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이사카고타로의 연애 소설이란...>
대놓고 연애 소설이랍니다. 무려 ‘이사카고타로’가 말이죠. 그는 거듭 자신은 연애물엔 관심도 소질도 없다고 밝혔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놓고 ‘연애 소설’을 썼다니요. 그래선지 솔직히 그의 연애 소설에 ‘달달함’이나 ‘로맨틱함’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에도 이사카고타로는 ‘연애’를 테마로 몇 편의 단편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투명한 북극곰(I love you라는 단편집에 수록)’이나 ‘사신의 로맨스(사신 치바에 수록)’나 ‘나의 배(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에 수록)’ 등에서 말이죠. 하지만 이들 작품은 솔직히 ‘연애’가 소재인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인상이 강했거든요. 때문에 이 연작 소설 역시 그런 느낌이 강하리라 예상했습니다. ‘연애’를 테마로 한 ‘따뜻함’을 선사하는 ‘미스터리 소설’일 거라고 말이죠. 이런 저의 예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습니다.
<긴 제목, 긴 여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제목을 단숨에 말하기가 숨이 찰 정도입니다. 어찌 들으면 외계어 같기도 한 이상한 제목.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꽤 익숙한 클래식의 제목이랍니다. 모차르트의 소야곡(세레나데)이거든요. 이 음악의 첫 소설만 들어도 누구나 ‘아! 이거?!!!’할 정도로 익숙한 곡이에요. 그렇다면 이 작품집이 모차르트의 소야곡을 소재로 했느냐? 그건 아닙니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라는 독일어의 뜻이 ‘어떤 작은 밤의 음악’이라는데, 이 작품집에서는 ‘만남’ 혹은 ‘인연’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밤중 느닷없이 들리는 작은 음악 소리처럼, 딱 그 순간에 느끼는 게 아니라, 나중에서야 그것이 계기였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만남’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 작품집은 6개의 단편 모두에서 ‘만남’과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작지만 소중하게, 세레나데처럼 잔잔하게 그들의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로인한 여운은 잔잔한 물결위의 파문처럼 널리널리 퍼져갑니다.
<특별하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인연>
이사카고타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독특한 직업(사신, 도둑, 강도, 가정조사관, 킬러, 심지어 자동차나 고양이)을 가졌거나, 이런 인물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을까 싶게 독특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런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설문 조사 회사 직원, 프리타, 복싱 선수(그나마 이 직업이 제일 독특한 직업이겠네요.), 미용사, 화장품 회사 직원, 학교 교사, 고등학생 등등.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인물들이 주인공이지요. 때문에 그들에게 벌어지는 일들도 소소하고 평범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평범한 인물들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만남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설문 조사를 해준 여자 가방에 달려 있던 버즈라이트이어(토이스토리 주인공) 인형(단편:아이네 클라이네), 지갑과 통장과 면허갱신이 이어주는 인연(단편:도쿠멘타), 어쩌다 보니 만나지는 않고 전화로만 관계를 이어가는 남녀(단편:라이트헤비), 권태기가 찾아온 젊은 연인(룩스라이크). 그들의 만남은 이렇듯 평범한 듯하지만, 또한 특별합니다. 위기에 처한 공주를 백마 탄 왕자가 구해주듯 극적이진 않지만, 돌이켜보니 ‘그때 그 사람이 지금 이 사람이어서 참 다행이다.’ 하는 소중함. 그렇기에 특별해지는 인연들인 것이니까요.
이전 작품들 속 주인공들은 ‘평범하게 특별한’ 인물들이었다면, 이번 작품 속 주인공들은 ‘특별하게 평범한’ 인물들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그런데 실은 결국 모든 사람은 특별하면서 평범하고, 평범하면서 특별한 거 아닐까요?
<어떤 작은 소설 속 음악>
‘음악’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군요. 이 작품집의 시작인 ‘아이네 클라이네’의 집필 계기는 상당히 이채롭습니다. 작가는 평소 음악광이기도 해서, 그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음악가와 음악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음악광 작가가 좋아하는 뮤지션 중 한명이 일본의 ‘사이토 가즈요시’라는 가수라네요. 그런데 어느 날 사이토 가즈요시로부터 작사 의뢰가 들어오게 되고, 노래 가사를 쓰긴 힘들지만 그와의 공동 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작가가 가사 대신 소설을 쓰게 되니, 이 작품이 바로 ‘아이네 클라이네’였던 것이죠. 그리고 사이토 가즈요시는 이 단편 ‘아이네 클라이네’를 노래 가사로 개작(?)을 하게 되니 그 노래가 바로 ‘베리 베리 스트롱 아이네 클라이네’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노래 가사를 들여다보면, 단편 ‘아이네 클라이네’ 속 인물들의 상황과 소재들이 담겨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소설과 노래 가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실 겁니다.
그런데 사이토 가즈요시와 이사카 고타로의 공동 작업은 또다시 이어집니다. 이번엔 사이토 가즈요시의 앨범 특전 부록으로 이사카 고타로의 단편 소설을 싣게 된 것이죠. 그 단편이 바로 ‘라이트헤비’였습니다. 이에 작가는 또 이왕이면 사이토 가즈요시의 노래들을 소재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 작품 속에 무려 7곡(후에 단편 나흐트무지크에도 한곡 더 추가되어 결과적으로는 8곡이 됩니다.)의 가사를 정말이지 절묘하게 녹여냈습니다.
