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이하 "죽은 자")>는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다. 오래된 책이라서 그런 건지, 우리나라에서 존 르 카레의 판매량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그런 건지, 현재 절판 상태다. 다행히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에 <죽은 자> 전자책이 있길래 빌려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조지 스마일리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한다. 스마일리는 뚱뚱하고 키도 작고 아무튼 외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대단한 미인인 앤 서콤이 조지 스마일리와 결혼했을 때 다들 깜짝 놀랐는데 결국 앤은 '지금 조지 스마일리를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미스터리한 말을 남기고 그를 떠났다(몸만 떠난 거지 이혼한 건 아니다). 조지에 대한 이러한 설명들이 지나가고 나면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된다.


<죽은 자>는 스파이 소설이면서 추리 소설이다. 소설 초반에 어떤 남성(=S)이 죽는다. S는 외무부 고위급 직원인데 과거 옥스포드 대학교를 다닐 무럽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이 있다는 투서가 외무부에 날아들었다. 외무부 측에서는 S의 사상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기 위해 정보부 직원을 부른다.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스마일리다. 면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S는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S가 남긴 유서와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S는 스마일리와 면담을 하고나서 매우 분노했으며 그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영국 정보부는 스마일리를 불러서 도대체 면담 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을 하는데 스마일리는 어리둥절이다. 면담은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었으며, S에게 과거 공산당 가입 이력은 현재 당신의 커리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스마일리는 S가 면담 때문에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스마일리와 S의 자살 사건이 얽혀들기 시작한다. 추리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이 그렇듯이 S의 자살 역시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너무나 많다. 자살 몇 시간 전에 '다음 날 아침에 울릴 모닝콜'을 부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S의 자살을 파면 팔수록 괴이한 일들이 끝도 없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존 르 카레의 주특기, 초중반은 사건을 파헤치면서 나름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후반부에 미친듯이 휘몰아치기 전법이 또다시 등장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하 "추운 나라")>도 그랬는데 <죽은 자>도 예외는 없었다. 모든 비밀이 한꺼번에 밝혀지면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구간이 있다. <추운 나라>에 대한 평가가 워낙 좋아서 <죽은 자>에 대한 기대는 살포시 내려놓고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라는 의무감으로 읽었는데 <죽은 자>는 내 기대보다 훨씬 재밌었다. 서구권이나 동구권 가리지 않고 뼈 때리는 대사 날리는 솜씨는 데뷔작부터도 여전했다.


<추운 나라>와 <죽은 자>를 다 읽고 나서 이번 주말 내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테솔스")>를 읽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연달아서 세 권째 읽으니 이 작가의 스타일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존 르 카레의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서로 너무 끈끈하다. 끈끈하다고 해서 이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적대하더라도 끈끈할 수 있다. 어쨌든 굉장히 강렬한 관계가 다수 등장한다.


<죽은 자>에서는 스마일리-멘델, 스마일리-피터 길럼의 관계가 그렇다고 느꼈는데 다 읽고 나면 스마일리-X(혹시나 모를 스포를 위해 X로 처리)의 관계가 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X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X가 스마일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가 <죽은 자>의 줄거리에 있어서 핵심 오브 핵심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추운 나라>에서는 리머스와 피들러의 관계가 아주 핵심적이었고, <팅테솔스>에 다다르면 아주 난리도 아니다. 스마일리-카를라, 스마일리-피터 길럼, 빌 헤이든-짐 프리도 등등 끈끈한 관계가 너무나 많다.


피터 길럼에게는 카밀라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고 조지 스마일리에게는 부인인 앤이 있는데 이런 관계들은 선명하지가 않다. 앤 스마일리에 대한 내 인상은 뭐랄까, 그녀가 유령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실체가 있는데 앤은 소문과 회상으로만 존재한다. 게다가 조지와 앤의 관계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 앤은 문란하고 조지는 그저 견딜 뿐이다. 반면, 위에 서술한 조지 스마일리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설 속에서 굉장히 선명하게 그려지고 그들 사이의 서사도 탄탄하다. 특히 스마일리와 카를라의 대면 장면은 분량이 굉장히 짧은데도 <팅테솔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런 특징들이 소설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 시절 남성들만 드글드글한 영국 정보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튼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연달아 세 권째 읽고 있으니까 웬만큼 무감각한 나조차도 이 남자들의 끈끈함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죽은 자> 후반부...)


그리고 또 하나. 존 르 카레는 소설의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수미상관 서술 방식을 좋아하는 듯 하다. <팅테솔스>는 다 읽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죽은 자>와 <추운 나라>는 처음과 끝이 묘하게 이어진다. <추운 나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베를린 장벽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주인공이자 서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조지 스마일리로 시작해서 조지 스마일리로 끝이 나는 소설이다. 이러한 수미상관 방식은 엔딩 장면을 시작으로 다시 책의 처음을 회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지 <추운 나라>는 책 덮자마자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었고, <죽은 자>를 다 읽고나서는 조지 스마일리가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활약하는 <팅테솔스>로 급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팅테솔스>는 영화를 먼저 봤는데 영화가 사알짝 어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소설도 마찬가지다. 쉽게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은 절대 아니다. 온갖 스파이 용어들이 튀어나오고 여기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작전명을 두 개 세 개씩 갖고 있다.('짐 프리도'가 '짐 엘리스'인데 나중에는 '하예크'로도 나온다. 한눈 팔면 나중에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다.) 머리가 좀 지끈거리기는 하는데, 너무 재미있다! 영화를 먼저 봐서 결말을 아는데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특히 후반부에 휘몰아칠 걸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심장이 떨린다. 이래서 아는 맛이 무섭다고, 존 르 카레 소설의 후반부는 숨도 못 쉬고 보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글은 원래 <죽은 자>의 리뷰로 쓰기 시작했는데 <죽은 자> 말고도 <추운 나라>, <팅테솔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페이퍼로 바꾸게 되었다. 아직 <팅테솔스>도 다 안 읽었는데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얼른 <팅테솔스> 읽고 그 뒤로 이어지는 카를라 시리즈도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나저나 존 르 카레의 데뷔작이 절판인 것도 아쉽고, 존 르 카레 전집이 없는 것도 아쉽다. 몇십 년 전에 쓰여진 소설을 여전히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독자가 있으니 어떤 출판사든지 전집 출간을 좀 고려해주면 좋겠다. 아무튼 열심히 읽고 열심히 리뷰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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