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얼마 전 나의 독서 습관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인스피아 뉴스레터에서 '느림보 독서법'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다. 이 뉴스레터는 느리게 읽는 법과 관련된 책 여러 권을 소개해줬는데 그 중 에밀 파게의 <독서술>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이 유유 출판사에서 <단단한 독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나서 바로 <단단한 독서>를 구입해서 읽었다. 이 책은 이렇게 주장한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천천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이 말은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조언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백미터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올한해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정작 기억나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원인 모를 공허함에 시달리며 이렇게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맞는 건가 의심하고 있을 때 '천천히 읽으라'는 조언을 접하게 되었고 나는 곧바로 나의 독서 습관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그 당시 읽었던 소설이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었다는 거다. 이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1,2부도 재밌었지만 3,4부는 기절할 정도로 재미있어서 새벽 3시까지 책 읽다가 침대에 쓰러져서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느리게 읽기는 개뿔. 등 뒤에서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 이 책은 정말 대박이라고 생각하며 조만간 1권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었던 책은 바로 이것.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권인 <로재나>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 긴 시리즈물을 시작하고 싶어서 <반지의 제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놓고 고심하다가 마르틴 베크를 선택했다. 올초엔가 전자책 적립금 모일 때마다 한 권 한 권 사들여서 이미 시리즈를 전부 구입해둔 상태였는데 안 읽고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 이 책은 '느리게 읽기'에 특화된 책이로구나! 북유럽 특유의 느린 일처리와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합쳐져 소설 속의 모든 일이 그야말로 느릿느릿 진행된다. 국제전화 연결하려면 몇십 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그나마 국제전화가 가능했으니 다행) 다른 나라와 서류라도 주고받을라 치면 며칠에서 몇 주까지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분실이라도 안 되면 다행.)

일처리 속도뿐 아니라 소설 자체의 템포도 느리게 흘러간다. 셜록 홈즈 같은 천재 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주인공이 추리 쇼를 펼치지도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경찰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직업군에 대한 탐구일지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없이 그저 잠복하고 잠복하고 또 잠복하는 순간들을 읽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표적을 정확히 맞혀서 목표물을 획득하는 명사수가 아니다. 그들은 표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들이 어느 쪽을 향해 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살인 사건이라는 바다에서 살인범이라는 돌멩이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그물망을 던졌다가 올려서 뭐가 잡혔는지 살펴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또 그물망을 던지는 어부와 같다. 저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범인 잡겠나, 싶은 생각이 들법도 한데 막상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마르틴 베크에게 조금씩 끌린다. 이 인물에게 왜 끌리는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나는 이 인물에게서 묘한 희망 같은 걸 발견했던 것 같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번뜩이는 재능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쉬지 않고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런 종류의 희망 말이다.

모든 것을 빨리 빨리 해결하고, 안 되는 일에는 후딱 손 떼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온 나에게 이러한 인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소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굴러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쓰여진 것만 같았다. 정답은 느리게 가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살다 보면 꿈도 희망도 없는 시기가 도래하지만 그럴 때에도 살아가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핵심은 꿈이나 희망, 속도 같은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태도'에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리게 읽기'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빨리 빨리 읽으려고만 하다가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뻔했기에 느리게 읽더라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읽는 독서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여러 모로 슬로우 리딩과 찰떡궁합인 책이 아닌가 싶다.

+) 그나저나 <로재나> 읽다가 나폴리 4부작이 생각나서 초반에 좀 가슴이 아팠다. 나폴리에선 경찰이 범인을 잡는 건지 범인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을 잡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로재나>의 배경인 스웨덴에서는 경찰이 몇 달간 공을 들여서 진짜 범인을 잡는다. 똑같은 1960년대인데 나폴리와 스톡홀름은 완전 딴나라 세상이다. 이래서 다들 북유럽 북유럽 하는 건가 싶다. 그런데도 마르틴 베크는 계속해서 우울해하는 걸 보니 복지와 치안만이 해결책이 아닌 건가 싶기도 하고. 우연하게도 비슷한 시기를 다룬 완전히 다른 두 소설을 읽고 나니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에 유튜브에서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자주 찾아듣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마이클 잭슨은 워낙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유명한 노래들은 대충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각 잡고 집중하고 들어보니까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제일 많이 찾아 들은 노래는 '빌리 진'이랑 '데인저러스'인데 자꾸 머릿속에 '데인저러스!!' 가사 맴돌아서 미치겠다. 진짜 제대로 후크송. 


