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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은 눈이 참 자주 내린다. 나는 추운 건 좋은데 눈 내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 팍팍팍 빠르게 걷고 싶은데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슬로우모션처럼 걸어야 하는 게 별로다. 그래서 올겨울에는 산책을 많이 못 했다. 그래서 살이 찌기 시작한 건가. 나가서 걷고 싶은데 길이 너무 질퍽거려서 걷기가 참 애매하다.


창밖을 보다가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하면 캐나다, 캐나다 하면 가마슈 경감 시리즈라는 단순한 발상이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여름이 배경일 때도 있고, 겨울이 배경일 때도 있는데 나는 이 시리즈와 찰떡궁합인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한다. 스리 파인스(사건이 주로 벌어지는 마을)에는 눈이 내려줘야 제맛이다.


눈 내리는 날, 스리 파인스의 비스트로에 모인 동네 사람들. 그들은 카페오레나 핫초코를 한 손에 들고 정답게 대화를 나눈다. 물론 살인 사건 이야기일 때가 많지만ㅋㅋㅋ. 


이번 사건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스리 파인스에서 늙어 죽는 사람은 없는 거야? 살인마저도 평범하지 않잖아. 그저 한 대 후려치거나 서로 찌르거나 총이나 몽둥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야? 아니다. 언제나 난해했다. 복잡하기까지 했다. 전혀 퀘베쿠아답지 않았다. 퀘베쿠아는 거침없고 명쾌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얼싸안았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면 머리를 후려치면 될 뿐이었다. 퍽. 끝. 유죄. 다음. ‘이건가?’, ‘이게 아닌가?’ 따윈 없다. 빌어먹을.


스리파인스를 묘사하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웃기고 좋다ㅋㅋ. 나야 소설이니까 읽는 거지만, 진짜로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매번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동네를 다 떠나고도 남지 싶다. 작고 아름답지만 너무나 무서운 마을...그곳이 스리 파인스다.


만약 살인 사건이 없다면 그런 마을에 살고 싶느냐 하면 그것도 글쎄. 생각은 좀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작은 마을, 작은 공동체가 갖는 폐쇄된 분위기를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리 파인스를 너무나 사랑한다.


매주 토요일마다 벌어지는 같은 주제의 대화였다. 해변으로의 여행 상품 비교, 캐리비안 크루즈 여행 상품 고르기, 산 미겔 데 아옌데와 카보 산 루카스, 또는 바하마 대 바베이도스에 대한 논쟁. 끝을 모르고 내리는 눈과는 거리가 먼 이국적인 장소들. 하지만 여행이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실제로 떠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가브리는 그 이유를 알았다. 머나, 클라라, 피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의 이론은 달랐다.

"다들 게을러터져서 그런 거야."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가브리는 카페오레를 홀짝이며 시선을 벽난로 속 타오르는 불길에 둔 채 익숙한 리듬을 타는 익숙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스트로 안을 둘러보았다. 대들보, 넓은 널로 깐 바닥, 중간문설주가 달린 창문, 통일성을 무시하고 배치된 편안하고 오래된 가구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스리 파인스보다 따뜻한 곳은 없으리라.


현실에서는 이런 마을에서 살아볼 일이 없어서 그런 건지, 루이즈 페니 소설에 등장하는 스리 파인즈의 분위기를 너무 사랑한다. 특히 겨울 배경 문장들이 좋다. 바깥이 너무나 춥기 때문에 실내가 대조적으로 더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고, 이따금 멈춰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입김을 불어 가며 대화하는 모습이 꼭 만화 속 등장인물들이 말풍선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몇몇은 카페라테를 마시러 올리비에의 비스트로로 향했고, 몇몇은 신선한 빵이나 과자를 사러 사라네 블랑제리 빵집으로 갔다.


피터와 클라라는 비스트로에 가는 동안 마주친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웠다. 두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물어뜯곤 했던 낡은 털모자 대신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들어있었던 새 모자를 쓰고 있어서 옛 모자에 익숙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들은 겨우내 모자에 달린 털실 방울을 가만히 놓아두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울 대신 양초처럼 머리 꼭대기에 심지만 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만약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마을에 가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면 나는 겨울의 스리 파인스를 택해야겠다. 눈발을 해치면서 올리비에의 비스트로로 들어가 카페오레를 주문하고 머나의 헌책방에 들러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추천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눈 오는 겨울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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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다. 시간이 참 잘 간다. 시간이 흐르는 게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 그 시간들을 잘 견뎌냈다는 뜻이니까, 한편으로는 달력이 넘어가는 게 뿌듯하기도 하다. 예전에 투병하시는 분이 그린 인스타툰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을 보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건 그 나이까지 죽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니 많은 게 달리 보였다. 나이 먹는 게 딱히 슬프지 않다. 아프지 않고 꺾이지 않고 2025년을 맞이한 나 자신, 대견하다.


