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랬다.
알라딘에서 서울코믹스 만화책을 재정가 할인한다는 알림이 떴다. 만화책은 어렸을 때 엄청 좋아했는데 커서는 왠지 잘 안 읽게 되어서 이런 알림도 겉에서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클릭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고 갑자기 구매욕구가 샘솟고 말았다. 일반 전자책은 할인폭이 10% 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만화책(이북) 세트 30% 할인 해준다고 하니까 엄청 저렴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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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에 담아서 결제 직전까지 갔던 만화책은, 어렸을 때 엄청나게 좋아했던 추리만화인 <소년탐정 김전일>. 알고 보니까 시즌2도 나왔고, 37세 김전일 시리즈도 나오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새 김전일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서 또다시 사건사고에 휘말리고 있었던 것이다ㅋㅋㅋㅋ. 갑자기 옛 추억이 떠오르면서 '이건 사야해' 모드가 되었다. 시즌1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오리지널 시리즈와 시즌2, 시즌2 리턴즈, 37세 김전일까지 전부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런데 잠깐, 이거 지금 읽어도 재미있을까? 이걸 본지 거의 이십 몇 년이 지났기 때문에 만화책의 자세한 내용은 다 잊어버렸는데도 주인공 김전일이 너무 변태 같아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렸고, 다른 만화책들을 들춰봐도 죄다 변태 같은 주인공들 투성이여서 그러려니 하면서 봤다. 추리하는 내용은 재미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2024년의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할인 행사 때 사야해'와 '지금 보면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일단 대여 먼저 해서 보기로 했다. 초반 몇 권만 보면 대충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1권은 무료체험판으로 보고 2, 3권은 리디에서 빌려봤다.(리디에서는 전권 대여 500원인데 왜 알라딘에서는 1~3권 대여 가격이 1000원인건지 모르겠다;)
초반 몇 권 읽으면서 느꼈다. 이건 빌려보는 게 낫겠다. 2024년의 내가 읽기에는 조금, 사실은 아주 많이 무리가 있다. 김전일은 왜 맨날 여자 치마 속 팬티를 보고 다니는 것인가.(우연히 볼 때도 있지만, 누워있는 김전일 위에 다가가서 일부러 자신의 치마 속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영화 촬영 아르바이트 에피소드에서는 남성 스태프들이 여성 출연진의 목욕탕 몰카를 찍고 다같이 보는 장면도 있다.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이런 걸 보면서 재미있으니까 장땡이라고 여겼던 그 시절의 나에게 화가 난다. 내가 이런 야만의 시절을 거쳐 왔다는 걸 새삼 느꼈다.
<김전일> 4권부터는 알라딘에서 대여해 보고 있다. 주말 만화책 대여 쿠폰이 있어서 저렴하게 빌렸다.(5000원 대여에 1500원 할인) 그런데 갈수록 가관이다. 사촌오빠라는 인간이 교복 입은 여주인공 엉덩이를 만지는 장면에서 말잇못. 그래도 빌려놓은 게 있어서 계속 읽고 있기는 한데 과연 이 만화를 끝까지 정주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걸 보면서 자란 내 감수성 내 자아 괜찮은 걸까, 갑자기 걱정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른 다른 좋은 만화책들로 나의 감수성을 정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천막의 자두가르>를 구매했다. 3권까지 나와있고 아직 미완결이며 재정가 할인 대상이어서 이북으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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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파티마(원래 이름은 시타라)다. 이란 동부 지방인 '투스'에서 어느 학자 집안의 노예로 생활하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몽골군 포로로 잡혀가게 된 파티마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복수할 방법을 찾는다. 한낱 외국인 포로에 불과한 파티마가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싶은데 만화를 보면 또 수긍하게 된다. 그 당시 몽골 내부에는 문화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사람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고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실 몽골 제국 관련 이야기라고 하면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이 어떻게 제국을 지배했는지에 대해 주목하기가 쉽다. 그런데 이 만화는 파티마, 그리고 파티마와 얽히는 몽골 제국 황후들이 스토리의 중심이다. 파티마는 몽골군이 페르시아에서 약탈해온 책들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어떤 황후의 시녀로 가게 되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권력 있는 여성들의 주위에 머물게 된다. 스토리도 너무 재미있고, 그 당시 몽골 왕과 황후의 복식이나 생활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나저나 궁금증 하나. 칭기즈 칸 아들의 황후 중 한 명이 '나이만 부족' 출신이라고 나오는데 이걸 보자마자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가 떠올랐다. 여기에도 나이만 부족이 나온다.(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나이만-아나의 전설...ㅠㅠ) 이 소설에 나오는 나이만 족이 <천막의 자두가르>에 나오는 그 나이만 족인지 궁금해졌다.