저녁 산책할 때는 윌라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책 뭐 없나 살펴보다가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 있는 거 보고 바로 듣기 시작했다. 역시 츠바이크. 문장들이 기가 막히다. 산책하면서 오디오북으로 듣는데도 내가 막 긴장돼서 미칠 것 같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돈 펑펑 쓰면서 프랑스 국민들에게 미움 받는 장면에서 '제발 사치 멈춰!'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들이 단두대로 갈 운명이라는 걸 다 아는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이 책을 들으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때문에 프랑스 왕실이 망했다'는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국 역사를 보면 항상 나라가 망한 게 여자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경우가 많았다.(ex. 달기, 양귀비...) 오죽하면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운 미인)'이라는 단어까지 생겼을까.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런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눈을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치는 당연히 했겠지만 마리 앙투아네트 한 명 때문에 왕실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친 목걸이 사건을 보면 원흉은 루이 15세다. 그가 자신의 첩인 뒤바리 부인에게 주려고 엄청나게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문해놓고 갑자기 죽었다. 보석상은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줄 사람을 찾다가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고객을 찾은 거다.(하지만 실은 잔느라는 여인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목걸이를 구입하고 처분해버림.) 이것만 봐도 루이 15세의 사치가 장난이 아니었을 거라는 감이 오는데 왜 항상 사치의 아이콘은 마리 앙투아네트여야만 했을까. 나라가 망하면 망하기 직전에 나라를 쥐락펴락 했던 여인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아마 루이 15세 때 혁명이 일어났다면 루이15세의 정부인 뒤바리 부인이 온갖 욕을 다 먹었을 게 뻔하다. 이런 게 정말 답답한 부분.

어쨌든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정말 재미있었다. 이 책 다 끝내자마자 바로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를 펼쳤다.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을줄 알고 전자책으로 구비해놨었다, 후훗!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내 기억 속에서 내가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른 첫 번째 책이다. 서점에서 두꺼운 세 권짜리 만화책을 사들고 나온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프랑스 혁명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 만화책을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그 당시에는 1권이 제일 재미있었고 2권은 쏘쏘, 마지막 3권은 거의 펼쳐보지도 않았다. 삼부회의, 혁명 이런 단어들이 뭔지 이해하지도 못할 때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옷이랑 머리 너무 예쁘고 오스칼 멋있어서 만화책 보던 시절ㅋㅋㅋㅋ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부터 느꼈지만, 사실 이 책은 마지막 프랑스 혁명 파트가 찐으로 재밌다. 초반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뒤바리 부인의 기싸움, 잔느의 목걸이 사기 사건은 '오호 재밌다' 이 정도라면 프랑스 혁명 파트는 '찢었다, 미쳤다' 이러면서 보게 된다. 특히 오스칼이 왕실 근위대를 뛰쳐나와서 프랑스 위병대에서 근무하면서부터는 진짜 너무 재미있다. 자매 중 제일 예쁜 막내딸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복을 입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는 왕실 근위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계급, 신분 이런 걸 모두 뛰어넘고 자신의 그림자와 같았던 앙드레를 남편으로 선택하더니 프랑스 혁명에 투신해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이런 여성 캐릭터! 정말 전무후무하다.


요즘 <베르사유의 장미>를 뮤지컬로도 만들어서 공연하고 있나보다. 뮤지컬은 전혀 안 보는 사람이라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오스칼 캐릭터가 무매력이라는 평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뮤지컬에서 오스칼이 매번 화만 내고 소리만 지르고 있다고ㅠㅠ만화책 보면 오스칼 진짜 개멋있는데 말이죠. 말 안 듣는 프랑스 위병대 군인들까지 휘어잡은 카리스마...나의 오스칼...ㅠㅠ.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다 듣고 나서는 요즘<나의 눈부신 친구>를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다. 이것도 진짜 엄청 재미있다. 오디오북을 들을 때 기본적으로 문장이 길지 않고, 묘사보다는 스토리 중심의 책을 고르는 게 필승 전략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 책이 딱 그렇다. 문장이 간단하고 '나'와 친구 '릴라'를 중심으로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다만 등장인물이 많아서 헷갈린다는 게 흠.)


