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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7월
평점 :
블로그를 운영한 지 몇 년 되었다. 블로그를 운영하기 전에도 일기 쓰는 걸 좋아해서 여행지에서 항상 수첩을 사서 일기를 썼다. 그러니 기록자로 살아온 세월이 수 년, 길게 잡으면 십 년도 넘었을 것인데 나는 아직까지도 글을 너무 못 쓴다.
인터넷에서 ‘N의 일기, S의 일기’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N의 일기는 ‘그런 일도 있는 거다. 그런 날도 있는 거다. 그런 관계도 있는 거다(아이유 일기)’ 이런 식이다. 그에 비해 S의 일기는 이런 식이다. ‘오늘 뭐뭐를 했다. 오늘 뭐뭐를 먹었다. 그리고 누구와 만나서 어디 카페에 갔다.’ 누군가는 S의 일기를 보고 ‘코로나 확진자 동선 아니냐’고 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일기를 쓰면서도 내 글은 코로나 확진자 동선을 벗어난 적이 없다. 모든 건 시간순으로 써야 하고(시간순을 벗어나면 죽는 병에 걸렸다) 어디에 가서 무슨 메뉴를 먹었고 얼마였는지 정확한 정보를 남기는 것에 굉장히 많은 공을 들인다. 그래도 나는 이런 내 글쓰기 스타일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아 그렇지 않았다. 좀더 잘 쓸 수 있었다는 걸,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걸,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여행작가 김남희의 책은 이 책만 읽었다. 여행기를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아니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왜 그동안 이 작가를 몰랐을까. 아무튼 재작년 8월에 잠시 한국에 머물 때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었고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사족인데, 나는 초록색 표지의 책을 좋아한다. 오로지 초록초록 표지에 끌려 읽은 책이 서영채의 <왜 읽는가>, 그리고 이 책이었다. 둘 다 완전 너무 좋았다. 역시 초록은 배신하지 않지.)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음료를 주문해놓고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너무 좋은데 도서관 책에 밑줄을 칠 수 없으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집에 와서 노션으로 옮겨적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최근 들어 노션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 책의 인상깊은 구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게 되었다. 아니 잠깐. 이 책이 이렇게 좋았었나? 2년이 지나 다시 읽으니 이 책의 문장들이 나에게 더욱 와닿았다. 책값도 비싸지 않고 전자책도 있고 에라 모르겠다, 이 책을 사자! 이렇게 되어버려서 오늘 전자책 적립금을 사용해서 이 책을 구입했다.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는데, 2년 전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전자책을 읽은 세월이 너무 길어서 이제 종이책보다 전자책이 더 와닿는 걸까? 아니면 빌려 읽은 책보다 사서 읽은 책이 더 좋은 법인 걸까?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을 때보다 문장 하나하나가 더 크게 와닿았다. 비루한 블로그 글을 쓰고 나서 이 책을 읽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뭐 먹었다. 뭐 했다’의 향연인 내 글을 보다가 ‘두 번째로 소설을 완독한 날은 소슬한 바람이 창 너머 벚나무의 검푸른 몸피를 쓸고 지나가는 아침이었다.’ 이런 문장을 보니까 내가 아무리 여행을 좋아해도 여행작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를 단박에 깨달았다.
이 책은 여행지와 책을 결합한 산문집이다. 나는 이런 류의 책으로는 ‘여행자의 독서 1,2’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행복했다. 여행과 책을 결합한 또 다른 멋진 책이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문장도 좋다니, 나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정서는 복합적이다.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에 대해서 쓰면서도 또 외롭고 쓸쓸한 마음에 대해서도 쓴다는 게 좋았다. 사실 나도 혼자 있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도 인간인지라 혼자 있는 매순간이 짜릿해서 미칠 것 같은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가라앉을 때도 있고 고독을 느낄 때도 있다. 아무리 사람을 좋아한대도 사람 속에서 쓸쓸함을 느낄 때가 있듯이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가라앉을 때가 분명 있다. 그런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렇다고 과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너무 좋았다.
