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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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빈에서 기차로 두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여성 직원이다. 이름은 크리스티네.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는 1926년 어느 날, 이모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게 된다. 이모는 미국에 살고 있어서 그동안 전혀 교류가 없는 사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럽으로 휴가를 왔고 자신의 언니, 즉 크리스티네의 엄마를 자신이 묵는 호텔로 초대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의 엄마는 너무나 몸이 쇠약해져서 긴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엄마 대신 크리스티네가 이모를 만나러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고 그 여행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너무나 간단해서 몇 줄로도 요약이 가능하다. 하지만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간단한 스토리라고 해서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나가는 작가 츠바이크의 맹렬한 힘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전쟁 후의 가난을 묘사하는 이런 문장들에서 무릎을 꿇었다.


" 1919년, 여자가 스물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끝없이 쏟아내는 법령 아래 숨었을 뿐이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전쟁공채와 지폐의 방공호 아래로 교활하게 기어 들어가 숨어 있던 가난은 뻔뻔스럽게 기어 나와 우묵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쟁의 시궁창에 남겨진 것들을 집어삼켰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던 겨우내 하늘에서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돈다발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눈은 온기 있는 손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돈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녹아버렸다. 다시 시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나무 굽을 댄 구두로 바꿔 신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 버렸다.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항상 너무 늦었다. 생활이 수학이 되고,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숫자들의 소용돌이가 되고,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시커멓고 탐욕스런 진공 속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어머니가 준 황금 머리핀이 머리에서 사라졌고, 어머니의 결혼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갔으며, 다마스크 식탁보가 식탁에서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던져 넣어도 소용없었다. 그 시커먼 지옥 같은 구멍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늦게까지 잠도 못 자고 앉아서 털스웨터를 짜거나 방을 전부 세놓아도, 부엌을 침실 삼아 다른 사람과 같이 사용해도 소용없었다. 오로지 잠을 자는 것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돈 안 드는 일이었다. 여자는 늦은 밤, 지옥 같은 현실은 잊은 채 지치고 수척해진 육체를, 설렘이 사라져 버린 돌덩이 같은 육체를 침대에 눕혔다."


크리스티네 가족은 전쟁 전에는 꽤나 멀쩡하게 살았다. 아버지와 오빠가 동물박제 사업을 했는데 꽤나 실력이 좋아서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고 "지금처럼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이는 전쟁 중에 박제를 주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전쟁으로 인해 집안이 쫄딱 망했고 크리스티네 가족은 산송장과 다름 없는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크리스티네가 미국에 살던 부자 이모를 만나고 나서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지점부터는 소설이 힘을 얻어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도대체 크리스티네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이 안 되어서 책을 중간에 끊을 수가 없다. 결말 부분은 스포라서 여기에 적을 수 없지만 맨 마지막 부분에서 크리스티네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과연 그 결심이 어떠한 것일지 두구두구.


이 책은 1차대전 이후의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요즘 들어 어쩐지 그 시절이 남일 같지가 않다. 신문을 보면 연일 여기저기서 전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끝이 나지 않았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싸우고 있으며 심지어 전쟁이 더 확대될 조짐을 보인단다. 인간이란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건인지, 폭력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 것인지 정말 심란한 요즘이다.


이 소설 다 읽고나서 <리틀 드러머 걸>시리즈를 봤는데 폭력의 고리를 끊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우울해졌다. 흑흑. <리틀 드러머 걸>은 1970년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테러 작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 보고나서 이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진짜 '인간이 뭔가' 싶어진다.(그래도 <리틀 드러머 걸> 작품 자체는 강추다)


그래도 크리스티네가 부자 이모와 만나고나서 변신하는 장면에서는 한 인간의 특성이라는 건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제발,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모두가 자멸하는 길로 걸어가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문장으로 리뷰를 마무리한다.


"사람은 꼬리가 잘려 나가도 다시 자라는 도마뱀이 아니야. 자네가 말했듯이 내가 운이 좋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열여덟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황금 같은 6년이 살아 있는 육체에서 잘려 나가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불구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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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를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이 몇년 전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제목으로도 나왔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번역자도 같다.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나오면서 너무나 직관적인 제목을 버리고 <우체국 아가씨>라는 제목을 택했다. 게다가 표지도 아련하게 바뀌었다. 표지 새로 입힌 건 정말 다행이다. 예전 표지였으면 나는 절대로 이 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 표지는 흡사 까치에서 나온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떠올리게 한다. 악몽 같은 표지다. 존.세.거는 종이책만 리커버 하지 말고 전자책도 리커버 좀 해주길 바란다ㅠㅠ


<우체국 아가씨> 읽기 전에 <광기와 우연의 역사>도 읽었는데 이것도 국내 출판본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들이 퍼블릭 도메인이어서 여기저기서 번역되어 나온 것 같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제일 최근에 나온 이화북스 버전으로 읽었다. '최신 완역판'이라는 문구에 끌리기도 했고 전자책으로 나온 게 이것밖에 없었다.