그런데 똑같은 분량을 소화한다고 쳤을 때 오디오북으로 듣는 것보다 전자책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시간이 적게 걸린다. 이 책도 오디오북으로 듣다가 갑자기 전자책이 궁금해져서 밀리에 있는 전자책을 펼쳤는데 말도 안 되게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내용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 산책 시간은 어차피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간이기때문에 그 시간에 오디오북을 듣는 건 나름 뜻깊은 일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네 권짜리 책은 도저히 제대로 읽을 엄두가 나지 않기에 오디오북은 정말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요즘에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읽고 있다. 읽으면서 느꼈다. 이 사람 혹시 잘 배운 변태 아닐까...? 책들이 어딘가 다 이상하다ㅋㅋㅋㅋ<검은 개>는 멀쩡한 편인데 <이노센트>는 읽다가 깜놀했다. 갑자기 토막...이요? 단편집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차마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소재들로 가득 차 있다.


이언 매큐언, <속죄>의 원작자로만 알고 있었던 이 작가의 초기작이 이렇게 위험한 소재를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얼마 전에 읽었던 <견딜 수 없는 사랑>이 너무 재밌어서 초기작부터 읽으려고 했던 건 뿐이었는데,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악마의 재능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까. 글은 너무나 내 취향이라서 계속 읽을 예정이기는 한데...와...후아...정말 지독하다. 이언 매큐언 초기작은 조심하세요. 하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읽을 예정이기는 하다. <속죄> 이후부터는 소재가 좀 무난해진다는 평이 있으니 앞으로는 지뢰밭이 없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이하 "죽은 자")>는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다. 오래된 책이라서 그런 건지, 우리나라에서 존 르 카레의 판매량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그런 건지, 현재 절판 상태다. 다행히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에 <죽은 자> 전자책이 있길래 빌려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조지 스마일리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한다. 스마일리는 뚱뚱하고 키도 작고 아무튼 외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대단한 미인인 앤 서콤이 조지 스마일리와 결혼했을 때 다들 깜짝 놀랐는데 결국 앤은 '지금 조지 스마일리를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미스터리한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났다(몸만 떠난 거지 이혼한 건 아니다). 조지에 대한 이러한 설명들이 지나가고 나면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된다.


<죽은 자>는 스파이 소설이면서 추리 소설이다. 소설 초반에 어떤 남성(=S)이 죽는다. S는 외무부 고위급 직원인데 과거 옥스포드 대학교를 다닐 무럽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이 있다는 투서가 외무부에 날아들었다. 외무부 측에서는 S의 사상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기 위해 정보부 직원을 부른다.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스마일리다. 면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S는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S가 남긴 유서와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S는 스마일리와 면담을 하고나서 매우 분노했으며 그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영국 정보부는 스마일리를 불러서 도대체 면담 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을 하는데 스마일리는 어리둥절이다. 면담은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었으며, S에게 과거 공산당 가입 이력은 현재 당신의 커리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스마일리는 S가 면담 때문에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스마일리와 S의 자살 사건이 얽혀들기 시작한다. 추리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이 그렇듯이 S의 자살 역시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너무나 많다. 자살 몇 시간 전에 '다음 날 아침에 울릴 모닝콜'을 부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S의 자살을 파면 팔수록 괴이한 일들이 끝도 없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존 르 카레의 주특기, 초중반은 사건을 파헤치면서 나름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후반부에 미친듯이 휘몰아치기 전법이 또다시 등장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하 "추운 나라")>도 그랬는데 <죽은 자>도 예외는 없었다. 모든 비밀이 한꺼번에 밝혀지면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구간이 있다. <추운 나라>에 대한 평가가 워낙 좋아서 <죽은 자>에 대한 기대는 살포시 내려놓고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라는 의무감으로 읽었는데 <죽은 자>는 내 기대보다 훨씬 재밌었다. 서구권이나 동구권 가리지 않고 뼈 때리는 대사 날리는 솜씨는 데뷔작부터도 여전했다.


