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eBook]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이연숙 지음 / 난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는 일기 쓰는 게 정말 싫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강제로 써오게 했던 일기장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도대체 그런 걸 왜 쓰라고 시키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매일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들어서 3~4일씩 밀리더라도 짧게라도 쓰고 지나가려고 노력한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나의 하루하루가 바닷가에 쌓아둔 모래성처럼 스르륵 무너져서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일기를 쓴다는 건 그것들을 어떻게든 모으고 다지고 구워서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지나간 시간들을 단단하게 붙들어맸다는 기분이 든다.


일기를 쓰고 있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얘기하면서도 내가 숨기고 있는 게 하나 있다. 공개용과 비공개용 두 종류의 일기장이 있다는 것이다. 사진과 글을 함께 올리는 블로그에는 모두에게 공개할 수 있는 내용만 적는다. 공개하기 힘든 내용들은 일기장에 손글씨로 적는다. 그래서 나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다. 남에게 보여줘도 괜찮은 삶과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삶. 물론 나만 이런 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는 올리는 자신의 삶에는 필터링을 걸지 않을까?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은 꽁꽁 숨겨두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왔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은 일기책이다. 그런데 다른 일기나 에세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르자면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분’까지도 적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족 이야기. 우울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 나라면 이런 이야기들은 나만 보는 일기장에 적을 것 같은데 저자는 이런 글들을 블로그에 올렸고 그것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했다. 처음에는 ‘오? 아? 이렇게 솔직하게 쓴다고?” 이러면서 책과 약간 거리두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잊고 금세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의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갔고, 일단 저자가 글을 잘 쓴다. 마음에 남은 문장들이 꽤나 많았다.

【엄마는 항상 서러움을 꾹꾹 씹어 삼키면서 말한다. 언제고 어느 때고 말을 하다가 울 것 같다. 그날도 엄마는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울었다. 나는 결코 엄마의 외로움을 외면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보상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엄마를 볼 때면 그래서 무력해진다.】

【이런 식으로 삶이 천천히 망가진다. 망가진다는 것을 안다. 처음에는 이렇게 머리를 감지 못하거나 옷을 입지 못하는 일로 시작해서 살아가는 것에 흥미를 잃게 된다. 나는 분명히 내가 매듭짓지 못하고 벌여놓기만 한 일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 일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그것들을 모두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미루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게 되면서 나는 나를 주워담는 것 역시 포기한다. 도처에 내가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내 말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정말 정신이 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기만 한다면. 그러지 않으려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정말 그러기 싫기 때문이다. 추해지지 말자. 하루에도 일억 번씩 생각한다. 하루에 일억 번씩이나 추해지지 말자는 생각을 하다보면 사람이 추해진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지만, 지금 누가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에야 남은 숫자를 세면서 이빨로 손톱을 물어뜯는 수밖에. 9월도 미워하지 말자, 장담할 수는 없다. 사람은 미워하되 죄는 미워하지 말자.】
 
사람은 미워하되 죄는 미워하지 말자는 이 문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보통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걸 뒤집으니까 굉장히 재미있는 문장이 되었다. 이 문장을 읽고난 후 나는 계속해서 생각한다. 사람은 미워하되 죄는 미워하지 말자... 왜지? 왜 자꾸 이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겠다. 자꾸만 생각이 난다.

이것 말고도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 굉장히 많은데 또 너무 많이 인용하다보면 저작권에 위배가 되니까 적당히 옮겨본다.

【쉼터에 들어가거나 말 그대로 '빌어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혼자서 항의하듯이 죽어갔던 젊은 예술가들의 선택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죽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안으로' 들어가볼 수는 없지만, 매번 그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더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쉽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누군가가 이미 있다.】

【반성하는 게 너무 좋아서 반성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 인신공격이 대단한 인권운동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 지가 말하는 건 당사자성이고 남이 말하는 건 인권침해(?)인 사람들... 인권 인권 외치면 인권이 자동으로 생기는 줄 아는 사람들... 자기집 개 이름도 인권으로 지을 사람들... 어제까지는 남 욕하는 농담에 웃다가 오늘은 갑자기 정신 차린 사람들... 지가 그렇게 하는 게 대단한 사회개혁인 줄 아는 사람들... 반성은 집에 가서 혼자 하고 일기장에 쓰면 되는데 굳이 동네방네 죄송하다고 떠드는 사람들... 전자렌지에 햇반 데우는 시간보다 빨리 반성하고 빨리 죄송한 사람들... 하여튼 어떻게든 인간을 분류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들... 남들이랑 자기랑 똑같지 않으면 세상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트윗 몇 개로 인권이 나아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사람들...】

