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넷플릭스 매니아다. 조금 이름난 작품 중에 안 본 게 거의 없다. 어디선가 '이거 재밌더라'는 말을 듣고 넷플에 들어가 그 작품을 검색해보면 이미 누군가 다 봤다는 표시가 뜬다.(영상 밑의 빨간 줄) 엄마한테 물어보면 몇 년 전에 봤다는 답이 돌아온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영상에 중독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꼭 젊은 세대에 국한된 말도 아니다. 내 주변에서 넷플릭스랑 유튜브를 제일 좋아하고 많이 보는 사람은 우리 엄마니까.


아무튼 엄마가 며칠 전에 <오프로드 인생 여행>이라는 작품을 추천해줬다. 찾아보니 이스라엘 배우 두 명이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촬영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다른 건 모르겠고 '중앙아시아'라는 것에 꽂혀서 나도 어제부터 이 작품을 정주행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을 다 도는 건 아니고 한 달 동안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만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건 딴 소리인데 과거 소련 소속이었다가 독립한 중앙아시아 5개국 나라 이름을 외우는 방법이 있다. 유튜브 채널 '두선생의 역사공장'에서 알려준 방법이다. 왼쪽 하단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투.우.카.키.타'를 외치면 된다. '투우'는 황소 싸움 그 '투우'를 생각하면 잘 외워지고 '카키타'는 그냥 왠지 모르게 입에 착 달라붙는다. '투우카키타'는 순서대로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다. 이 방법을 알게된 후로 중앙아시아 5개국 위치는 확실하게 외우고 있다.(뿌듯)


<오프로드 인생 여행>에 나오는 배우 둘은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들인 것 같다. 아, 참고로 남자와 여자다. 동성 친구가 아니다ㅋㅋㅋ. 어느 작품에서 만나 친해진 것 같은데 각자 배우자가 따로 있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심리상담가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중앙아시아 여행 가서 둘이 사랑에 빠질 확률은 없는 거냐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 나도 이게 제일 궁금했다. 둘은 사랑에 빠질 거였으면 이미 이스라엘에서도 빠졌을 거다, 중앙아시아까지 가서 그런 일이 생길 리는 없다고 답한다. 흐흠. 그렇군. 아무튼 여성 배우(=로템)는 진짜 유명한가보다. 자신은 이스라엘에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룬 것 같다며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하고 싶어서 이걸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저 자신감. 왠지 멋지다. 남성 배우(=리오르)는 원래 지프차 타고 오프로드 여행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로템은 오프로드나 지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같이 온 것 같고. 그래서인지 지금 첫 번째 에프소드를 보고 있는데 둘이 계속 삐그덕거린다. 


사실 둘이 대화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 리오르는 '너는 왜 나를 위로하거나 격려해주지 않아?' 이러면 로템은 '그야 당신이 잘난 척을 하니까 그렇죠' 이런 식이다. 그나저나 둘의 대화는 로템이 리오르에게 존댓말을 하고 리오르는 로템에게 반말을 하는 설정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리오르가 로템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하지만 정말 이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나이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둘이 친구라는 설정이고 이스라엘 언어에는 우리나라 말 같은 존댓말 체계가 없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챗지피티한테 둘이 나이 차이가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억ㅋㅋㅋㅋ12년 차이라네. 리오르가 로템보다 12살 더 많다고. 아 그럼 존댓말로 번역한 것도 인정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갑자기 수긍.