<추운 나라>와 <죽은 자>를 다 읽고 나서 이번 주말 내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테솔스")>를 읽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연달아서 세 권째 읽으니 이 작가의 스타일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존 르 카레의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서로 너무 끈끈하다. 끈끈하다고 해서 이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적대하더라도 끈끈할 수 있다. 어쨌든 굉장히 강렬한 관계가 다수 등장한다.


<죽은 자>에서는 스마일리-멘델, 스마일리-피터 길럼의 관계가 그렇다고 느꼈는데 다 읽고 나면 스마일리-X(혹시나 모를 스포를 위해 X로 처리)의 관계가 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X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X가 스마일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가 <죽은 자>의 줄거리에 있어서 핵심 오브 핵심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추운 나라>에서는 리머스와 피들러의 관계가 아주 핵심적이었고, <팅테솔스>에 다다르면 아주 난리도 아니다. 스마일리-카를라, 스마일리-피터 길럼, 빌 헤이든-짐 프리도 등등 끈끈한 관계가 너무나 많다.


피터 길럼에게는 카밀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고 조지 스마일리에게는 부인인 앤이 있는데 이런 관계들은 선명하지가 않다. 앤 스마일리에 대한 내 인상은 뭐랄까, 그녀가 유령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실체가 있는데 앤은 소문과 회상으로만 존재한다. 게다가 조지와 앤의 관계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앤은 문란하고 조지는 그저 견딜 뿐이다. 반면, 위에 서술한 조지 스마일리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 굉장히 선명하게 그려지고 그들 사이의 서사도 탄탄하다. 특히 스마일리와 카를라의 대면 장면은 분량이 굉장히 짧은데도 <팅테솔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런 특징들이 소설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 시절 남성들만 드글드글한 영국 정보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튼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연달아 세 권째 읽고 있으니까 웬만큼 무감각한 나조차도 이 남자들의 끈끈함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죽은 자> 후반부...)


그리고 또 하나. 존 르 카레는 소설의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수미상관 서술 방식을 좋아하는 듯 하다. <팅테솔스>는 다 읽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죽은 자>와 <추운 나라>는 처음과 끝이 묘하게 이어진다. <추운 나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베를린 장벽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주인공이자 서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조지 스마일리로 시작해서 조지 스마일리로 끝이 나는 소설이다. 이러한 수미상관 방식은 엔딩 장면을 시작으로 다시 책의 처음을 회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지 <추운 나라>는 책 덮자마자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었고, <죽은 자>를 다 읽고나서는 조지 스마일리가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활약하는 <팅테솔스>로 급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팅테솔스>는 영화를 먼저 봤는데 영화가 사알짝 어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소설도 마찬가지다. 쉽게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은 절대 아니다. 온갖 스파이 용어들이 튀어나오고 여기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작전명을 두 개 세 개씩 갖고 있다.('짐 프리도'가 '짐 엘리스'인데 나중에는 '하예크'로도 나온다. 한눈 팔면 나중에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다.) 머리가 좀 지끈거리기는 하는데, 너무 재미있다! 영화를 먼저 봐서 결말을 아는데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특히 후반부에 휘몰아칠 걸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심장이 떨린다. 이래서 아는 맛이 무섭다고, 존 르 카레 소설의 후반부는 숨도 못 쉬고 보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글은 원래 <죽은 자>의 리뷰로 쓰기 시작했는데 <죽은 자> 말고도 <추운 나라>, <팅테솔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페이퍼로 바꾸게 되었다. 아직 <팅테솔스>도 다 안 읽었는데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얼른 <팅테솔스> 읽고 그 뒤로 이어지는 카를라 시리즈도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나저나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 절판인 것도 아쉽고, 존 르 카레 전집이 없는 것도 아쉽다. 몇십 년 전에 쓰여진 소설을 여전히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독자가 있으니 어떤 출판사든지 전집 출간을 좀 고려해주면 좋겠다. 아무튼 열심히 읽고 열심히 리뷰 남겨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작은 이랬다. 


