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작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국가적으로 봐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다. 2024년은 나에게 잊지 못할 한 해다.


작년 초중반까지는 매우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때 책을 100권 넘게 읽었다. 이렇게 읽다가는 올한해 200권 넘게 읽는 거 아냐, 라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응, 아냐. 연말에 가족에게 큰일이 생기면서 내 인생은 큰 변화를 겪었다. 언니랑 나랑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그 일은 나의 조용한 나날에 싸대기를 날리듯이 날아들어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싶지 않아 자세히 적지는 않지만...가족이라는 존재는 나를 기쁘게도 힘들게도 한다. 기쁨과 힘듦의 비중이 1:9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작년 한 해, 나는 뭘 했는가.

매일 일기를 적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말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A5 사이즈 노트 한 장(=앞뒷면)을 꽉 채우는 분량이다. 그것도 손글씨로. 그렇게 써놓은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없다. 쓰는 걸로 끝이다. 보지도 않을 걸 왜 쓰는 건지 가끔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기도 하는데 나도 답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쓰기 시작했고, 미리 사놓은 노트랑 펜이 있으니 계속 쓰고 있는 거다.(죽기 전에는 반드시 불태울 거다!!!)


그동안 깨닫지 못 했던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 

나는 미니 사이즈를 좋아한다!!


나의 이러한 성향을 나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미니백을 들고 다니는 어떤 유튜버를 보고서 깨달았다. 작은 것이야말로 내가 인생 내내 좋아했던 것이었음을. 정말이지, 작은 것들이 너무 좋다. 화장품은 작은 소분 용기에 덜어서 쓰고, 우산도 가방도 작고 가벼운 게 좋다. 심지어 밥도 정말 작은 그릇에 먹는다. 배가 고파서 그걸로 두 그릇을 먹을지언정 무조건 작은 그릇이 좋다. 남들은 거거익선이라고 외치는 티비도 냉장고도 작은 게 좋다. 해외에서 살 때 내 하반신 높이의 냉장고로도 잘 먹고 잘 살았다. 나의 이런 성향이 미니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단순 미니멀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걸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작고 가벼운 거라면 여러 개 있어도 좋다.


그리고 여전히 책을 읽는다. 최근 두세 달 동안 미친듯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얼마 전에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만 가지 나의 모습 중에서 책 읽는 나를 가장 좋아한다! 책을 읽는 나야말로 가장 내가 워너비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걸 너무 소홀히 하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책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시 읽어야지. 읽지 않는 나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지금 읽는 책은 두 권. 밀리의 서재에서 <갑골문자> 보고 있고, 종이책으로 피터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을 보고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이런 키워드들은 내가 최근 들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원래도 좋아했는데 작년에 둔황 여행 다녀오고서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중앙아시아에 꼭 가보고 싶다. 가야지, 갈 거다. 이렇게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다보면 꼭 가게 되는 것 같다.


작년말에는 대만에 다녀왔다. 그렇게 바빠 죽겠다면서 할 건 다 했다.(소멸 예정 마일리지가 있어서 억지로 다녀온 느낌이 없지 않지만서도)

대만은 내 취향에 완벽히 들어맞는 여행지는 아니었다. 어딜 가도 일본 같았고(일본에 안 가봤는데도 일본 같았다!) 또 어떤 곳은 한국의 중소 도시 같았다. 같이 간 남편은 '대만은 관광지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보러 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했다. 대만에 다녀와서 기억에 남는 건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라 친절한 대만 사람들이었다. 친절함으로는 손 꼽히게 기억 남는 나라인 건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대만에 다녀온 게 꿈 같다. 나 정말 거기 있었던 게 맞나.


너무 혼란스러웠던 2024년이 가서 좋고, 2025년이 와서 좋다.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좋으니 지긋지긋한 2024년이 얼른 사라지길 빌었다. 잘 가라, 2024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당근으로 물건 하나를 판매했다. 내가 쓰던 물건이 아니라 부모님이 쓰시던 건데 이제 쓸 일이 없다 하셔서 내가 대신 당근에 올렸다. 안 팔릴 줄 알았는데 웬걸, 바로 연락이 왔다. 에누리 가능하냐고 물어보시길래(가격제안 가능하다고 올려놨음) 쿨하게 깎아드렸고 그분께서 구입하시기로 했다. 그제서야 물건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약간 더러웠다. 구매자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이 남아있었다. 그때부터 엄마랑 나랑 들러붙어서 그거 세척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둘이 앉아서 대화 한 마디 없이 묵은때를 벗기던 그 장면이 왤케 웃기던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또 한 번 몸으로 느꼈다. 물건은 사는 것보다 처분하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구입은 쉽다. 클릭 한 번이면 집 앞까지 날아오니까. 그런데 물건을 처분할 때는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특히 나처럼 물건을 아무렇게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면 더 그렇다. 이꼴저꼴 안 보고 분리수거로 내버리면 편한데 멀쩡한 물건을 그렇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당근으로 판매 혹은 나눔하려고 노력한다. 