또 무슨 책들이 있나 찾아보다가 <마리 앙투아네트>도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들은 아직 전자책이 없는데 츠바이크 선집을 내고 있는 이화북스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꼭 전자책으로 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츠바이크의 책을 좀더 찾다가 예쁜 표지로 유명한 녹색광선에서도 책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녹색광선은 전자책을 내지 않으니까 나 같은 전자책 사용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이 책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는데 똑같은 제목의 책이 하나 보인다. 이것도 같은 내용인가보다. 표지만 보면 녹색광선이 가장 최신에 나온 책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창출판사 버전이 더 최신이다. 이 출판사에서는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를 내고 있다. 게다가 전자책도 있다. 전자책 이용자인 나는 만약 <감정의 혼란>이 읽고 싶다면 세창출판사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쯤 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츠바이크의 책들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출판이 된 걸까. 이걸 어느 정도 알아둬야 겹치기 구매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몇 개 더 찾아봤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도 세창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낯선 여인의 편지>와 <모르는 여인의 편지>로 제목이 살짝 다르지만 같은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검색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나온다. 너무 많아서 맨 위에 있는 책들만 가져왔다.


소설집도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소장품>의 수록 작품은 '아찔한 비밀, 불안,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 모르는 여인의 편지, 보이지 않는 소장품, 어느 여인의 24시간'이다. 이 안에 '모르는 여인의 편지'가 또 수록되어 있다. 맨 마지막에 실린 '어느 여인의 24시간'도 낯이 익은 제목이다. 빛소굴 출판사에서 낸 츠바이크 소설집 '과거로의 여행'에 실린 두 번째 작품 제목이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인데 아마도 두 개가 같은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천재, 광기, 열정>이라는 책이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를 쓰다'라는 제목의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가 있는데 이 책들의 원전이 바로 <천재, 광기, 열정 1,2>라고 소개해준 페이퍼를 발견했다.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헷갈릴 뻔 했다. <천재, 광기, 열정 1,2>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클라이스트,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 총 8명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쓰다' 시리즈에서는 클라이스트와 디킨스 내용이 빠진 듯 싶다.


이처럼 수도 없이 변주되어 나온 츠바이크의 책들인데 대산세계문학에서 나온 <초조한 마음>은 국내 출판본이 이거 하나뿐이고 전자책이 없다. 대산세계문학에서 전자책을 만들 계획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번역해서 전자책이랑 같이 출간할 계획이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전자책으로 읽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ㅠㅠ그야말로 초조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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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1-2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는 요 몇년 사이 처음 알게 되어서 빛소굴의 우체국 아가씨, 녹색광선의 감정의 혼란, 빛소굴의 과거로의 여행,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의 초조한 마음을 총 네권을 샀는데 이렇게 다양한 판본이 있는 줄 몰랐어요. 저는 그냥 표지가 예쁘기로 유명한 녹색광선 책을 사모으다가 빛소굴 책도 예뻐서 같이 사모으다가 (초조한 마음은 번역본이 이거 하나 뿐이라 그냥 샀고요) 아무튼 사모으기만 하고 아직 읽지는 않은 저로서는 같은 책을 여러 권 사지 않은게 운이 좋았네요. 😅

Laika 2024-01-23 18:02   좋아요 1 | URL
저도 이렇게 다양한 판본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츠바이크 책들이 꽤나 잘 팔렸던 걸까요ㅎㅎ...아무튼 겹치기 구매를 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이것저것 전자책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 중복되는 내용은 없네요🤣
 

서재 지수를 높이고 싶다. 북플의 독보적 활동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아침 걷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독보적 활동을 시작했다. 평일에 5000보 이상을 걷고(이건 문제 없다)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추가하면 된다. 문제는 읽고 있는 책을 알라딘에서 구매한 책 안에서만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알라딘에서 전자책을 구매하기도 하지만 밀리의 서재, 크레마클럽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시립 전자 도서관 두 곳도 이용 중이다. 구매한 책만 읽는 것이 아닌데 구매한 책만 '독보적'에 등록하라고 하니 난감하다. 아, 물론 구매하지 않은 책도 등록이 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럴 경우 스탬프를 주지 않는다. 스탬프 받으려고 하는 건데!!!


방법은 딱 하나, 서재 지수를 5000점 이상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면 구매한 책이 아닌 책을 읽은 경우에도 스탬프를 준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서재 지수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북플 독보적 때문에 서재지수가 너무 신경 쓰인다. 어떻게 하면 5000점까지 단숨에 도달할 수 있을까.