어제는 시사인 전자책을 구독해볼까 싶어서 시사인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뉴인(NEW 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사인 전자책을 구독하면 월 12,000원인데 뉴인을 구독하면 월 9,900원에 시사인 최신 기사들을 전부 볼 수 있다는 것. 시사인 기사들을 굳이 책의 형태로 볼 필요가 없는 나에게는 상당히 합리적인 서비스였다. 바로 구독 결제! 주간지 기사의 긴 호흡을 좋아하는 편이라 예전부터 시사인을 좋아했는데 뉴인 서비스 괜찮으면 이걸로 정착해야겠다. 종이 잡지 쌓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딱인 것 같다.


어제는 또 당근 거래를 열심히 했다. 안방 침대를 무료나눔으로 올려놨는데 깨끗한 상태가 아니여서 그런지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실 이런 큰 가구는 운반 가격이 문제다. 용달차 부르면 못해도 20-30만원은 나올텐데 그 돈 주고 이렇게 낡은 침대 가져가느니 사는 게 낫겠다고들 생각하는 듯 하다.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어제 연락이 왔다. 외국인이었다. 이 외국인은 대뜸 영어로 매트리스만 가져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날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던가? 에라 모르겠다, 나도 영어로 대화했다. 매트리스만 가져가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사이즈가 크니 차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신은 혼자고 이걸 들고 버스를 타겠다는 거다ㅋㅋㅋㅋㅋ내가 말했다. 절대 안 된다고, 이거 혼자서는 들지도 못한다고, 버스에 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 외국인은 자신의 집에 아무 것도 없으며 오늘 당장 매트리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그 사정은 이해하는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싱글 매트리스를 구해보는 게 낫지 우리집 매트리스는 당신에게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느 정도 수긍했는지 다른 물건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휴...미리 말 안 했으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이 동네는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수도권인데 몇 년 전부터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당근 거래 하는 외국인들도 꽤 만났다. 예전에 냄비 나눔글 올렸었는데 그거 받아간 사람도 외국인이었다. 한국말 너무 잘해서 얼굴 보기 전까지는 외국인인지도 몰랐다. 오늘 침대 가져간다는 이 분은 한국에 처음 온 사람인건지 한국말을 못하고 냅다 영어로....;; 그나저나 이분이 문장 끝에 sir/ma'am 붙이는 건 별로였다. 내가 그 사람 상관도 아닌데, 당근에서 무료나눔을 하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갑자기 불편해졌다. 예전에 인도 여행할 때 그쪽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말할 때 꼭 sir 혹은 ma'am을 붙였던 기억이 떠올랐다.(부자들은 당연히 예외ㅋㅋ)이 외국인도 혹시나 그쪽 계통인 걸까. 뼛속 깊이 깔린 계급 의식을 느낄 때마다 나는 불편해진다. 그나저나 방에 매트리스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데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보내나 걱정이네.


밤에는 장농 정리를 했다. 모아서 아름다운가게에 보내려고 했는데 계획 취소. 아름다운가게는 당장 옷걸이에 걸어서 팔아도 되는 컨디션의 옷들만 받는다고 한다. 세탁이나 수선 과정이 없기 때문에 진짜 깨끗한 옷만 받는다고. 내가 선별한 옷은 그 정도의 컨디션이 아니어서 아무래도 헌옷 수거업체에 연락을 해야할 것 같다. 옷 기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기증을 하고 싶다면 깨끗하게 입고 낡아지기 전에 미리미리 기부할 것. 오늘의 교훈이다.