며칠 전에는 부모님댁 주방 정리를 도와드렸는데 너무너무 멀쩡한 스텐 냄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몇 개는 분리수거로 버렸고, 쓸 만한 것들은 당근으로 나눔했다. 두세 명이 한꺼번에 연락오는 걸 보고 '그래, 안 버리기를 잘 했다. 버렸으면 고철인데 나눔하니까 물건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거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뿌듯했다. 이런 뿌듯함 때문에 당근 나눔을 애용하는 편이긴 한데....그래도 너무 귀찮다. 물건 상태 확인하고, 사진 찍고, 설명 올리고, 모르는 사람이랑 채팅하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귀찮다!!!!


예전에 언니 집에 갔을 때 언니가 자기 집에 당근으로 팔 물건이 산더미라면서 나보고 당근 거래 해주면 용돈 주겠다고 했었는데ㅋㅋㅋㅋㅋㅋ그때 언니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 당근 하다보면 기가 너무 빨린다. 진상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오히려 친절한 분들만 만났는데도, 그 행위 자체가 너무 피곤하다ㅋㅋㅋ. 요즘 부모님댁 정리를 도와드리면서 당근을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고민한다. 당근 할까? 귀찮은데 분리수거로 버릴까? 아까운데 그냥 쓸까? 아니 그래도 당근해야지ㅠㅠ.


나의 결론은 하나다. 물건을 구입할 때 신중하게 생각할 것.


나는 물건 살 때마다 처분 방법을 고민한다. 옷을 살 때는 이걸 사서 실컷 입고 나중에 헌옷수거함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금액대의 옷들만 구입한다. 디자이너 브랜드나 백화점 옷들을 쳐다도 보지 않는 이유다. 전자제품은 최대한 구입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고, 사더라도 무조건 소형을 선호한다. 냉장고도 작은 거, 세탁기도 작은 게 좋다. 크기가 작으니까 팔기에도 좋고, 안 팔려서 폐기물 스티커 붙여서 버려야 하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옮길 수 있으니까 좋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부모님댁 베란다에서 겁나게 무거운 대리석 식탁 상판을 발견했다. 15년 전쯤에, 대리석 식탁 한창 유행할 때 100만 원도 넘게 주고 산 거라는데 지금은 베란다 구석에 쳐박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부모님 두 분이 쓰시기에는 너무 크고, 이 집에 이사 오면서 빌트인 되어 있는 아일랜드 식탁을 쓰다보니 그 대리석 식탁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제는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슬쩍 꺼내봤는데 꿈쩍도 안 했다. 진짜 겁나게 무거웠다. 대리석 대리석 말만 들어봤지 이렇게 큰 대리석 식탁을 옮겨본 적이 없으니 대리석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몰랐었다. 대리석은 정말이지 겁이 나게 무거웠다. 여자 둘이 미친듯이 힘을 쓰면 한 3cm 움직인다.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하던 참에 '빼기' 어플이 생각났다. 무거운 물건을 집에서 밖으로 옮겨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한 게 생각나서다. 그 어플에서 식탁 상판 선택하니까 대충 52,000원이 떴다ㅋㅋㅋㅋ. 100만 원 넘는 대리석 식탁 상판 버리는 것도 열 받는데 돈을 오만 원이나 또 내야 하다니?!!!! 물건은 정말이지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문제다...


내 돈 주고 버리기는 싫어서 당근 나눔으로 올렸다. 곧바로 연락이 왔다. '진짜 대리석이에요?'라고 물으시길래 대리석 맞다고 답했다. 그 분은 다음날 우리집에 방문했다. 나는 없고 엄마만 있었는데 그 분이 식탁 상판 보자마자 '이거 대리석 아니에요. 겉에만 대리석이고 안에는 시멘트예요.'라고 했다고 한다ㅋㅋㅋㅋ. 그래도 가져가시기는 했다고.


