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티비 구독 끝나기 전에 봐야지 봐야지 하고 미루고 있었던 <존 르 카레 : 첩보 소설 제왕의 회고록>을 오늘 봤다. 영어 공부한답시고 영어 자막으로 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자막을 봐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얌전히 한글 자막으로 시청했다.


첫 장면이 정말로 인상적이다. 존 르 카레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책의 가제를 <비둘기 터널>로 붙이기 시작했다는데 그 기원은 자신의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따라서 어느 클럽 모임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남자들이 모여서 비둘기 사냥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클럽 빌딩에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둘기들이 살고 있다. 그 비둘기를 어두운 터널로 데려가 풀어놓으면 그 비둘기는 힘차게 날갯짓을 해 터널을 통과한다. 사람들은 터널을 통과해서 나온 비둘기들을 향해 총을 쏜다. 비둘기에게는 터널의 끝이 일종의 해방구처럼 느껴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터널 끝으로 보이는 찬란한 빛은 죽음이 부르는 손짓이었다. 그렇게 남자들이 한참 유희를 즐기고 나면 비둘기 사냥은 끝이 난다. 살아남은 비둘기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갈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그 클럽 빌딩 옥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또 비둘기 터널을 통과해 죽음으로 날아갈 것이다.


이 다큐에서 존르카레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버지 이름은 '로니 콘웰'이고 존르카레의 본명은 '데비이드 콘웰'이다. 아버지 로니는 대단한 사기꾼이었다고 한다.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살았으며, 기회만 되면 거짓말과 사기를 일삼았다. 존 르 카레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지쳐서 어린 두 아들을 두고 떠나버렸다. 존 르 카레가 성인이 되어서야 어머니와 만났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깊은 교류는 없었던 것 같다.


존 르 카레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 모두에게서 상상력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은 분명해보인다. 어머지는 말년에 요양원에 있을 때 그곳 간호사들에게 자신이 두 아들을 헌신적으로 키운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냈다. 아마도 자신이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그대로 직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해 무엇하랴. 죽을 때까지 개과천선하지 않고 거짓말과 사기를 일삼았던 사람이라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능은 아버지 쪽이 훨씬더 탁월했을 것이다. 존 르 카레는 자신이 그런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듯 하다. 자신은 상상으로 이루어진 거품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상상력을 사기 치는 데 쓰지 않고 소설 쓰는 데 썼으니 정말 다행이다 싶다.


존 르 카레는 스스로에 대한 심리분석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면 아마도 소설을 쓰지 않을 것 같았다고. 그에게 소설 쓰기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존르카레가 첩보 소설을 잘 쓰는 이유가 첩보기관에서 실제로 일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다큐를 보고 나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유년 시절과 아버지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아버지는 돈을 훔치는 빌리든 원장을 협박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아들들을 명문 사립학교에서 교육 받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존르카레는 상류층의 행동과 말투를 배워야만 했다. 존 르 카레 첩보 소설의 기원을 꼽는다면 그런 순간들이지 않을까. 스파이란 겉이 속이 달라야만 하는 사람들인데 존 르 카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존 르 카레는 그레이엄 그린의 말을 인용한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작가에게 유년 시절은 크나큰 자산이다, 이런 말이었다. 그걸 인용하는 존 르 카레의 표정에서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리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 비록 친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고, 아버지를 따라서 항상 도망자 신세로 살았지만 그때의 경험들이 그의 소설 세계의 큰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얼마 전에 읽었던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도 생각이 났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저곳 전학을 다녔던 김영하의 삶이 그의 소설에도 분명히 녹아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에세이를 펴 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 얘기를 상당 부분 털어놓았다.


존 르 카레는 이 다큐에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자주 언급한다.(이 책과 <팅터 테일러 솔저 스파이>, 그리고 <완벽한 스파이>의 스포일러가 다큐에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에 민감하신 분들은 이 다큐를 피하시는 게 좋을지도.) 그는 이 소설에서 딱 하나 후회되는 부분이 있다면 첩보기관이 뭐 대단한 곳인 것마냥 그린 점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다큐에서 여러 번 '중심이 비어있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내면에 뭐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텅 비어있다는 것, 영국 첩보기관 국장의 방에 있는 비밀금고에 엄청난 기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막상 열어보니 금고는 텅 비어있었다는 것. 다큐의 첫 시작인 '비둘기 터널' 장면과 일맥상통하는 허무함이 느껴졌다. 찬란한 빛의 끝에는 죽음이 있고,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한 가운데는 텅 비어있다는 것. 


한동안 존르카레의 소설을 열심히 읽다가 잠시 멈췄는데 다시 이 작가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흥미로운 다큐였다.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하면서도 주변사람 성대모사도 하시고 은근히 매력있는 작가였다. 사기꾼 아버지로부터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을 물려 받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놓은 존 르 카레의 책들을 다시 한번 독파해 나가야겠다. <리틀 드러머 걸>에서 멈춰 있다. 재미없어서 멈춘 게 아니라 봐야할 책이 너무 많아서 멈춰 있는 것ㅠㅠ그래도 이 다큐 너무 재미있게 봐서 다시 존 르 카레 책을 읽고 싶다. 아마존에서 존르카레의 회고록도 영어 킨들 버전으로 사놨는데...그건 또 언제 읽나 싶다. 알라딘에서도 전자책 쌓아두는 버릇을 못 고치고 이제는 아마존에서도 킨들 전자책을 쌓아두고 있으니 병이다 병. 그래도 애플 티비에서 보려고 벼르던 존 르 카레 회고 다큐를 오늘 다 봐서 뿌듯하다. 이제 책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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