요즘 보고 있는 책은 <중앙아시아사>. 이 책, 재밌다. 밀리의 서재에서 보고 있는데, 전자책 적립금 쌓이면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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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엄마가 수술하러 병원에 갔을 때 나 혼자 분리수거를 한 적이 있다. 부모님댁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중이라 분리수거 하는 날마다 버릴 게 산더미처럼 나온다. 그날도 엄청나게 많은 짐을 들고 나가야 했는데 우리집 강아지가 혼자 못 있겠다면서 잽싸게 나를 따라나왔다.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성향이기는 하지만 엄마가 있을 때는 분리수거하러 나갔다 오는 시간 정도는 혼자 있었다. 하지만 주보호자인 엄마가 없으니 분리불안 성향이 심해지면서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하는 강아지가 되어버린 것ㅠㅠ


그날따라 눈이 많이 와서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웠다. 유모차 안에 분리수거 바구니 하나 넣고, 그 위에 하나 쌓고, 손으로는 유모차 밀고 발로는 박스 하나 밀면서 분리수거장까지 다녀왔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ㅋㅋㅋ. 혼자서 짐정리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분리불안 성향 강아지 돌보면서 눈 오는 날 분리수거까지 하려니까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ㅠㅠㅠ그럼 뭐하나.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낑낑 대면서 분리수거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 다시 돌아온 분리수거 날. 오전 햇빛이 너무 좋아서 분리수거는 오후에 하기로 하고 엄마랑 나는 각각 산책을 나섰다. 엄마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갔고, 나는 혼자 나갔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다가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아보이는 어르신이 한 손에 분리수거용 바구니 두 개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종이가 가득 든 박스를 질질 끌고 가는 게 보였다. 얼른 달려가서 박스 하나를 들어드렸다. 혼자서 낑낑 거리면서 분리수거 하는 괴로움을 알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지난주에는 혼자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으니 이런 것도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헬로, 뷰티풀>에 나오는 문장인데 힘들 때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이 문장이 떠오른다.


설 연휴는 조용히 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짐 정리를 하면서. 엄마는 오늘 말씀하셨다. "그동안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 아직도 정리할 게 남아있어?" 예, 그러게나 말입니다. 수납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아주 많은 짐이라도 요리조리 잘 쌓아놓으면 좁은 공간에 배치해놓을 수 있다. 그래서 수납을 잘한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많은 짐을 효율적으로 보관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쓸모없는 짐을 잘 숨겨두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곤도 마리에가 설파한 정리의 기술 첫 번째는 정리할 물건을 모두 꺼내서 펼쳐놓으라는 거다. 안 쓰는 물건을 상자에 넣어두고 베란다에 차곡차곡 쌓아두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꺼내서 전부 펼쳐보면 어마어마한 양이 된다. 거기에 충격을 받아야 비로소 정리가 시작되는 거다. 그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ㅠㅠ도대체 언제 끝나...


최근에는 그릭 요거트에 빠져 있다. 그릭 요거트를 사먹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반 플레인 요거트를 사서 그릭 요거트 메이커에 넣어서 만들어 먹고 있다. 1차 유청분리, 2차 유청분리를 거치면 크림치즈처럼 꾸덕한 그릭 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 나는 뭐든지 꾸덕하고 되직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꾸덕한 그릭 요거트 완전 내 취향이다. 엄마는 너무 되직한 걸 좋아하지 않아서 요거트에 두유를 첨가해서 드시고 있다. 무가당 플레인 요거트는 새콤한 맛이 너무 강해서 먹기가 힘들었는데 유청 빼고 꾸덕하게 만드니까 신기하게도 새콤한 맛이 싹 빠지고 딱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고 과일이랑 먹어도 맛있다.


오늘도 쿠팡프레시로 1.8리터 짜리 플레인 요거트 두 병을 주문했다. 그릭 요거트 만드는 데에 최소 30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미리미리 주문해서 만들어놔야 한다. 1.8리터로 만들어도 유청 다 빼고 나면 얼마 안 남는다. 둘이서 사나흘이면 싹 먹어치울 양이다. 매일 아침 먹으려면 쉬지 않고 공장처럼 그릭 요거트를 만들어내야 한다ㅋㅋㅋ. 요즘 그릭 요거트 만들어 먹는 게 나의 낙이다.


어제부터 중앙아시아 지도 그리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관련된 책들을 계속해서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 지도가 쫙 펼쳐지지 않으니까 읽다가도 턱턱 막힌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나라 위치랑 주요 도시 위치 정도는 머리 속에 입력해놓으려고 한다. 어제부터 일기장에 그려가면서 연습하는 중인데 은근히 쉽지 않다. 예쁘게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연습해야지. 그리고 언젠가는 우즈베키스탄에 꼭 가보고 싶다. 부하라, 사마르칸트가 전부 우즈베키스탄에 있다니...!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이제 진짜 음력으로도 찐 2025년이다. 작년 한 해는 삼재가 꼈나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는데(진짜 삼재일까봐 무서워서 알아보지 않았음) 올한해는 어떻게 지나갈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그래봤자 모든 일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힘들고 기분 나쁜 일은 흘려보내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기억들만 꽉 붙들어야겠다. 우울한 일들은 일부러 일기장에 적지 않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애써서 즐거운 일만 적는 중이다. 태어나길 워낙 시니컬하게 태어나서 즐거운 일만 골라내는 게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노력하는 중이다. 노력한다면 점점 더 나아지겠지. 되면 되고,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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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귀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다. 십몇 년 전에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왼쪽 고막이 터졌었는데 그후로도 계속해서 염증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더니 왼쪽 귀가 솜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아예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너무 오래 되었다며 일단 수술은 해보지만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며 일단 수술을 해보기로 했다. 오늘 입원해서 내일 수술하고 내일 모레 퇴원한다.