[누구도 나를 모르는 그곳에서 나는 자유로우면서도 외로운 이방인이다.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문득 혼자임이 새삼스러워질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기에는 애매한 오후의 시간에, 빗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에, 오가는 골목에서 눈길을 끄는 카페를 발견했을 때, 간이역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 습관처럼 책을 편다.]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문득 혼자임이 새삼스러워질 때”라는 구절이 너무 좋아서 오래도록 응시했다.
나는 30대 이후로는 계속 한국과 한국 바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는데 그 생활이 좋으면서도 문득 저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머물고 있는 지역이 너무 좋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좋아보여서 나도 여기 오래오래 눌러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랑 그 사람들의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사람들은 여기에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이방인일 뿐이다. 내가 여기에 산다고 해서 결코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들의 삶처럼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밀려오는 거다.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들처럼 살려면 한국에서 가족을 꾸리고, 가족들과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친구들을 자주 만나고 그래야 하는데 나는 그게 되지를 않는다. 결혼하고 나서는 자식도 낳지 않고 남편이랑 둘이 자유롭게 살았다. 지금도 이런 삶이 너무 좋고 절대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문득 한국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여서 사는 삶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을 볼 때면 부럽다고 생각한다. 다음 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지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태어난 곳에서 쭉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이번 생에는 역마살을 이기지 못해 너무 떠돌아서 그런지 한 곳에서 붙박이처럼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 말로도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문득 혼자임이 새삼스러워질 때”라는 구절에 담겨 나에게 떠밀려왔다. 이게 책 맨 앞의 프롤로그인데 여기서부터 좋으면 어떡하란 말이냐 이러면서 나는 밤새워 책을 읽었다.
이런 문장들이 너무 좋다.
[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으로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삶의 예외성과 우연성 속으로 뛰어들어 삶 자체를 바꾸어내려는 의지가 아닐까.]
이런 냉철함도 너무 좋구요.
[여행으로 밥을 벌며 살아가는 지금, 나는 여행자와 관광객에 대한 분별심을 경계하게 되었다. 내 여행이나 당신의 관광이나 큰 차이가 없고, 내가 가고 당신도 가는 그곳은 더이상 오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과 경제 수준의 향상은 어디에 살든지 모두의 삶을 비슷하게 만들었고, 여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모험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오지도 대부분 사라졌다. 여행은 이제 클릭 몇 번으로 간단히 살 수 있는 상품이 된 지 오래다. 내 친구의 말처럼 인류는 탐험을 여행으로 만들어왔고, 여행은 점점 관광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나에게 의미 있는 질문은 여행 혹은 관광이라는 행위에 따르는 책임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든 우리는 모두 지나가는 이방인일 뿐이고, 지나가는 이의 미덕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기에.]
게다가 이런 문장도 너무 좋다.
[청춘의 시절, 나에게 조르바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만 읽혔다. 40대 후반이 되어 다시 읽은 조르바는 내게 자유 그 너머의 것을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그 자유를 가져온 열정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고.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하기는 쉽지만 그 감정 안에 갇혀 있지 않기는 어렵다. 조르바를 동경해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던 20대의 나는 지나갔다. 빛의 세례를 누리며 살아가되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 것. 열정을 잃지 않되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것. 내 남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그 정도다.]
진정한 자유는 그 자유를 가져온 열정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은 것이라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나는 한국이 아닌 곳에서 강아지들의 웡웡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도대체 오늘은 20대1 패싸움이라도 하는 건지 강아지 한 마리의 낑낑 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애처롭다. 이럴 때 이 책과 함께라서 너무 행복하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면서 나도 앞으로 이런 여행기를 써야겠다고 새삼스레 다짐도 해보고, 스스로 떠도는 삶을 택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몰래몰래 엿보며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기도 한다.(그런데 항상 떠돌다보니 숙소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꽃을 가져다 놓거나 엽서를 붙이기도 한다는 부분에서는 역시 사람은 다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숙소에 돈 들이는 걸 너무 아까워해서 정말 거지같이 다닐 때도 많았던지라....흠흠)
아무튼 이 책은 여행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주의할 점은 단 하나. 가고 싶은 여행지와 읽고 싶은 책이 지나치게 늘어난다는 것. 나는 지금 '리스본 가고 싶어ㅠㅠ' 이러면서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