<천만의 자두가르> 다 읽고 나서, <히스토리에> 이북 세트를 사들였다. 역시나 재정가 할인으로 샀다. 이 만화책은 11권까지 나왔고 미완결이다. 작가가 워낙 작업 속도가 느리고 연세도 꽤 있으셔서 미완결로 끝날까봐 걱정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평이 너무 좋아서 일단 사봤다. 알렉산더 대왕의 궁정 서기관이 주인공인 만화다. 배경만 들어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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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샀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갑자기 역사 만화책에 꽂혀서 이것저것 찾아서 장바구니에 넣어뒀다. 어렸을 때는 추리 만화를 좋아했는데, 요즘엔 또 역사 만화가 좋다. 역사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데 가끔씩 그 시절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질 않아서 애를 먹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게 만화책인 것 같다. <천막의 자두가르>처럼 몽골, 중앙아시아 배경인 만화책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몇 개 더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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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배경이라고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환상을 가지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중앙아시아다. 유튜브에 올라온 실크로드 다큐도 찾아보고 그랬는데, 만화책도 있다니...! 이건 무조건 사야해. 평이 굉장히 좋아서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다. <천수의 나라>는 티베트 배경 만화다. 리뷰를 찾아봤더니 생각보다 잔잔한 내용의 만화라고 한다. <신부 이야기>만큼 큰 기대는 걸고 있지는 않지만 티베트 복식을 보는 재미는 있을 것 같아서 <천수의 나라>도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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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배경 말고도 또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해서 찾아보다가 발견한 <오르페우스의 창>. 어렸을 때 회색 표지에 <올훼스의 창>이라고 나온 판본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목이 <오르페우스의 창>으로 바뀌었다. 그 유명한 <베르사유의 장미>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 작품인데 이상하게 <올훼스의 창>은 <베르사유...>만큼은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베르사유>는 애니메이션도 방영했어서 그 당시에 모르는 어린이가 없었다. 나는 만화영화 주제가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바람 한 점 없어도 향기로운 꽃~~가시 돋혀 피어나도 아름다운 꽃~~~' 그에 비에 <올훼스의 창>은 한참 후에야 '이런 만화도 있었어?'라면서 알게되었다.
<오르페우스의 창>은 러시아 혁명을 다룬 만화책이다. 이 만화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러시아'라는 지명을 죄다 '핀란드'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러시아=공산당=빨갱이' 연상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럴 거면 아예 출판을 하지를 말든가, 러시아를 핀란드로 다 바꾸는 그 정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은 너무너무 좋아했어서 어렸을 때 두툼한 만화책으로 샀었고 지금은 전자책으로 전권 보유 중이다. <오르페우스의 창>도 전자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조만간 구입해서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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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책은 이거다. 나만의 올타임 베스트 <마스터 키튼>.
영국 특수부대 SAS 출신의 고고학자인 '키튼'은 고고학 강의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 영국 보험사의 조사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이 사람의 특기는 극한환경에서 생존하기! 워낙 실력이 좋아서 어려운 조사 임무에 주로 투입되는데, 거기서 사건의 진범을 밝히면서도(그래야 보험금을 줄지 말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알아서 재주껏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 이야기도 조금 나오고, 고고학+추리+생존+잡지식이 짬뽕된 완벽한 내 취향 만화다. 타클라마칸 사막 에피소드는 정말 여러 번 읽었다.(언젠가는 사막에 떨어져서 살아나와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는 전자책이 있던데 제발 <마스터 키튼>도 전자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요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 프로젝트를 나 혼자 진행 중인데, 정신 안 차리면 자꾸만 만화책을 보게 된다(ㅠㅠ) 만화책 세트 할인이 뜨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샛길로 빠지진 않았을텐데. 이게 전부 할인 때문이다. 최근에 구매한 <히스토리에>만 다 보고 나면 진짜로 만화책 안 보고 <잃.시.찾> 읽어야지.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정말로 찾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