나는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식탁 상판이 겁나게 좋은 대리석이라서 일부러 페이크를 치기 위해 이게 사실은 시멘트라고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 혹은 식탁을 판매한 회사가 우리를 속이고 대리석을 입힌 시멘트를 팔았을 가능성.(우리는 15년 동안 그게 진짜 대리석이라고 알고 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그게 나쁜 대리석이든 좋은 대리석이든 무조건 처분하려고 했기 때문에 굳이 그 분이 거짓말을 해서까지 후려쳐서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100만 원을 주고 대리석을 입힌 시멘트를 샀고 그 무거운 걸 15년 동안 이고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한테는 이 이야기가 도시괴담보다 더 무섭다.


이번에 당근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선물해서는 안 된다. 가장 처치곤란한 물건 투탑 중 하나가 바로 선물받은 물건들이다.(나머지 하나는 멀쩡하다는 이유로 대책없이 주워온 물건들이다.) 특히 영양제랑 주류가 문제다. 얘네들은 당근으로 나눔도 안 된다. 그렇다고 못 먹는 영양제랑 주류를 입속으로 털어넣을 수도 없고 하수구에 버릴 수도 없어서 주변 지인들한테 연락해서 필요한 사람을 수소문하고는 있는데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 때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꼭 물어본다. 요즘에는 카톡 선물하기에 찜 기능이 있어서 그거 보고 선물해주기도 한다. 내 인생에 서프라이즈 선물을 하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고, 서프라이즈 선물 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래서 물건 쌓이는 거 싫어하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약간 차갑고 정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미니멀리스트를 내가 싸잡아서 평가할 수는 없고, 나는 좀 차갑고 정 없는 편이 맞다ㅠㅠㅠㅠ.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생화여요...


아직도 당근에 올려야 할 수많은 물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 쓰면서 내일 문고리 거래 약속한 게 생각나서 얼른 문 밖에 내놨다. 인생 편하게 살 거면 다 버리면 되는데 버리기에는 너무 멀쩡한 물건들 때문에 나도 괴롭고 물건도 괴롭다. 지구의 환경은 행복할까...? 


내일도 당근 지옥은 계속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였던....)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엄마가 베란다 창고에서 커다란 박스 두 개를 꺼내왔는데 그 안에 일기장, 상장, 스케치북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이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그동안 이걸 버리지 않고 이고지고 다녔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쓴 일기장이 모두 남아 있었다.(초등학교 5,6학년 때 일기장이 없는 걸 보면 고학년 때는 일기 쓰기 숙제가 없었나보다.)


일기장을 대충 정리만 하고 집어넣었어야 했는데 나는 일기장을 열어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집정리 십계명 중 하나가 '추억의 물건은 절대 들춰보지 말 것'인데 나는 그 금기를 어겼다. 그리하며 어제 밤 늦게까지 초등학교 때 쓴 일기를 읽느라 늦게 잤다. 나름 힘들었고 나름 즐거웠던 초등학교 때의 내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와 단절된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일기장을 보니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가 조금이나마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매니아였다. 이 프로그램의 첫 화가 방영하기 전에 예고편만 보고도 마음을 홀딱 뺏겼었는데 학교 걸스카우트 야영날이랑 딱 겹치는 바람에 첫 화를 본방으로 보지 못 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엄마한테 첫 화를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해달라고 부탁했고 야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1화를 봤다.


나는 혹시나 이 기억이 조작된 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911테러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당신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고 있었다'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전혀 틀린 기억일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 말이다.


나는 혹시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첫 화를 집에서 본 게 아닐까, 걸스카우트 야영 때문에 첫 화를 못 봤다고 나 혼자 착각한 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일기장 안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일기에 걸스카우트 야영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그 날이 바로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첫 화가 방영한 날이었다!!! 야영 때문에 토요 미스테리 극장을 챙겨보지 못 한 게 확실했다.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하다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언니가 탕수육 먹다가 토한 사건도 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이건 내가 기억하는 사건은 아니고 언니가 기억하고 있는 일인데 내 일기장에 꽤나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깜놀했다. 이걸 내가 일기장에 적은 것도 기특하고 그 오래된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언니도 참 대단했다.