간호간병통합병동이라서 보호자가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집에 남아서 또 짐 정리를 했다. 요즘 내 일상은 정리가 뒤덮었다. 인스타만 켜면 온갖 정리용품&정리꿀팁 릴스가 뜬다. 오늘의 타깃은 현관.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신발장을 열면 카오스다. 모든 물건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사시는 이 집에 우산이 스무 개가 넘어간다. 아니, 서른 개? 그런데도 비가 와서 급하게 하나 집어서 나가면 안 펴지기 일쑤다. 거기다가 구두 신을 일이 아예 없는 상황인데도 구두약과 구두솔이 넘쳐난다. 여기 이사 와서 신발장 서랍에 던져놓고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구두약과 구두솔은 전부 빼서 박스에 담아두었다. 한두 개만 남기고 전부 버릴 예정이다. 우산도 하나씩 다 펴보고 고장난 것들은 버릴 거다. 부모님이 이 집에 안 계시는 동안 내 맘대로 정리할 예정이다. 어차피 아무도 내가 정리한 걸 모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공간에 손 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좋게 말해 개인적이고, 나쁘게 말해 남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서 남의 공간을 정리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이 상태 그대로 유지될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사부작 사부작 정리를 하고 있다. 오늘은 현관, 내일은 장농, 모레는 주방 차례.


부모님이 쌓아둔 짐을 정리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하루는 내 짐도 다 갖다 버리고 싶다가, 또 하루는 미친듯이 뭔가를 사고 싶다는 욕망에 허덕인다. 아무래도 미쳐가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에게 상담했다. 남편은 나보다 몇 년 전에 이 과정을 다 겪어본 사람이다. 남편은 나보고 자아를 버리라고 했다. '이건 왜 이러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런 의문 자체를 갖지 말라고 했다. 기계처럼 정리를 하라고 했다. 자아를 버린다는 것.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위한 즐거움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역시 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근처 도서관에 책배달 신청을 넣었고 어제 한 권, 오늘 세 권 찾아왔다. <나는 걷는다 1>은 예전에 읽었기 때문에 2, 3권만 빌려 왔다.

알라딘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리고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꺼냈다. <나는 걷는다2>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 부서지기 쉬운 순간은 나와 세상 사이에 화합이 자리 잡는 시간으로, 사람들은 그 시간을 연장할 수 없는 걸 아쉬워한다. 슬픔이 다시 찾아오는 때에 떠올리게 되는 기분 좋은 순간들은 찌르레기의 비행처럼 덧없고 강렬한 순간이며,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서 훔쳐낸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행복을 찾아서 나는 떠난 것이고, 2000년 이상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실크로드는 그러한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으로 보였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실크로드를 끝까지 횡단하거나, 적어도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고 싶다. 난 지금 예순둘인 데다 계속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에 여행을 마칠 때까지 건강이 허락할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이 왜 이런 생고생을 하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른채 험한 길을 걷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뭐라고 모든 일에 '왜, 어떻게' 같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걸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책에서 향기가 났다. 아까 도서관에 있는 책 소독기를 이용했더니 그 향기가 아직도 책에 짙게 배어있다.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꾸만 이렇게 독기를 뿜어내서는 곤란하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아까 엄마한테 살짝 짜증을 냈는데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상냥하고 착한 딸로 돌아왔다.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한 사람의 책을 읽으면 이런 효과가 있다.


부모님댁 아파트 단지는 매주 목요일에 분리수거를 한다. 신발장에서 꺼낸 더러운 신발상자들은 아직 버리지 못한 채로 현관에 쌓여있다.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 적어도 오늘만은 현실을 잊고 모래바람 날리는 중앙아시아 스텝을 걷고 싶다.