【그치만 전 다른 이유로 레즈비언이 부럽다는 말이 존나 이해가 안 갔는데요. 왜냐면 그 트윗을 쓴 사람도 여자들이랑 조금만 있어보면 알겠지만 도대체 이 미친 여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 여자들은 다 미쳤는데 어떻게 이 여자들과 연애를 한다는 것인지? 제가 레즈비언 연애를 하고 레즈비언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사회의 시선이 아니라 그냥 여자들이 미쳤다는 사실 자체였거든요. 여기 적을 수도 없는 별의별 미치광이 같은 여자들이 다 있었고 그녀들도 절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런 것들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해야 하는 일들은 이미 너무 많다. 나는 그것들을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미룬다. 아직 미룰 수 있다는 사실로 나는 안정감을 느낀다.】

【어느 날 나는 주민센터에 갔다. 주민센터 입구에서 '나는 차상위 계층입니다'라고 소리내서 말하자 그곳의 두껍고 거대한 철문이 겨우 틈새를 벌리며 열렸다. 그들은 내가 통장 평균 잔고를 오십만 원 정도 유지하면 계속해서 차상위 계층(계급?)으로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화려한 자격 요건들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과정들이 나를 죽이지는 않되 겨우 살려놓으려는 계략임을 알았다.】

【지금 당장 삼만 원이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마음먹어지는 그 사람은 또 어떡하지? (나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안다. 죽을 용기로 왜 살지 못하는지 안다. 용기는 공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기는 삼만 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말로 일기가 쓰고 싶어졌고 좀더 솔직하게 쓰고 싶어졌다.(용감하게 공개할 자신은 없다. 솔직한 일기는 일기장에만 간직할 예정). 계속해서 글을 쓰는 행위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궁금해졌고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았지만 일기가 남았으니까! 미래의 내가 그것을 읽을 수 있으니까! 그것 나름대로 멋진 일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가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하는 '소년 완결 없음'도 읽고 있다. 일기책도 재밌었는데 '소년 완결 없음' 이것도 상당히 재미있다. 좋아하는 필자가 생긴 것 같다. 다음 책도 기다리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피라미드 - 세계문학전집 21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다. 실제로 그 안에 관이 있고 보물이 있고 왕의 미라가 있었다고 배웠다.(지금은 도굴되었거나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겠지만 말이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왕의 무덤을 왜 그렇게 거대하게 지었어야만 했는가?


언뜻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인돌 같은 거대한 무덤을 보면 흔히들 하는 설명이 있지 않은가. 거대한 무덤은 무덤 주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고, 크면 클수록 무덤 주인의 권위가 높았다 등등등. 이 소설은 조금 다른 답을 내놓는다. "피라미드는 거대한 묘소임에 틀림없지만, 그걸 만들게 된 원래의 의도에 무덤이나 죽음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집트의 쿠푸 왕은 자신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신하들에게 전한다. 하지만 신하들은 파라오에게 피라미드가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피라미드를 만들게 된 진짜 의도는 백성들의 에너지를 빨아먹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안락한 생활 탓에 사람들은 독립심과 훨씬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되어 권위 일반에, 특히 파라오의 권위에 더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과거의 파라오와 정부 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자는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즉,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건 겉으로 드러낸 핑계일 뿐이고 실은 이집트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지 못하도록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 고안된 건축물이었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크게 지은 게 아니라, 백성들을 크게 괴롭히기 위해 크게 지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지어진 피라미드의 진짜 건축 의도를 알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외계인이 지었다는 설까지 나오겠는가. 그래서 이 소설은 피라미드의 건축 의도를 설명하는 이 지점에서부터 정치적인 우화로 나아가게 된다. 이집트의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 아니라 피라미드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독재자의 심리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심리 변화였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곧 만들어질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피하려고 했다. 피라미드를 짓다가 자신의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데 누군들 그 공사에 참여하고 싶을까.