엄마가 창고에서 너덜너덜한 박스를 꺼냈을 때는 어우 저걸 왜 아직도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이러면서 살짝 싫어했는데 다 커서 일기장을 보니까 재밌긴 참 재밌다. 이래서 그 당시 선생님들이 일기 쓰라고 닦달을 했나 보다. 그것이 30년 후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재밌는 건 둘째 문제고, 손도 대기 싫을 정도로 낡아버린 일기장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 했다. 가장 좋은 건 사진 찍고 버리는 건데 수십 권의 일기장들을 반듯하게 펼쳐놓고 정갈하게 사진 찍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눈 딱 감고 버려 버리는 게 제일 좋은데 차마 그럴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쌓아두기에는 나의 미니멀리즘 성향이 견디지 못 한다. 아아아 괴롭다.


이래서 미니멀리즘 전문가들이 추억의 물건은 제일 마지막에 정리하라고 하는 거다. 추억의 물건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정리 작업은 올 스톱이다. 지금 다른 것도 정리할 게 많은데 일기장 때문에 다른 것에 손도 못 대고 있다. 거실에 널어놓은 너덜너덜한 공책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유튜브 쇼츠만 보고 있는 거 실화인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d 2024-11-1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 추억을 되살려주는 일기장에 관한 너무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Laika 님의 글 「어떤 기억은 놀랍도록 정확하다」를 읽고 많은 분이 공감하고 추억 속에 잠길 것 같네요. 이런 좋은 글이 나오게 된 건 Laika 님의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네요. Laika 님의 어린 시절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옛 일기장,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또 들춰 보면 어떤 추억과 영감을 불러일으키겠죠. 저 같으면 못 버리겠어요. 종이로 된 기록이 디지털로 된 전자 문서 기록보다 훨씬 오래간다고 하죠. 감사합니다. 건필하시고요. ^^

2024-11-2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원래 종이책을 사지 않는 강경 전자책파인데 전자책이 나오지 않은, 앞으로도 나올 것 같지 않은 책들은 어쩔 수 없이 종이책을 구매한다. 그리고 북스캔 업체에 들고가 PDF로 바꿔버린다.

올 한해 사부작 사부작 사들인 종이책이 상당히 쌓였길래 최근에 북스캔 하러 다녀왔다. 내가 모르는 사이 북스캔 업체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예전에는 사당 쪽에나 조금 있고 다른 곳에는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서울 곳곳에 있다.

나는 총 24권을 가져갔다. 너무 무거워서 캐리어를 끌고 갔다. 가면 우선 책등을 잘라야 한다. 일반 책은 재단비가 1,000원인데 하드커버는 재단비 1,500원을 받는다. 하드커버 책은 무겁기도 무거운데 책등 자를 때도 비싸다.

깔끔하게 잘라진 책들을 가져다주시면 본격적으로 스캔 시작. 내가 갔던 곳은 기본 30분(6,000원)에 추가시간 10분당 2,000원이다. 시간이 곧 돈이다. 초집중해서, 어떠한 오류나 딜레이도 발생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스캔해야 한다.

스캔 속도가 정말 빨라서 정신없이 작업했다. 24권을 다 스캔하고 나니까 약 4n분 소요. 총 50분으로 계산했다. 문자인식(OCR)이나 선명도 높이는 작업을 추가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런 거 다 뺐다. 재단비랑 스캔 비용은 총 36,500원이 나왔다. 24권인데 나름 선방한 것 같다.

예전에는 스캔 끝난 책들을 가게에 버리고 왔는데 이번에는 다시 싸들고 왔다. 어차피 버릴 책이니까 밑줄 팍팍 그으면서 읽고 싶어서다. 스테이플러로 대충 찍어서 휙휙 넘겨가면서 보고 있다. 형광펜으로 밑줄도 마구마구 친다. 어차피 PDF로 바꿔놨으니 험하게 다뤄도 상관없다. 마음이 너무 편하다.


북스캔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실 제일 좋은 건 출판사에서 정식 전자책을 내주는 거다. 그건 폰트와 글자 크기를 바꿀 수 있으니 정말 짱이다. epub파일이 최고다.

이미 PDF로 스캔해놓은 파일이 있더라도 정식 전자책이 나오면 또 산다. 그것이 바로 조지수의 <나스타샤>. 전자책으로 안 나올 것 같아서 북스캔 했는데(나중에 캐나다 여행 갈 때 들고가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전자책이 나와서 바로 구매했다. 이런 데는 돈 써도 아깝지 않다. 전자책이 나오기만 한다면 중복 소비 쯤이야.

두껍고 무거운 책들은 한번쯤 전자책 발간을 고려해주시길. 692쪽에 969g인 <그레이트 게임>이나 704쪽에 1075g인 <내 심장을 향해 쏴라> 같은 책들이 전자책이 있었다면 굳이 책등 쪼개고 스캔하는 생고생은 하지 않았을텐데.