서재지수를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설명해주는 글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실험을 해봤다. 며칠 전 나의 서재지수는 3218점이었다. 그 후에 리뷰 한 개, 백자평 두 개를 작성했고 오늘 오전에 확인한 나의 서재지수는 3347점. 리뷰 하나랑 백자평 두 개로 129점을 끌어올렸다. 서재지수가 내가 작성한 글 개수로만 판정이 되는 것인지 조회수 및 좋아요 수도 같이 집계가 되는 건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서재 지수를 5000점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리뷰든 페이퍼든 계속해서 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서재 지수를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서재 지수를 어떻게 올릴지 고민하는 글을 쓴다.


독보적 활동은 해보니까 재미있다. 어차피 걸을 건데 독보적 기록도 하고 스탬프도 모아서 적립금도 타면 좋겠다. 게다가 월마다 추첨해서 추가 적립금도 준다고 하니 완전 땡큐다. 문제는 이것 때문에 책을 더 사게 생겼다는 거다. 서재지수가 5000점이 되기 전까지는 구매한 책 중에서만 읽어야 하므로 '구매'에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된다. 물론, 사놓고 안 읽은 책이 굉장히 많다. 사놓은 책 중에서 안 읽은 책을 골라서 '독보적'에 등록하고 그걸 읽으면 된다. 그게 상식적이다. 그런데 나는 '구매한 책만 읽을 경우에만 스탬프를 준다고?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다른 구독 서비스에서 읽고 있는 책을 구매해야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독보적'에서 스탬프 10개를 모으면 적립금 500원으로 바꿔주는데 그걸 받으려고 책을 사는 사람이 있다니. 주객전도도 이 정도면 심각하다.


어쨌든 어제 산 책 이야기를 해보겠다. 빛소굴 출판사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다. 검색해보니까 종이책으로는 9권이 나와있는데 전자책은 6권만 존재한다. 그 6권을 한꺼번에 결제했다.

이번 충동구매는 전적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탓이다. 얼마 전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다 읽고 나서 다음 책으로는 <어제의 세계>를 읽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작가가 죽기 전에 남긴 회고록의 성격이 짙으니 가장 마지막으로 읽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달은 나 혼자 정한 슈테판 츠바이크 집중 읽기 기간이다.) 그럼 뭘 읽을까 하다가 이 작가가 소설도 잘 쓴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기에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있는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우체국 아가씨>를 읽기 시작했다.


재밌다, 역시나 이 작가 글을 잘 쓰는군, 하면서 읽다가 이 문장에서 심장을 후드려 맞았다.


「1919년, 여자가 스물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끝없이 쏟아내는 법령 아래 숨었을 뿐이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전쟁공채와 지폐의 방공호 아래로 교활하게 기어 들어가 숨어 있던 가난은 뻔뻔스럽게 기어 나와 우묵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쟁의 시궁창에 남겨진 것들을 집어삼켰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던 겨우내 하늘에서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돈다발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눈은 온기 있는 손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돈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녹아버렸다. 다시 시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나무 굽을 댄 구두로 바꿔 신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 버렸다.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항상 너무 늦었다. 생활이 수학이 되고,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숫자들의 소용돌이가 되고,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시커멓고 탐욕스런 진공 속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바람이 되었다. 어머니가 준 황금 머리핀이 머리에서 사라졌고, 어머니의 결혼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갔으며, 다마스크 식탁보가 식탁에서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던져 넣어도 소용없었다. 그 시커먼 지옥 같은 구멍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늦게까지 잠도 못 자고 앉아서 털스웨터를 짜거나 방을 전부 세놓아도, 부엌을 침실 삼아 다른 사람과 같이 사용해도 소용없었다. 오로지 잠을 자는 것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돈 안 드는 일이었다. 여자는 늦은 밤, 지옥 같은 현실은 잊은 채 지치고 수척해진 육체를, 설렘이 사라져 버린 돌덩이 같은 육체를 침대에 눕혔다.」

갑자기 이 책을 사야겠어, 라는 하늘의 계시 같은 부름을 받고 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했다. 종이책 정가의 40%로 할인한 가격에 전자책을 팔고 있었다. 40%면 거의 반값이다. 이 정도면 할인폭이 꽤 높은 거라서 바로 구매 버튼을 누르려다가 이게 페이지터너스라는 시리즈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시리즈를 통으로 검색해봤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이 두 권이 있고 그걸 제외하고는 전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작가들이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평점이 높고 무엇보다 출판사가 페이지터너스라고 자신있게 명명해서 그 책들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것에 마음이 혹했다. 그 중 하나인 <우체국 아가씨>가 정말로 재미있으니 신뢰도 가고 말이다. 다만 <우체국 아가씨> 말고는 전자책 할인폭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이것만 종이책 대비 40% 할인이고 나머지 책들은 대부분 종이책 대비 30% 정도 할인된 가격이었다. 하지만 전자책 10% 할인쿠폰 적용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가 지금 보유한 전자책 캐시 안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6권을 한꺼번에 질러버렸다......