그런데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건설에는 어떠한 음모가 숨어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수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모와 연루되어 죽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다. 일반 백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음모에 연루될까봐 너무 불안한 나머지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 얼른 공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런 장면들을 통해 대중 선동 정치의 작동 원리를 보여준다. 작은 공포는 큰 공포로 덮으면 된다. 정치인들이 일반 대중들을 세뇌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쿠푸 왕의 심리 변화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면서 쿠푸 왕은 서서히 미쳐간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대피라미드의 주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죽음 앞에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아무튼 독재는 나쁜 거야'라는 단순한 메시지 대신 '도대체 인간이란 왜 이렇게 생겨먹은 존재일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복잡미묘한 소설이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조국 알바니아의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는 나에게 너무 생소한 국가고 그곳의 정치에 대해서는 더욱더 무지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알바니아라는 곳에 대해 궁금해졌다. 이런 게 문학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와 상징을 통해 은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좀더 알고싶지 않느냐고 말이다. 내 대답은 언제나 '예스'다. 알바니아와 이스마일 카다레에 대해 좀더 알고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잉글리시 페이션트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예전에 ‘이동진의 빨간 책방’ 시절에 사두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빨책 선정작들을 열심히 따라가면서 읽었는데 이 책은 도저히 못 읽겠어서 포기했다. 맨부커상 50주년 기념으로 뽑은 ‘골든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지만, 생각보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마이클 온다치의 『워 라이트』에 대한 서평을 보다가 그 책에 흥미가 생겼고 같은 작가의 책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게 떠올라서 『워 라이트』 전에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먼저 펼쳐 들었다. 다행히도 그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게 헛짓은 아니었다보다. 몇 년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예를 들어 이런 서술 때문이다.


【그는 개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 쭈그리고 앉으려다, 균형을 너무 늦게 잡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탁자를 붙잡아서 와인 병을 뒤엎었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맞지? 

그들은 그를 참나무 탁자의 굵은 다리에 수갑으로 붙들어 맸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맞지?” 이 말은 현재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의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탁자를 붙잡고 와인 병을 쏟는 순간 그것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들어온 것이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이 부분이 과거 회상이라는 걸 놓치게 되고, 이탈리아 수도원에 있는 ‘그’가 왜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에 의해 수갑으로 묶였는지 의아해하게 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 대해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세계는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으며 문장은 과거와 현재를 아무런 연결 없이 뚝뚝 넘나든다. 한 가지 사건도 여러 다른 시점에서 접근된다. (…) 온다치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구상할 때 플롯의 뼈대 자체가 없었으며 전쟁 이야기와 추락한 비행기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플롯의 뼈대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혹은 말을 하더라도 주요한 부분들 빼고서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야기들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 맞추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데 어느 순간 이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 그냥 이 상태로 감상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건들을 인과관계에 따라 완벽하게 이해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보여주는대로 읽었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네 명이다. 영국인 환자와 간호사 해나, 도둑 카라바지오, 그리고 지뢰 찾는 임무를 맡은 영국군 공병 킵(본명은 키르팔 싱). 이 넷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우연한 계기로 모이게 된다. 이들의 행동은 때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나는 영국인 환자를 왜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가. 물론 소설 안에서 이에 대한 이유가 나오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도둑인 카라바지오가 겪은 일들, 지뢰를 찾는 킵의 일들도,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소설의 말미에 다다라서, 내가 이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몇 년이 훌쩍 지나버린 시점이다. 그 사이에 각 인물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고, 소중했던 사람이 죽거나 감옥에 갇혔고, 또는 자신의 신체에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평상시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때로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국도 아닌 곳에서 매일 매일 죽음과 맞이하는 상황에 몇 년째 놓여있다. 그런 이들에게 이성적인 인과관계, 논리적인 사고구조를 기대해도 되는 것일까. 파편적으로 툭툭 내뱉어지는 말들 사이에서, 똑같은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거나 감추려는 태도에서 나는 오히려 ‘설명할 수 없음’을 느꼈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을 포기하고 좋았던 장면 몇 개를 뽑아봤다. 영국인 환자에 관한 장면이라 먼저 영국인 환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야겠다. 이 영국인 환자는 사막에 떨어진 불 탄 비행기에서 걸어나온 사람으로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아프리카 북부에서 이탈리아로 이송되었다.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영국인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밖의 것 - 사막의 지리, 사막의 풍습 등 - 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탈리아 수도원에 누워있는 처지가 되어서도 머릿 속으로는 모든 사막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다. 