알라딘에서 서울코믹스 만화책을 재정가 할인한다는 알림이 떴다. 만화책은 어렸을 때 엄청 좋아했는데 커서는 왠지 잘 안 읽게 되어서 이런 알림도 겉에서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클릭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고 갑자기 구매욕구가 샘솟고 말았다. 일반 전자책은 할인폭이 10% 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만화책(이북) 세트 30% 할인 해준다고 하니까 엄청 저렴하게 느껴졌다.


장바구니에 담아서 결제 직전까지 갔던 만화책은, 어렸을 때 엄청나게 좋아했던 추리만화인 <소년탐정 김전일>. 알고 보니까 시즌2도 나왔고, 37세 김전일 시리즈도 나오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새 김전일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서 또다시 사건사고에 휘말리고 있었던 것이다ㅋㅋㅋㅋ. 갑자기 옛 추억이 떠오르면서 '이건 사야해' 모드가 되었다. 시즌1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오리지널 시리즈와 시즌2, 시즌2 리턴즈, 37세 김전일까지 전부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런데 잠깐, 이거 지금 읽어도 재미있을까? 이걸 본지 거의 이십 몇 년이 지났기 때문에 만화책의 자세한 내용은 다 잊어버렸는데도 주인공 김전일이 너무 변태 같아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렸고, 다른 만화책들을 들춰봐도 죄다 변태 같은 주인공들 투성이여서 그러려니 하면서 봤다. 추리하는 내용은 재미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2024년의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할인 행사 때 사야해'와 '지금 보면 재미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일단 대여 먼저 해서 보기로 했다. 초반 몇 권만 보면 대충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1권은 무료체험판으로 보고 2, 3권은 리디에서 빌려봤다.(리디에서는 전권 대여 500원인데 왜 알라딘에서는 1~3권 대여 가격이 1000원인건지 모르겠다;) 


초반 몇 권 읽으면서 느꼈다. 이건 빌려보는 게 낫겠다. 2024년의 내가 읽기에는 조금, 사실은 아주 많이 무리가 있다. 김전일은 왜 맨날 여자 치마 속 팬티를 보고 다니는 것인가.(우연히 볼 때도 있지만, 누워있는 김전일 위에 다가가서 일부러 자신의 치마 속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영화 촬영 아르바이트 에피소드에서는 남성 스태프들이 여성 출연진의 목욕탕 몰카를 찍고 다같이 보는 장면도 있다.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이런 걸 보면서 재미있으니까 장땡이라고 여겼던 그 시절의 나에게 화가 난다. 내가 이런 야만의 시절을 거쳐 왔다는 걸 새삼 느꼈다.


<김전일> 4권부터는 알라딘에서 대여해 보고 있다. 주말 만화책 대여 쿠폰이 있어서 저렴하게 빌렸다.(5000원 대여에 1500원 할인) 그런데 갈수록 가관이다. 사촌오빠라는 인간이 교복 입은 여주인공 엉덩이를 만지는 장면에서 말잇못. 그래도 빌려놓은 게 있어서 계속 읽고 있기는 한데 과연 이 만화를 끝까지 정주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걸 보면서 자란 내 감수성 내 자아 괜찮은 걸까, 갑자기 걱정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른 다른 좋은 만화책들로 나의 감수성을 정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천막의 자두가르>를 구매했다. 3권까지 나와있고 아직 미완결이며 재정가 할인 대상이어서 이북으로 구입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파티마(원래 이름은 시타라)다. 이란 동부 지방인 '투스'에서 어느 학자 집안의 노예로 생활하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몽골군 포로로 잡혀가게 된 파티마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복수할 방법을 찾는다. 한낱 외국인 포로에 불과한 파티마가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싶은데 만화를 보면 또 수긍하게 된다. 그 당시 몽골 내부에는 문화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사람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고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실 몽골 제국 관련 이야기라고 하면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이 어떻게 제국을 지배했는지에 대해 주목하기가 쉽다. 그런데 이 만화는 파티마, 그리고 파티마와 얽히는 몽골 제국 황후들이 스토리의 중심이다. 파티마는 몽골군이 페르시아에서 약탈해온 책들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어떤 황후의 시녀로 가게 되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권력 있는 여성들의 주위에 머물게 된다. 스토리도 너무 재미있고, 그 당시 몽골 왕과 황후의 복식이나 생활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나저나 궁금증 하나. 칭기즈 칸 아들의 황후 중 한 명이 '나이만 부족' 출신이라고 나오는데 이걸 보자마자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가 떠올랐다. 여기에도 나이만 부족이 나온다.(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나이만-아나의 전설...ㅠㅠ) 이 소설에 나오는 나이만 족이 <천막의 자두가르>에 나오는 그 나이만 족인지 궁금해졌다.