그래,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발견할 세계가 내가 떠나온 세계보다 못한 곳인가? 도시를 뒤흔드는 불안한 광기, 일상의 스트레스, 발동기와 같은 욕망, 모든 책략의 최종목표와 같은 권력, 미덕으로 격상된 공격성······ 이런 것들이 내가 방문하게 될 마을보다 안전한 것인가? 나는 인간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걸음으로써 시선을 올바른 차원으로 되돌리고 시간을 다스리는 법을 익힐 수 있다. 걷는 사람은 왕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는 고통을 당하지만, 좀더 잘 살기 위해서 조립식 소파보다 넓은 공간을 선택한 왕······. 나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던 제약과 두려움에서 내 머리와 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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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국가적으로 봐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다. 2024년은 나에게 잊지 못할 한 해다.


작년 초중반까지는 매우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때 책을 100권 넘게 읽었다. 이렇게 읽다가는 올한해 200권 넘게 읽는 거 아냐, 라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응, 아냐. 연말에 가족에게 큰일이 생기면서 내 인생은 큰 변화를 겪었다. 언니랑 나랑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그 일은 나의 조용한 나날에 싸대기를 날리듯이 날아들어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싶지 않아 자세히 적지는 않지만...가족이라는 존재는 나를 기쁘게도 힘들게도 한다. 기쁨과 힘듦의 비중이 1:9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작년 한 해, 나는 뭘 했는가.

매일 일기를 적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말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A5 사이즈 노트 한 장(=앞뒷면)을 꽉 채우는 분량이다. 그것도 손글씨로. 그렇게 써놓은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없다. 쓰는 걸로 끝이다. 보지도 않을 걸 왜 쓰는 건지 가끔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기도 하는데 나도 답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쓰기 시작했고, 미리 사놓은 노트랑 펜이 있으니 계속 쓰고 있는 거다.(죽기 전에는 반드시 불태울 거다!!!)


그동안 깨닫지 못 했던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 

나는 미니 사이즈를 좋아한다!!


나의 이러한 성향을 나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미니백을 들고 다니는 어떤 유튜버를 보고서 깨달았다. 작은 것이야말로 내가 인생 내내 좋아했던 것이었음을. 정말이지, 작은 것들이 너무 좋다. 화장품은 작은 소분 용기에 덜어서 쓰고, 우산도 가방도 작고 가벼운 게 좋다. 심지어 밥도 정말 작은 그릇에 먹는다. 배가 고파서 그걸로 두 그릇을 먹을지언정 무조건 작은 그릇이 좋다. 남들은 거거익선이라고 외치는 티비도 냉장고도 작은 게 좋다. 해외에서 살 때 내 하반신 높이의 냉장고로도 잘 먹고 잘 살았다. 나의 이런 성향이 미니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단순 미니멀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걸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작고 가벼운 거라면 여러 개 있어도 좋다.


그리고 여전히 책을 읽는다. 최근 두세 달 동안 미친듯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얼마 전에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만 가지 나의 모습 중에서 책 읽는 나를 가장 좋아한다! 책을 읽는 나야말로 가장 내가 워너비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걸 너무 소홀히 하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시 읽어야지. 읽지 않는 나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지금 읽는 책은 두 권. 밀리의 서재에서 <갑골문자> 보고 있고, 종이책으로 피터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을 보고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이런 키워드들은 내가 최근 들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원래도 좋아했는데 작년에 둔황 여행 다녀오고서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중앙아시아에 꼭 가보고 싶다. 가야지, 갈 거다. 이렇게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다보면 꼭 가게 되는 것 같다.


작년말에는 대만에 다녀왔다. 그렇게 바빠 죽겠다면서 할 건 다 했다.(소멸 예정 마일리지가 있어서 억지로 다녀온 느낌이 없지 않지만서도)

대만은 내 취향에 완벽히 들어맞는 여행지는 아니었다. 어딜 가도 일본 같았고(일본에 안 가봤는데도 일본 같았다!) 또 어떤 곳은 한국의 중소 도시 같았다. 같이 간 남편은 '대만은 관광지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보러 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했다. 대만에 다녀와서 기억에 남는 건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라 친절한 대만 사람들이었다. 친절함으로는 손 꼽히게 기억 남는 나라인 건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대만에 다녀온 게 꿈 같다. 나 정말 거기 있었던 게 맞나.


너무 혼란스러웠던 2024년이 가서 좋고, 2025년이 와서 좋다.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좋으니 지긋지긋한 2024년이 얼른 사라지길 빌었다. 잘 가라,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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