【"길프 케비르라."

"그래요."

"그게 어디요?"

"키플링 책 좀 줘봐요..... 여기."

『킴』 의 앞장은 소년과 성인(聖人)이 지나간 경로를 점선으로 표시한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인도의 일부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사교 평행선이 나누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산골짜기에 위치한 카시미르.

그는 검은 손으로 누미 강을 따라 훑다가 마침내 위도 23도 30분에 위치한 바다에 이른다. 그는 손가락으로 서쪽 18센티미터 지점까지 더 훑다가 페이지에서 손을 떼고 가슴에 얹는다. 그는 자신의 갈비뼈를 만진다.

"여기요. 길프 케비르. 북회귀선 바로 북쪽, 이집트와 리비아 국경 위에."】


카라바지오가 영국인 환자에게 ‘길프 케비르(이집트의 남서쪽에 있는 고원)’의 위치를 묻자 그는 키플링의 책 『킴』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인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는 책을 가슴에 얹고는 자신의 갈비뼈를 가리켜 바로 이 곳이 길프 케비르라고 말한다. 이 영국인 환자는 땅이나 지도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이렇게 보여주다니.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내가 그들 사이에서 지금 어딘지 모르고 길을 잃었을 때, 필요한 건 오로지 작은 산등성이의 이름, 지역의 관습, 이 역사적 동물의 세포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전 세계의 지도가 제자리로 맞춰지지요.】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산등성이의 이름만 알면 전 세계의 지도가 촤라락 맞춰진다니, 진정으로 광기 어린 지리학자다. 


영국인 환자가 가진 유일한 소지품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인데 이에 관한 묘사도 꽤나 인상적이다.


【그녀는 그의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공책을 집어 든다. 그가 화염 속에서도 가지고 나왔던 책,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이다. 그 위에 그는 다른 책의 페이지를 잘라 붙이기도 했고 자신의 관찰을 적어놓기도 했다.】


【그의 비망록, 헤로도토스의 『역사』 1890년 판에는 지도와 일기, 여러 언어로 쓰인 산문과 다른 책에서 오려낸 문단들이 들어 있었다. 빠져 있는 것은 그의 이름뿐이었다. 그가 실제로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고, 익명에 계급도 소속 대대도 분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언급들은 모두 전쟁 전이나 1930년대의 이집트와 리비아의 사막에 대한 이야기였고 동굴 예술이나 화랑 미술, 그의 작은 필체로 쓴 일기 항목에 대한 얘기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영국인 환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자신의 일기장처럼 썼다. 그래서 원래 두께보다 부풀어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나름 손글씨 다이어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갑자기 전율이 느껴졌다. 사막을 탐험하면서 자신의 인생 책 단 한 권을 가지고 가서 거기에 계속해서 뭔가를 기록해나가는 일,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이 소설 안에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재미있었다.


책에 대한 리뷰인데 영화 이야기도 살짝 써볼까 한다. 이 책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도 상당히 좋다. 책에서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서 나온다. 영화에서 킵의 비중이 상당히 줄어든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어떤 영화 감독이 보더라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장대한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강렬하다. 나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본 이후로 눈밭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의 끝판왕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이고 사막 위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의 끝판왕은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아닐까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고보니 이 소설은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읽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텍스트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에 집중해도 충분히 재미있고, 사막에 대한 텍스트로 읽어도 가치가 있으며, 폭탄에 대한 설명서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킵의 폭탄 제거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런 다면적인 독서 경험을 준다는 점 때문에 골든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사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면서 읽다가 마지막에는 이것은 역시 전쟁에 관한 소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킵이 주요한 인물로 떠오르면서 소설에 굉장한 긴장감을 준다. 그가 폭탄 제거반이라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한 번 읽자마자 다신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느껴지는 책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언젠가는 꼭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바로 재독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몇 년 정도 뜸을 들였다가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수월하게 이 책을 이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마이클 온다치의 책들도 좀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다는 거야.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에서 무엇 하는 거지? 대체 킵은 과수원에서 폭탄을 해체하면서 무엇 하는 거지? 어째서 영국인들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지? 서부 전선의 농부는 나뭇가지를 자를 때마다 톱날이 망가진다는군, 왜인 줄 알아? 지난 전쟁 동안 박힌 총알 파편이 너무 많아서야. 우리가 몰고온 질병 때문에 나무들도 굵어졌고. 군대는 너희들 머릿속에 생각을 주입해 놓고서도 여기 남겨놓고 떠나서 다른 데 가서 문제를 일으키지. 우리는 모두 여기서 함께 나가야 해.”】