<천만의 자두가르> 다 읽고 나서, <히스토리에> 이북 세트를 사들였다. 역시나 재정가 할인으로 샀다. 이 만화책은 11권까지 나왔고 미완결이다. 작가가 워낙 작업 속도가 느리고 연세도 꽤 있으셔서 미완결로 끝날까봐 걱정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평이 너무 좋아서 일단 사봤다. 알렉산더 대왕의 궁정 서기관이 주인공인 만화다. 배경만 들어도 재미있다. 


이걸 샀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갑자기 역사 만화책에 꽂혀서 이것저것 찾아서 장바구니에 넣어뒀다. 어렸을 때는 추리 만화를 좋아했는데, 요즘엔 또 역사 만화가 좋다. 역사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데 가끔씩 그 시절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질 않아서 애를 먹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게 만화책인 것 같다. <천막의 자두가르>처럼 몽골, 중앙아시아 배경인 만화책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몇 개 더 찾아봤다.


<신부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배경이라고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환상을 가지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중앙아시아다. 유튜브에 올라온 실크로드 다큐도 찾아보고 그랬는데, 만화책도 있다니...! 이건 무조건 사야해. 평이 굉장히 좋아서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다. <천수의 나라>는 티베트 배경 만화다. 리뷰를 찾아봤더니 생각보다 잔잔한 내용의 만화라고 한다. <신부 이야기>만큼 큰 기대는 걸고 있지는 않지만 티베트 복식을 보는 재미는 있을 것 같아서 <천수의 나라>도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뒀다. 


중앙아시아 배경 말고도 또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해서 찾아보다가 발견한 <오르페우스의 창>. 어렸을 때 회색 표지에 <올훼스의 창>이라고 나온 판본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목이 <오르페우스의 창>으로 바뀌었다. 그 유명한 <베르사유의 장미>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 작품인데 이상하게 <올훼스의 창>은 <베르사유...>만큼은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베르사유>는 애니메이션도 방영했어서 그 당시에 모르는 어린이가 없었다. 나는 만화영화 주제가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바람 한 점 없어도 향기로운 꽃~~가시 돋혀 피어나도 아름다운 꽃~~~' 그에 비에 <올훼스의 창>은 한참 후에야 '이런 만화도 있었어?'라면서 알게되었다. 


<오르페우스의 창>은 러시아 혁명을 다룬 만화책이다. 이 만화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러시아'라는 지명을 죄다 '핀란드'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러시아=공산당=빨갱이' 연상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럴 거면 아예 출판을 하지를 말든가, 러시아를 핀란드로 다 바꾸는 그 정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은 너무너무 좋아했어서 어렸을 때 두툼한 만화책으로 샀었고 지금은 전자책으로 전권 보유 중이다. <오르페우스의 창>도 전자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조만간 구입해서 읽어볼 예정이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책은 이거다. 나만의 올타임 베스트 <마스터 키튼>. 