원래는 한꺼번에 이렇게 여러 권의 책을 사는 일은 없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전자책 적립금이 천 원, 이천 원 쌓일 때마다 하나씩 구매하는 것이 나의 구매 패턴이다. 세 권짜리인 <나는 고백한다 1-3>을 지금 그런 식으로 사고 있다. 몇 주 전에 1권을 샀고 또 얼마 전에 2권을 샀고 아직 3권은 구입 전이다. 전자책 적립금 모이면 그때 사려고 맨 마지막 권을 남겨두고 있을 정도로 나는 인내심이 강하다. 적립금 없는 곳에 구매도 없다는 신조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빛소굴 출판사의 시리즈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장바구니에 홀로 남아있는 <나는 고백한다3>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얼른 3권을 구입해 나의 책장을 완성해야 하니 전자책 적립금이 팍팍 쌓였으면 좋겠다.)


일단 지금 <우체국 아가씨> 읽고 있는데 이거 다 읽고 나면 츠바이크의 또 다른 책인 <과거로의 여행> 읽을 거고 그 다음엔 <쇼샤> 읽을 거다. <쇼샤>는 크레마클럽에 올라와있는 책이다. 예쁜 보라색 표지와 쇼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에 꽂혀서 진작 내 서재에 담아놓은 책인데 크레마클럽에서 읽기도 전에 알라딘에서 구매를 해버렸다


혹시나 밀리의 서재에 이 책들이 전부 들어와있는지 궁금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한 번 검색을 해봤다. 아뿔사, 빛소굴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가 밀리의 서재에 전부 올라와 있다. 하하하, 하지만 사서 읽는 게 더 재미있으니까 괜찮아. <우체국 아가씨>도 밀리에서 읽다가 산 거니까, 괜찮아 괜찮아.


전자책이 구독 서비스에 올라가면 책이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 같은)어떤 독자들은 일단 빌려보고 재미있으면 구입해서 보관하기도 한다. 그 작가의 그 문장들이 내 소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전자책을 결제한다. 물론 전자책은 종이책에 비해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심히 떨어지기는 하지만...그래도 일단 돈을 냈으니까 내 거라고 우겨본다.(전자책 이용자들은 인터넷 서점이 망하면 자신이 산 책들이 전부 공중분해될 거라는 근원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망하지마, 알라딘. 책을 많이 팔란 말이야. 그래야 내 전자책이 영원히 보존될 수 있어ㅠㅠ)

그나저나 알라딘에는 <정신과 의사> 전자책이 아예 등록되어 있지 않은데 밀리의 서재에 이 책의 전자책이 버젓이 올라와있다. 그것도 '독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뭐야 도대체 뭔데. 알라딘과 교보문고와 예스24를 다 뒤져도 이 책의 전자책은 없다. 아니, 밀리의 서재에 올릴 정도면 전자책 파일이 있다는 건데 그걸 왜 안 팔고 여기에만 올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고 생각하는 순간 밀리의서재 소개글에 있는 전자책 출간일을 봤다. 2024년 1월 31일. 허허..지금이 1월 15일인데 이 책은 시간을 거슬러 왔구나. 그러니까 정식 출간 되기도 전의 전자책 파일을 밀리에서 독점 계약에서 올린 거다. 그렇다면 이 책은 밀리에서 봐줘야겠다.


서재 지수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 이 페이퍼는 빛소굴 출판사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지름신 영접을 거쳐 밀리의 서재로 끝나게 되었다. 이 글의 정체성이 뭔지 나는 모르겠다. 글을 시작하기는 쉬운데 글을 끝맺는 것은 항상 어렵다. 서재 소개글에 일부러 '미완성의 기록들'이라고 적어놨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미완성이라는 의미로, 더 나아가서는 미완성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은 것이다. 어떤 글을 완성하려고 하면 시작하기가 힘든데, 미완성으로 끝내겠다고 다짐하면 글 쓰기가 쉽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가 뚝 끝내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나의 모든 기록은 미완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일단 서재지수 5000점을 향해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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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책 파는 법 - 온라인 서점에서 뭐든 다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 땅콩문고 시리즈
조선영 지음 / 유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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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 MD라는,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알려주는 책. 화면 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어서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 출판사의 시리즈를 전부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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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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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 에피소드 모두 재미있는데 황금의 땅 엘도라도, 레닌, 미국 유럽 간 해저 케이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 번역도 매끄러워서 읽는 내내 막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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