【해나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킵과 나는 둘 다 국제적인 사생아야. 한 곳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곳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이지. 평생 우리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거나 거기서 멀어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어. 킵은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거지."】


【사람은 낙타와 같은 속도로 걷죠. 시속 4킬로미터. 운이 좋으면 타조 알을 발견할 수도 있었지요. 불운하다면, 모래폭풍이 모든 걸 지워버릴 수도 있었고.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속 걸었습니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죠. (...)주님이 안전을 길동무로 보내주시기를. 매독스는 이렇게 말했었죠. 작별 인사. 손짓. 오직 사막에만 신이 있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인정하고 싶었습니다. 이 사막 밖에서는 오직 무역과 권력, 돈과 전쟁만이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재미있는 책'이 되기도 하고 '재미없는 책'이 되기도 한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재미없는 책'에서 '재미있는 책'으로 전환된 책이다. 아니, 그냥 재미있는 책이 아니라 너무너무 재밌어서 제자리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이렇게 재미있고,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파이 소설을 어쩌다가 '재미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었으냐 하면 너무 설렁설렁 읽어서 그랬다...(ㅠㅠ) 몇 년 전이었나, 도서관에 들렀다가 기분전환 겸 가볍게 읽어볼까 하고 이 책을 집어와서 침대에 누워서 설렁설렁 읽었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책을 덮고 반납해버렸다. 그것이 나와 존 르 카레의 첫 만남이었다.


얼마 전,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리틀 드러머 걸> 시리즈를 보고 나서 다시 존 르 카레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알라딘에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전자책을 90일 대여 해준다길래 얼른 결제했다. 그렇게 묵혀두다가 며칠 전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열었다. 몇 년 전, 설렁설렁 읽다가 이해도 하지 못하고 덮어버렸던 그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펜이랑 종이를 준비했다. 등장인물의 이름뿐 아니라 동선, 행동, 수상한 점 등을 모두 적어가면서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감격했다. 역시 유명한 책은 이유가 있구나. 그리고 이 책은 침대에 누워서 설렁설렁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구나.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심리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독자 역시도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전의 나처럼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하면서 덮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소설의 시작은 베를린 장벽 검문소. 소설의 정확한 시간적 배경은 아직도 좀 헷갈리는데, 이걸 다 읽고 나서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읽었더니 그 소설 마지막 해설에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시간적 배경은 1962년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 역시도 1962~63년 즈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영국 정보부 소속 첩보원인 '리머스'. 그는 카를 리메크라는 남성을 기다리고 있다. 카를 리메크는 동독 고위층 인사인데 영국 정보부에 정보를 넘겨주고 있다. 그러다가 스파이 행위가 발각되는 바람에 동독 정보부 요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카를은 베를린 장벽 검문소를 지나 서베를린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결국 리머스가 보는 앞에서 동독 인민 경찰들에게 사살되고 말았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영국 측 첩보원들이 하나둘씩 제거되고 나서 카를 리메크라는 거물을 잡아서 겨우 리머스의 커리어가 빛을 보나 싶었는데 결국 카를마저 죽었다. 리머스의 첩보 활동은 완전히 실패했다. 리머스는 베를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없이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리머스는 여전히 자신이 할 일이 남아있다고 믿었다. 이 소설은 그런 리머스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과연 그는 성공했을까?