영국 특수부대 SAS 출신의 고고학자인 '키튼'은 고고학 강의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워 영국 보험사의 조사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이 사람의 특기는 극한환경에서 생존하기! 워낙 실력이 좋아서 어려운 조사 임무에 주로 투입되는데, 거기서 사건의 진범을 밝히면서도(그래야 보험금을 줄지 말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알아서 재주껏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 이야기도 조금 나오고, 고고학+추리+생존+잡지식이 짬뽕된 완벽한 내 취향 만화다. 타클라마칸 사막 에피소드는 정말 여러 번 읽었다.(언젠가는 사막에 떨어져서 살아나와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는 전자책이 있던데 제발 <마스터 키튼>도 전자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요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 프로젝트를 나 혼자 진행 중인데, 정신 안 차리면 자꾸만 만화책을 보게 된다(ㅠㅠ) 만화책 세트 할인이 뜨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샛길로 빠지진 않았을텐데. 이게 전부 할인 때문이다. 최근에 구매한 <히스토리에>만 다 보고 나면 진짜로 만화책 안 보고 <잃.시.찾> 읽어야지.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정말로 찾아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명훈의 <화성과 나>를 읽었다. 얼마 전에 <타워>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것도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역시나 좋았다. 


<화성과 나>는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매우 독특하다. 먼 미래에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아보고 싶다는 연구 의뢰를 받고 화성 연구에 착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의뢰는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의뢰자인 외교부 공무원이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면서 공식적인 연구 자체는 거기서 끝이 난 듯 하다. 하지만 연구 보고서를 본 과학자들이 강의 요청을 해왔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화성 이주에 대한 연구자로서의 호기심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우리나라 정부 기관이 화성 이주에 관한 연구를 의뢰한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걸 SF소설가에게 의뢰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물론 외교학으로 석사까지 마친 소설가여서 그런 연구 의뢰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 안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붉은 행성의 방식>과 <위대한 밥도둑>이다. <붉은 행성의 방식>은 화성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화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라니, 말만 들어도 재미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살인사건 자체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살인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지구의 법을 따를 것인가 화성만의 법을 만들 것인가, 이런 논의들이 주를 이룬다.


화성에는 정치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논의할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정치인이 화성에 가면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조종사, 엔지니어, 의사, 생물학자와 같이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과학자 및 공학자 집단들이 주로 이주 초기에 화성으로 왔다. 하아...이래서 '문송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구가 망하고 화성으로 가게 된다면 그 우주선에 날 태워달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웬만한 기술로도 안 되고(미용사도 안 태워준다) 인간의 삶에 획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술이 하루아침에 나한테 뚝딱 생길리가 없다. 망해가는 지구에서 행복하게 사는 수밖에.


아무튼 화성에 몇 없는(아마도 유일한?) 정치인인 '희나'는 화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상식적으로 처리하자'는 과학자들의 말을 듣고 열이 받아 버린다. 상식적으로 처리하는 게 도대체 뭔데?! 그들은 모든 걸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인 희나의 입장에서는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화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어떤 법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


【"어느 상식?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할까? 거주지 내규가 벌거벗겨서 곤장을 치는 거면 받아들일래? 설마 군법을 말하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그래도 민간 형법이 낫겠지? 그럼 어느 나라 법으로 할까? 당신 나라 법, 아니면 우리 나라 법? 피살자 출신지 법으로 해. 아니면 피의자 출신지로 해? 그런데 이 법들은 관할 지역이 전부 지구 대기권 안이지? 피의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어떻게 할래? 판단은 누가 하지? 지구 법정에 원격으로 세울까? 화성에 변호사는 한 명도 없으니까 지구 변호사를 선임하게 할 거지? 단심제로 해, 아니면 삼심제로 해? 항소 기간에 피의자는 어디에 머물러? 집행은? 형이 정해지면 해당 거주지 구성원들이 직접 집행하게 해? 살인이니 똑같이 사형시켜? 30년 형쯤 나오면 어디에 수감해? 전문 교도관을 화성으로 보내나? 감옥은 새로 하나 짓고? 아니면 우주선 태워서 지구로 보낼래? 그러다 중간에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지지? 이송 비용은 누가 부담해? 이송 기간은 수감 기간으로 계산하나? 화성 거주 기간 전부를 수감 기간으로 쳐달라고 주장하면 어쩌지?"】


