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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ㅣ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평점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작가, 남녀노소 누구나 읽는 작가, 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이런
수식어들을 모조리 달고 다니는 작가가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오로지 한 사람만이 떠오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가 서거한 지
400년이 흐르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위대한 작가들이 모여 위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니, 이는 '셰익스피어 다시 쓰기'입니다. 호가스
출판사에서 기획한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한 작가들은 앤 타일러, 요네스뵈, 길리언 플린 등 라인업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굉장히 설레고 흥분되는 프로젝트지요. (저도 개인적으로 특히 요 네스뵈가 다시 쓰는 맥베스가 굉장히
기대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현재 세계적으로, 대중적으로, 평단에서도 두루 인정 받는 작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쓴다는
것은, 작가 인생에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부담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 써봐야 본전이랄까요? 하물며 이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의 첫 스타트를 끊는 것은 더더욱 큰 부담이었겠지요.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작가는 바로 '지넷 윈터슨'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택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겨울 이야기'이구요. 하지만 다행히(?) 책의 도입에 '겨울 이야기'의
줄거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는 원작으로, 지넷 윈터슨이 쓴 '시간의 틈'은 개작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지요.
패러디나 오마주가 아닌 '개작'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면, 원작을 아주 잘 살리겠단 뜻이지요. 저는 솔직히 이 프로젝트 자체가,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조금의 모티프만 따 올 뿐 원작과는 전혀 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개작'이란 단어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런데 정말 '개작'이라는 표현을 쓸 법 하더라고요. 소설의 무대가 400년이 지난 현대라는 점, 시칠리아라는 가상의 나라는
주인공 '레오'가 경영하는 회사 이름이라는 점 등 몇가지 요소들이 현대의 시기에 맞게 수정되었을 뿐, 원작의 캐릭터나 스토리 등은 잘 살아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해지 펀드의 경영자이자 난폭하고 속물인 '리오', 세계적인 컴퓨터 게임 개발자이지만 자유로운 영혼 '지노', 유명한 미녀 샹송
가수인 '미미'. 작품의 전반부는 이 세사람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러브 스토리 앞에 '아름다운'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는 차마 없을 것
같네요.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압축할 수 있는 단어들을 나열해 보자면, 질투, 동성애, 불륜 등등이 되거든요. 흡사 사랑과 전쟁이나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막장 요소들이지요. 그리고 이런 스토리의 중심엔 '리오'가 있습니다. 지노의 죽마고우이자 미미의 남편인 리오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질투에 눈이 멀어 갈 때 까지 가고 맙니다. 미미가 낳은 여자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지노의 아이라고 판단 급기야
아이를 버리는 일까지 행하거든요. 결국 미미가 낳은 여자 아이는 베이비 박스에 버려져 한 흑인 남자의 손에 길러집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17년이 흐르지요. 이제 숙녀로 성장한 '퍼디타',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남자 '젤'. 17년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순수하게(?),
그렇지만 애틋하게 펼쳐지는 후반부의 이야기. 그렇게 과거와 현재는 닮은듯 다르게 얽히고 설켜갑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줄거리는 딱 여기까지만;;;)
작품을 읽어 가며, '리오'라는 캐릭터를 보며, '질투'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질투도 사랑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리오'가 행한 행동들이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무마되기 힘든 면도 있지만, 결국 리오의 그
지극한 '사랑'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리오의 질투의 대상이 과연 '지노'인 것인지, '미미'인 것인지
헷갈린다는 점입니다. 지노의 경우는 분명 게이였지만, 리오는 그게 조금 애매하거든요. 분명 미미를 지극히 사랑하는데, 지노도 못지 않게 사랑하는
것 같더란 말입니다. 결국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간 리오의 '질투'는 지노와 미미가 리오를 버릴까봐 불안하여 생긴, 일종의 애정 결핍 비슷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엇나간 방식의 사랑의 대가로 불행해집니다. 리오라는 인물은, 작품을 읽어
가는 내내 제 내적 갈등을 심하게 일으키게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절대 이해가 안됐다가, 한없이 안쓰러워지기를 반복하는 인물이었거든요.
그리고 '질투'가 엇나간 방식의 사랑이라면, '용서'는 지극히 위대한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문에 '질투'로 벌어진 파국을 '용서'로
바꿀 수 있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사랑하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겠지요. 이 작품 속에서의 그 사람(?)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과거의 파국 속
주인공들은 17년이라는 '시간의 틈'에서 충분히 고통 받으며 속죄했을 테니, 용서 받을 자격도 있지
않을까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참 막장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몹시 섬세한 문장들이 그런 요소를 고품격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문학이니 문장이니 쥐뿔도 모르지만요;;;) 그리고 심지어 잘 읽히기까지 합니다. 무거우면서 경쾌하지요. 때문에 순문학이나
고전을 읽을 때면 몹시 힘겨워 하는 저도 매우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하늘에서 셰익스피어도 굉장히 흐뭇해하며 아빠 미소를
짓지 않을까요?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의 다른 작품들도 몹시 기대됩니다. 다음 작품들이 나올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들 복습부터 해두어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