어들어 파문을 일으킨다. 그렇다. 사실 '진나이'는 이 소설의 공식적인 주인공이 아니다. 평범한 가정법원 조사관인 '무토', 평범한 은행원인 '유코', 평범한 시각장애인 '나가세'. 이 지극히 평범한 세 명의 인물이 이 소설 속 다섯편의 단편의 서술자이고 또한 주인공이다. '시각장애인이 뭐가 평범해?'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런 의문을 품었다면 진나이에게 분명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시각 장애인이라고 특별 대우라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실제로 본문 속에 이런 비슷한 상황과 대사가 등장했고, 나는 뜨끔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평범하다는 모호한 기준을 적용해 편견이란 것에 사로잡혀 있던 건 아닐까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 세사람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무토는 비행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이끌려 고군분투하지만 그 청소년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시각장애인인 나가세는 밖에서는 늘 사람들의 딱하다는 시선을 받는다. 그런 그들의 일상에 진나이가 끼어든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고, 꼬이고, 풀린다.(그 과정에서 범죄, 추리, 반전등의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이런 저런 과정에서 그들은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어느새 진나이에게 동화되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 하지만 진나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크게 바뀌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무토는 수도없는 비행 청소년과 이혼 부부를 만나게 될 것이고, 유코는 지긋지긋한 직장 상사의 잔소리를 들을 것이며, 나가세는 앞으로도 쭈욱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진나이라는 인물이 그들 곁에 있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안도현 시인은 어떤 글에서 바다가 파란 이유가 바다가 잠이 들어 바닷물이 썩을까봐 파도가 자꾸 자꾸 바다를 깨워 멍이 든 것이라고 표현했다. 진나이는 바로 이 '파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진나이를 곁에 둔 주인공들이 부럽다. 이왕이면 내가 진나이 같은 인물이 되면 좋겠지만, 앞에서도 밝혔듯 나는 지극히 평범한 게 개성인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2004년에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었는데, 십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작가는 이 작품의 후속작을 구상중이라 한다. 이번엔 장편으로. 그 말많고 오지랖 넓고 엉뚱하기 짝이없는 진나이는 그 시간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전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나이의 말도 안되는 억측과 수다를 오랜만에 다시 들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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