모든 스파이 소설은 스포를 보지 않고 즐겨야 제맛인데 이 소설은 특히나 그렇다. 결말을 모른 채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느껴지는 전율이 있다. 그렇다고 독자들에게 아무런 떡밥도 주지 않고 '이건 몰랐지? 짜잔~' 하는 식의 황당한 뒤통수는 아니다. 잘 살펴보면 계속해서 어떤 시그널이 있었고, 어떤 조짐이 있었고, 어떤 인물이 근처에 있었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면 혹시나 또 내가 놓친 건 없었는지 궁금해져서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을 완독하자마자 바로 재독으로 돌입했다. 어떤 책을 몇 년 텀을 두고 재독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곧바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끝까지 정독한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두 번째 읽었을 때가 정말 재미있다. 처음 읽을 때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상황을 판단하게 된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적 시점으로 상황을 판단하게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리머스, 피들러, 문트, 리즈 등등)이 가지고 있는 정보량이 다 다르다. 모든 것을 알고 나서, 각 인물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색다른 재미가 느껴진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A라는 인물은 이만큼 알고 이것을 계획했는데, 사실 B는 이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A에게는 이만큼을 숨겼구나, 그리고 A 모르게 C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구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정말 재미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사문회 장면이다. 그 부분을 읽으며, '진심'과 '진실'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떤 일을 '진심'으로 행하기 위해서 '진실'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이 '진심'을 방해하기도 한다. 어떤 회사원이 회사를 위해 전심전력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일한다고 할 때 그 회사원이 가진 건 '진심'이다. 하지만 그 회사가 만약 공공연하게 폐수를 방류하는 악덕 기업이었다는 '진실'을 알게 될 때 그의 '진심'은 갈 곳을 잃는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진심으로 회사가 잘 되기를 빌었지만, '진실'은 바로 그 '진심'에 싸대기를 때리고 고춧가루를 뿌린다.


이 소설은 그런 불편한 진리를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윗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랫 사람의 '진심'이었다. 통제된 정보만을 던져주고 그의 진심을 요구한다. 냉혹한 첩보원의 세계에서는 바로 그 '진심'이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에 그 사람이 몰랐던 '진실'이 드러난다면... 그 사람이 가졌던 '진심'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허상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사이에 얼마나 깊은 강이 흐르고 있는지,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이 소설은 냉전 시절의 이념 대립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은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냉전'이라는 단어에 먼지가 한참 쌓인 지금 이 시절에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고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고 제목에 썼는데 나는 아마도 여러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너무 거대한 이념에 짓눌릴 때, 개인을 보지 않고 전체만을 보게 될 때, 항상 이 책을 펼쳐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느낌과 알아차림 - 나의 프루스트 읽기 연습
이수은 지음 / 민음사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수은 작가의 신작 에세이가 나왔다고 해서 바로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이수은 작가의 독서 에세이라면 무조건 환영이다. <이 책이 시급합니다>와 <평균의 마음>을 재미있게 읽었다. <평균의 마음>은 틈날때마다 다시 펼쳐볼 정도로 좋아하는 책이다. 그런 책들을 쓴 작가니까 신작도 무조건 좋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 에세이는 무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나서 쓴 에세이다.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 책을 앞으로 <시간>이라고 줄여서 표기하겠다.) 나는 어떤 책 한 권을 읽고 리뷰 한 편 쓰는데도 어떻게 써야할까 생각하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데 이수은 작가는 <시간>을 읽고 책 한 권을 써냈다. 물론 <시간>이 보통 책이 아니긴 하다. 한국어 번역본 기준 열세 권 짜리 책이니까.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독후감으로 책 한 권쯤 써내는 일이 가능한 걸까, 생각해보지만 읽는 것도 쉽지 않고 읽고 나서의 감상을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나는 <시간>을 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수은 작가의 글을 워낙 좋아했기에 이 책을 구매했는데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완전히 빨려들어가서 읽었다. 심지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시간>을 다 읽은 것마냥 은은한 감동마저 일었다. 내가 읽어본 많은 책들 중에는 앞부분만 재미있다가 뒷부분에 가서 힘이 빠지는 책들이 꽤 있었다.(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는 책을 고를 때 책의 4분의3 지점을 확인한다고 했다. 그 부분이 작가가 가장 힘이 빠지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게 좋았고, 심지어 뒤로 갈수록 더 에너지가 붙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읽고 나서 이렇게 가슴 충만한 에세이는 참 오랜만이었다. 