화성은 완전히 다른 행성이고 다른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화성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도망가지 못한다. 지구라면 그야말로 '지구끝까지'라도 도망갈텐데 화성에서는 갈 곳이 없다.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역은 (비유적으로)한뼘 정도의 공간밖에 되지 않기에 도망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역설적으로 보면, 도망치지도 못 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구인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예측하기가 어렵다. 배명훈 작가는 이 소설에서 '희나'의 예측보다는 좀더 늦게 살인사건이 발생했다고 쓰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화성에 이주하자마자 살인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붉은 행성의 방식>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단편이라서 아쉽다. 도대체 범인은 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물론 책 안에 이유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 말고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나서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화성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살인 사건 소식을 듣고 나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등등 알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이래서 단편소설집은 너무 좋아도 막 심각하게 좋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 궁금한 게 많은데 풀리질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 다음으로 좋았던 건 <위대한 밥도둑>이다.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평생토록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화성에 이주해서도 별로 힘들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이거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 뭔가를 먹고 싶어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 지구의 어떤 음식을 강렬하게 갈망하게 되는데.......그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위대한 밥도둑>은 플롯이나 주제보다도, 주인공이 자신이 먹고싶어하는 음식을 설명하는 그 대사가 너무 좋았다. 이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어 나간다면, 외국인들이 저 부분을 보고 당장 저 위대한 밥도둑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 번 반성했다. 끼니마다 '오늘 뭐 먹지' 고민하는 것도 귀찮고 나를 위해서건 누구를 위해서건 요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한동안 포만감 느껴지는 알약 개발을 강력하게 원한다고 떠들고 다닌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화성으로 이주할지도 모르는 미래 인류를 생각한다면, 내가 한 말은 그야말로 있는 자의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화성으로 보내져서 맨날천날 아무 맛도 없지만 생명은 유지하게 해주는 식량들을 먹으면서 살다보면 뭐 먹을지 고민하면서 사는 지구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았는지 뼈저리게 반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얼마 전에 봤던 영화 <다운사이징>이 떠올랐다. 어떤 과학자가 생명체의 몸을 아주아주 작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다. 그 과학자는 인간의 몸을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거기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는다. 사람의 몸이 작아지니까 환경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몸이 작아졌으니까 한달 식비도 엄청나게 줄어들고, 당연히 엄청나게 작은 집에서 살아도 되니까 집세 걱정도 완전히 사라진다.(작은 집이라고 해도 다운사이징한 사람들에게는 대궐 같은 집이다.) 다운사이징 수술은 지구의 환경 문제와 개인의 경제적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해결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사회에서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은 사람은 5%에 불과하다. 집 문제, 돈 문제 한꺼번에 해결이 되는데도 그 수술을 선뜻 받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극극극소수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서 살게 해준다고 해도, 너무나도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되는 것에 겁을 먹는다. 게다가 원래 크기의 인간들은 다운사이징 수술을 한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작아지는 수술을 받고 세금도 덜 낼 거라면 투표권도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을 한다. 영화에서는 깊게 다루지 않지만 다운사이징 인류와 非다운사이징 인류의 갈등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화성과 나>에서도 지구에 사는 사람과 화성으로 이주해온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알력 다툼이 등장한다. 지구에서 화성으로 우주선을 보낼 때마다 매번 더 힘 있는 사람을 보내서 화성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화성으로 온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화성 사람들과 섞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음 번 우주선이 올 쯤이 되면 갑자기 화성 친화적으로 바뀐다. 그 우주선에는 자신보다 더 권력이 센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힘 있는 지구인에게 지지 않으려면 화성인들끼리 대동단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운사이징 수술이든, 화성으로의 이주든, 결국은 인간 집단 간의 갈등이 문제다. 인간이 '화성'에 가서 산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화성에 가서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 화성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인간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기후 문제로 인해 인류의 앞날이 계속해서 힘들어질 거라는 우울한 전망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요즘, 화성으로 가거나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과연 선뜻 나설 수 있을까. 이런 소설을 보고 이런 영화를 볼수록 쉽사리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