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의 독서 습관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인스피아 뉴스레터에서 '느림보 독서법'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다. 이 뉴스레터는 느리게 읽는 법과 관련된 책 여러 권을 소개해줬는데 그 중 에밀 파게의 <독서술>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이 유유 출판사에서 <단단한 독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나서 바로 <단단한 독서>를 구입해서 읽었다. 이 책은 이렇게 주장한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천천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이 말은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조언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백미터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올한해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정작 기억나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원인 모를 공허함에 시달리며 이렇게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맞는 건가 의심하고 있을 때 '천천히 읽으라'는 조언을 접하게 되었고 나는 곧바로 나의 독서 습관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그 당시 읽었던 소설이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었다는 거다. 이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1,2부도 재밌었지만 3,4부는 기절할 정도로 재미있어서 새벽 3시까지 책 읽다가 침대에 쓰러져서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느리게 읽기는 개뿔. 등 뒤에서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처럼 미친듯한 속도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 이 책은 정말 대박이라고 생각하며 조만간 1권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었던 책은 바로 이것.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권인 <로재나>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 긴 시리즈물을 시작하고 싶어서 <반지의 제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놓고 고심하다가 마르틴 베크를 선택했다. 올초엔가 전자책 적립금 모일 때마다 한 권 한 권 사들여서 이미 시리즈를 전부 구입해둔 상태였는데 안 읽고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다 읽고 나서 생각했다. 이 책은 '느리게 읽기'에 특화된 책이로구나! 북유럽 특유의 느린 일처리와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합쳐져 소설 속의 모든 일이 그야말로 느릿느릿 진행된다. 국제전화 연결하려면 몇십 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그나마 국제전화가 가능했으니 다행) 다른 나라와 서류라도 주고받을라 치면 며칠에서 몇 주까지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분실이라도 안 되면 다행.)

일처리 속도뿐 아니라 소설 자체의 템포도 느리게 흘러간다. 셜록 홈즈 같은 천재 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주인공이 추리 쇼를 펼치지도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경찰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직업군에 대한 탐구일지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없이 그저 잠복하고 잠복하고 또 잠복하는 순간들을 읽는 것이 나는 너무 좋았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표적을 정확히 맞혀서 목표물을 획득하는 명사수가 아니다. 그들은 표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들이 어느 쪽을 향해 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살인 사건이라는 바다에서 살인범이라는 돌멩이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그물망을 던졌다가 올려서 뭐가 잡혔는지 살펴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또 그물망을 던지는 어부와 같다. 저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범인 잡겠나, 싶은 생각이 들법도 한데 막상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마르틴 베크에게 조금씩 끌린다. 이 인물에게 왜 끌리는 것인가 생각해봤는데 나는 이 인물에게서 묘한 희망 같은 걸 발견했던 것 같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번뜩이는 재능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쉬지 않고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런 종류의 희망 말이다.

모든 것을 빨리 빨리 해결하고, 안 되는 일에는 후딱 손 떼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온 나에게 이러한 인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소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굴러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쓰여진 것만 같았다. 정답은 느리게 가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 살다 보면 꿈도 희망도 없는 시기가 도래하지만 그럴 때에도 살아가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핵심은 꿈이나 희망, 속도 같은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태도'에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리게 읽기'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빨리 빨리 읽으려고만 하다가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뻔했기에 느리게 읽더라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읽는 독서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여러 모로 슬로우 리딩과 찰떡궁합인 책이 아닌가 싶다.

+) 그나저나 <로재나> 읽다가 나폴리 4부작이 생각나서 초반에 좀 가슴이 아팠다. 나폴리에선 경찰이 범인을 잡는 건지 범인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을 잡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로재나>의 배경인 스웨덴에서는 경찰이 몇 달간 공을 들여서 진짜 범인을 잡는다. 똑같은 1960년대인데 나폴리와 스톡홀름은 완전 딴나라 세상이다. 이래서 다들 북유럽 북유럽 하는 건가 싶다. 그런데도 마르틴 베크는 계속해서 우울해하는 걸 보니 복지와 치안만이 해결책이 아닌 건가 싶기도 하고. 우연하게도 비슷한 시기를 다룬 완전히 다른 두 소설을 읽고 나니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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