나는 이 프로그램을 통래 이스라엘 수도 텔 아비브를 처음 봤다. 이스라엘은 맨날 파키스탄이랑 전쟁한다는 소식으로만 접해서 어떤 나라인지 잘 몰랐었는데 텔 아비브는 현대적인 도시 그 자체였다. 뭔가 신기했고 놀라웠다. 근데 또 이 글을 쓰면서 네이버를 찾아보니 이스라엘 헌법상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국제법상 수도는 텔 아비브라네. 복잡하다 복잡해. 아무튼 영상으로 처음 접한 텔 아비브는 너무 깔끔하고 현대적인 수도였고,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이랑 전쟁을 하거나 말거나 이란이랑 미사일을 쏘거나 말거나 거기 사는 중상류층 사람들은 편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약간 기분이 묘했다. 한류가 대중화되기 전에, 외국인들이 서울 와보고 깜짝 놀랐던 것과 비슷한 기분일까나. 한국은 북한이랑 전쟁 중인 나라라고 생각했을텐데 막상 한국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살고 있고 서울에 고층 건물들이 우수수 세워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로템이랑 리오르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공항 도착해서 지프차를 수령하고 도로를 벗어나 오프로드 길로 들어선다. 광활한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눈 덮인 설산까지 보여서 너무 예뻤다. 나는 중앙아시아 하면 막연하게 사막화된 황폐한 초원을 상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푸릇푸릇한 풀들로 덮여 있었고 생각지도 못한 설산까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키르기스스탄은 다른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다르게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고 한다. 그 산은 바로 천산 산맥. 천산 산맥은 중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키르기스스탄까지 뻗어 있구나. 너무 예뻤다.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려도 손색 없는 풍경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눈이 작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전형적인 몽골리안형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중심 지점인 중앙아시아에 위치해있는데도 서양권과의 혼혈 느낌이 전혀 없었다. 중국 신장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오히려 키르기스스탄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신장 사람들이 훨씬 더 혼혈 느낌이 강했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그냥 몽골 사람처럼 생겼다. 또 충격인 건 이 사람들의 전통 놀이인 '콕 보루'를 시작하기 전에 '앗살람 알라이쿰' '오, 알라신이시여' 이러면서 기도를 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튀르크계(돌궐계)'로 분류되며 한때 러시아에 속했던 영향으로 러시아어를 쓰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키르기스어(튀르크계 언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겉모습만 보면 전형적인 몽골리안인데, 종교적으로 보면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다고 한다.(물론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


위에 잠깐 언급한 '콕 보루'를 관람하는 장면이 <오프로드 인생 여행> 1화에 나온다. 말에 탄 키르기스스탄 남자들이 살아있는 염소를 공처럼 몰면서 진행하는 경기다. 심지어 경기가 끝나면 그 염소를 먹는다(ㅠㅠ) 리오르랑 로템 둘 다 채식주의자인 것만 봐도 이들의 동물권 감수성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키르기스스탄으로 여행을 왔으니까 전통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이걸 보러 온 거다. 로템은 공황발작이 올 것 같다면서 아예 보지 않았고 리오르는 그래도 이 사람들의 문화라면서 힘들긴 했지만 지켜보기는 했다. 둘의 대화가 재미있다.


리오르: 나는 저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야. 저건 저들의 문화잖아.

로템 저 사람들의 문화고, 50년이나 100년 전에는 당연한 거였죠. 하지만 이젠 달라져야 해요. 용납될 수 없어요.

리오르: 그럼 전통을 어떻게 보존해?

로템: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말을 학대하거나 양을 도살하지 않고도 전통을 지킬 방법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유대 전통에는 남자가 아내를 여러 명 두던 시절이 있었죠. 우리가 그 전통을 고수해요?

리오르: 맞아.(먼 산 보기...)


나는 두 명한테 다 공감이 되어서 재밌었다. 그들의 전통이니까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도 충분히 이해되고, 아무리 전통이라고 해도 모든 걸 다 보존할 수는 없으며 분명히 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진짜 공감이 간다. 둘이 성격이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다. 둘이서 똑같은 것만 얘기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저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라는 리오르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많은 곳엘 다녀봤지만 때로는 낯선 사람들의 행동에서 눈살을 찌푸릴 때가 많았다. 나는 낯선 사람들의 문화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항상 노력했던가?


넷플릭스 중독자, 아니아니 넷플릭스 매니아인 엄마 덕분에 재미있는 작품을 발견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아무리 누가 추천해줘도 내 취향이 아니면 절대 안 보는데 이건 내 취향에 딱 부합해서 정주행하고 있다. 지금 2화 보고 있는데 둘이 또 싸울 각이다ㅋㅋㅋㅋㅋㅋ. 12살 차이 이성 친구인데 이렇게 싸우면서 여행하는 것도 능력이다 정말ㅋㅋ.


심리상담가: 리오르에게 뭐라고 했죠?

로템: 이번 여정에서 제 목표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거라고 했어요. 리오르고 잘 이해했고 우린 차 타고 외딴곳으로 가기로 했죠. 새랑 바람 소리, 그리고 리오르의 목소리만 듣고 싶어서요.

심리상담가: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 말이 있어요. 다른 모든 입자와 멀리 떨어져서 홀로 우주를 떠도는 두 원자에게 남은 운명은 서로 충돌하는 것뿐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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