100엔을 주고 자신의 상황을 말하면 그에 맞는 노래를(작품 속 표현을 빌리자면 전부 사이토 머시기의 노래) 틀어주는 미스터리한 남성.(작품 속에선 그냥 사이토씨라고 불림) 그가 들려주는 음악들은 정말이지 인물들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들이었습니다. 작가는 가사를 먼저 선택한 후 가사에 맞는 이야기를 썼던 걸까요? 이야기를 먼저 쓰고 그에 맞는 가사를 찾았던 걸까요?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사이토씨의 주크박스 상담소 같은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꽤 괜찮지 않을까, 자주 찾아가지 않을까, 아니 내가 한번 해볼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봅니다.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진짜 한번 음악 상담소 같은 거 열어볼까요? 아... 저작권이 문제가 되려나요? ㅋㅋ;;
<단편 소설인 척하는 장편 소설 – 이사카 월드의 축소판>
작가는 ‘칠드런’이라는 소설을 냈을 때, 띠지에 이렇게 적었었습니다. ‘단편 소설인 척하는 장편 소설’이라고 말이죠. 작가는 단편보단 장편을 더 선호한다고 자주 밝혔습니다. 그런데 잡지나 신문 등의 연재 덕에 독자들은 단편에 대한 호응도가 더 좋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래서 낸 작가 나름의 계책이었을까요? 작가가 여기저기 연재했던 단편들을 모아 낸 단편집은 실상은 장편 소설의 색을 띱니다. 아마 오롯이 단편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피시스토리’라는 작품 하나 같네요. 아무튼, 이 단편집 또한 그런 그의 작풍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2007년에 ‘아이네 클라이네’와 ‘라이트헤비’를, 2011년에 ‘도쿠멘타’를, 2013년에 ‘룩스라이크’를, 2014년에 ‘메이크업’을 발표한 후, 이를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기 위해 ‘나흐트 무지크’를 쓴 이사카고타로. 5개의 단편들은 깨알 같은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들은 연작 단편 정도로 보이죠. 하지만 마지막 작품 ‘나흐트무지크’에 이르르면 이 6개의 단편은 결국 하나의 장편 소설이 되고 맙니다. 모든 인물들이 아주 절묘하게 얽히고설켜 있는데 그들의 연결 고리를 확인하는 재미가 또 쏠쏠합니다. 처음부터 연작 소설을 쓰려고 기획을 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어쩜 그렇게 절묘하게 다들 연결이 되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들의 관계를 심지어 관계도로 그려보기도 했습니다.(이 관계도는 글 아래 첨부해 두었습니다.) 보통은 작품들과 작품들과의 소소한 연관성들이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이를 일컬어 ‘이사카 월드’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한 권의 책 속에서 인물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어 마치 이사카 월드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역시 이런 점은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작은 소설 속 수줍고 은밀한 설렘>
리뷰 시작에서도 밝혔지만 저는 결코 이사카 고타로의 연애 소설 속에서 달달함을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런 기대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습니다. 역시 그의 연애 소설에는 대놓고 남녀의 밀당, 격렬한(?) 애정 행각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미치도록 가슴 설레고 심쿵하는 로맨스 소설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펼치신 분들은 100% 실망하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소소한 설렘은 존재합니다.
작품 속 6개의 단편 중 가장 ‘연애 소설’ 같지 않았던 ‘메이크업’. 언뜻 보면 이 단편은 과거의 악연과 복수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때문에 홀로 ‘연애’가 테마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이 단편만 억지스럽게 끼어 넣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이 단편이 가장 흐뭇하게 설렜습니다. 유이와 다른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그녀의 남편의 정체(?)에 관한 힌트들이 등장합니다. 유이는 화장품 회사에 다닙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만 해도 전혀 꾸밀 줄도 몰랐고, 통통하기까지 해서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후에 살을 빼고 화장품 덕(작품 속에서 유이는 화장품을 그분이라고 표현합니다 ㅋㅋ;)에 예뻐지게 되죠. 그런 그녀에게 직장상사(라이트헤비의 등장인물 중 하나이기도 함)가 묻습니다. 유이의 남편은 그녀의 화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구요. 그에 유이는 자신의 남편은 자신이 화장을 했는지, 안했는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언뜻 보면 남편이 무심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바꿔 생각해보면 화장을 하건 하지 않건 그녀의 아내를 그녀 자체로 보고 사랑해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사실...... 작품의 결말에서의 어떤 부분과, 마지막 단편인 ‘나흐트무지크’에서...... (스포가 될 테니 여기서 밝히긴 곤란하겠지요.;;) 아무튼 그의 존재를 이해했을 때 저는 정말이지 설레고 흐뭇했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식의 소소한 설렘들이 담겨있습니다. 우연이 겹치며 인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렘, 얼굴도 모르지만 왠지 느낌 좋은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그런 설렘, 그때 그 사람이 지금 내 옆의 이 사람임에 감사하게 되는 그런 설렘. 이렇듯 작가는 매우 수줍고 풋풋하게, 심지어 독자가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사랑 이야기를 전합니다. 저는 그런 풋풋함과 은밀함이 마냥 흐뭇하고 즐거웠습니다. 작가는 이 책의 출간 인터뷰에서 ‘연애’를 ‘고기’에 비유했다고 합니다. 요리에 ‘고기’가 들어가면 그 요리는 무조건 맛있어진다고, ‘연애’는 바로 이런 ‘고기’와 같은 것이라고.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에, ‘고기’를 넣어 더더욱 맛있어진 요리. 바로 그런 업그레이드 된 요리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작가의 스펙트럼이 ‘베리베리 스트롱’해졌고, 저의 작가에 대한 애정도는 ‘스트롱거 댄 스트롱거’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인물관계도는 작품을 다 읽으신 후에 보셔야 스포를 피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