이 책을 다 끝내자마자 나도 <시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라딘을 검색했고 민음사판이 가장 위에 떴다. 한 달에 한 권씩 읽어도 1년이 넘게 걸리는 프로젝트다. 내가 과연 읽을 수 있을까? 이수은 작가는 3년4개월에 걸쳐 <시간>을 읽었다고 했다. 한 번 읽고 또 읽고 여러 번 읽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시간 동안 <시간>만 읽은 게 아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관련된 여러 책들, 또 이 책을 쓰기 위해 인용한 여러 철학자들의 책까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은 게 티가 났다. 그리고 이렇게 분량이 적지 않은 책 한 권이 탄생했다.

이 작가는 심지어 <시간>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우울증 혹은 불안장애로 보이는 심리장애까지 겪었다고 고백했다. 병원에 가서『시간』을 읽다가 우울 증상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갱년기장애는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의사가 답하는 장면은 완전히 블랙코미디다. 하지만 이 책 전체로 보면 이수은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이 책 전체에서 느껴진다. 


【나는 치유로서의 자서전을 쓰려는 게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할 말이 아주아주아주 많아서 명치나 목구멍 어디쯤에서 정체가 일어났다. 너무 많은 말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하나씩 순서대로 끄집어낼 수가 없다.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나도 이 책에 대해서 말하려니까 말문이 막힌다. 요약하기도 어렵고 어느 한 부분만 콕 집어서 너무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는 이 책의 총체에 관해 말하고 싶은데 그럴 때 내가 갖고 있는 언어라는 도구가 얼마나 빈약한지 새삼 깨닫는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책은 <시간>을 읽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재미있고, 만약 <시간>을 읽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밖에는 없다.


이 책을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밑줄을 백만 개쯤 그은 것 같다. 외우고 다니다가 어디선가 써먹고 싶은 문장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밑줄 친 부분 여러 개 인용하려다가 다 지우고 그 중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만 인용하려고 한다. 이 책의 제목과도 연관된 부분이다.

【감수성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들에 체계를 부여하는 것은 인식이다. 독서는 느낌에서 알아차림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그것은 중력을 떨치고 날아오르는 높이뛰기처럼 연습을 필요로 한다.】

오호, 독서는 느낌에서 알아차림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 <느낌과 알아차림>을 읽고 느낌에서 알아차림으로 전환했는가? 솔직히 말하면 절반만 YES다. 이 책에서 인용된 여러 학자들의 견해, 그리고 이수은 작가가 펼치는 글의 향연을 반만 따라잡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너무 좋다. 나의 독서 취향과도 연관이 있는데,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너무 개인적인, 예를 들면 '힐링'이나 '위로' 같은 단어가 붙은 에세이나 소설을 잘 못 읽는다. 그런 것보다는, 뭔가 이렇게 지적임이 철철 넘쳐 흐르는 책을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절반은 이해하겠는데 절반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경외하거나 감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이 책이 그런 책이었다.

이제 5월이다. 새로운 달이 시작된다고 해서 딱히 하는 일은 없지만 이번 달에는 뭘 읽어야 할까 그런 생각들을 한다. 그동안 알라딘 보관함에 담아두었던, 밀리나 크레마클럽에 담아두었던 책들은 한 번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온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확실하게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어떤 책들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지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인생은 짧고 2024년도 네 달이나 지나갔고 시간은 앞으로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갈텐데 내 취향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책들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음미하면서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진득하게 붙잡고 싶다. 이수은 작가가 <시간>에 온 마음을 들인 것처럼 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 온통 마음을 쏟고 싶다는 그런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작가는 왜 이렇게 은밀하고 복잡한 서사전략을 채택한 걸까. 이 소설이 무엇을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켜지기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진술되어 있는 소설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알아차리는 역할을 온전히 독자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독하게 열렬히, 꼭 붙잡고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이다. 이것은 총력을 기울여 사랑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켜지기 위해 쓰였다는 문장이 너무 좋다. <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책도 마찬가지일 터. <느낌과 알아차림>을 읽고 나니 진지한 사유, 진지한 독서가 너무 좋아졌다. 나도 이런 깊은 독서를 하고 싶어져서 갑자기 철학 책 쓸어담고...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아무튼 이 책 <느낌과 알아차림>은 너무 좋았다. 어떤 작가가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이렇게 멋진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느낀 그런 아름다움을 나도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데 도저히 표현할 말이 없다. 아, 그래서 프루스트도 그렇게 긴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수은 작가도 독후감으로 책 한 권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