이로써 내가 갖고 있는 종이책은 또다시 제로에 수렴하게 되었다. 제로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딱 두 권을 종이책 상태로 보관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 그것은 바로 <탐험가의 스케치북>과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이건 쪼갤 수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 나의 독서 습관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인스피아 뉴스레터에서 '느림보 독서법'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다. 이 뉴스레터는 느리게 읽는 법과 관련된 책 여러 권을 소개해줬는데 그 중 에밀 파게의 <독서술>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이 유유 출판사에서 <단단한 독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나서 바로 <단단한 독서>를 구입해서 읽었다. 이 책은 이렇게 주장한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천천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이 말은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조언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백미터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올한해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정작 기억나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원인 모를 공허함에 시달리며 이렇게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맞는 건가 의심하고 있을 때 '천천히 읽으라'는 조언을 접하게 되었고 나는 곧바로 나의 독서 습관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그 당시 읽었던 소설이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었다는 거다. 이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1,2부도 재밌었지만 3,4부는 기절할 정도로 재미있어서 새벽 3시까지 책 읽다가 침대에 쓰러져서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느리게 읽기는 개뿔. 등 뒤에서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 이 책은 정말 대박이라고 생각하며 조만간 1권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었던 책은 바로 이것.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권인 <로재나>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 긴 시리즈물을 시작하고 싶어서 <반지의 제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놓고 고심하다가 마르틴 베크를 선택했다. 올초엔가 전자책 적립금 모일 때마다 한 권 한 권 사들여서 이미 시리즈를 전부 구입해둔 상태였는데 안 읽고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 이 책은 '느리게 읽기'에 특화된 책이로구나! 북유럽 특유의 느린 일처리와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합쳐져 소설 속의 모든 일이 그야말로 느릿느릿 진행된다. 국제전화 연결하려면 몇십 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그나마 국제전화가 가능했으니 다행) 다른 나라와 서류라도 주고받을라 치면 며칠에서 몇 주까지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분실이라도 안 되면 다행.)

일처리 속도뿐 아니라 소설 자체의 템포도 느리게 흘러간다. 셜록 홈즈 같은 천재 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주인공이 추리 쇼를 펼치지도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경찰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직업군에 대한 탐구일지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없이 그저 잠복하고 잠복하고 또 잠복하는 순간들을 읽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표적을 정확히 맞혀서 목표물을 획득하는 명사수가 아니다. 그들은 표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들이 어느 쪽을 향해 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살인 사건이라는 바다에서 살인범이라는 돌멩이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그물망을 던졌다가 올려서 뭐가 잡혔는지 살펴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또 그물망을 던지는 어부와 같다. 저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범인 잡겠나, 싶은 생각이 들법도 한데 막상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마르틴 베크에게 조금씩 끌린다. 이 인물에게 왜 끌리는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나는 이 인물에게서 묘한 희망 같은 걸 발견했던 것 같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번뜩이는 재능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쉬지 않고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런 종류의 희망 말이다.

모든 것을 빨리 빨리 해결하고, 안 되는 일에는 후딱 손 떼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온 나에게 이러한 인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소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굴러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쓰여진 것만 같았다. 정답은 느리게 가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살다 보면 꿈도 희망도 없는 시기가 도래하지만 그럴 때에도 살아가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핵심은 꿈이나 희망, 속도 같은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태도'에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리게 읽기'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빨리 빨리 읽으려고만 하다가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뻔했기에 느리게 읽더라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읽는 독서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여러 모로 슬로우 리딩과 찰떡궁합인 책이 아닌가 싶다.

+) 그나저나 <로재나> 읽다가 나폴리 4부작이 생각나서 초반에 좀 가슴이 아팠다. 나폴리에선 경찰이 범인을 잡는 건지 범인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을 잡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로재나>의 배경인 스웨덴에서는 경찰이 몇 달간 공을 들여서 진짜 범인을 잡는다. 똑같은 1960년대인데 나폴리와 스톡홀름은 완전 딴나라 세상이다. 이래서 다들 북유럽 북유럽 하는 건가 싶다. 그런데도 마르틴 베크는 계속해서 우울해하는 걸 보니 복지와 치안만이 해결책이 아닌 건가 싶기도 하고. 우연하게도 비슷한 시기를 다룬 완전히 다른 두 소설을 읽고 나니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