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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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이란 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 종지부를 찍게 마련이다. 삶은 열 달이라는 산모의 진통을 통해 그 시작점을 예상할 수 있지만 마침표를 찍는 죽음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사람들은 사신(死神)혹은 저승 사자를 두어 그 누군가가 준비한 죽음이라는 개념을 만든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기 일주일 전에 파견되어 데려갈까 말까를 판단한는 사신 치바. 늘상 비를 몰고 다니는 그는 일주일 후 죽을 운명인 사람을 만나 그의 죽음에 대한 가부를 판정한다. 작가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를 들여왔지만 단문에 가까운 짧은 문장들과 담백한 캐릭터들을 통해 삷과 죽음의 현실적으로 이야기한다.


간결한 문체로 이루어졌으나 다양한 캐릭터들이 연작과 같은 구조로 소개되어 있다. 교묘하게 쓴 시간의 트릭으로 결국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난 만족감을 독자에게 준다. 날이 궂고 의욕이 저하될 때 본 이 소설은 의욕 상실의 밑바닥까지 사람을 끌어내려 고요하게 만든다. 그 끝에 사신 치바가 햇살을 본 것처럼 독자들도 꿈틀하고 느껴지는 의욕이 있다. 최소한 글을 쓰고 싶은 의욕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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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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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대형 스타가 악플 하나에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목숨 보다 귀하게 여긴 자식들을 뒤에 남기고서 말이다. 어떤 이는 강남의 한 고시원에 불을 놓고 무차별하게 칼을 휘둘렀다. 여섯 명 이상에게 상해를 입힌 묻지마 살인이다. 우리 같은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1959년 미국의 한 시골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은 작가 '트루먼 카포티'에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고작 40달러를 훔치기 위해 네 명의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인 범인들을 트루먼 카포티는 취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발생한 이 사건은 40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더 이상 뉴스로서의 가치는 없다. 그러나 트루먼 카포티가 가한 문학적 세례가 이 책에 시의성을 초월한 영속성을 지니게 했다. 오늘 날에는 흔한 형태가 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새로운 언론보도의 방식으로 알려진 '뉴 저널리즘'의 시작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문학적인 기법을 활용해 보도하는 스타일이 바로 뉴 져널리즘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동네의 변두리를 돌며 시작한 그의 취재는 사건의 캐릭터 속에 깊숙이 잠입하며 어느 덧 소설처럼 이 사건을 읽게 만든다. 범인과 경찰의 멀고 먼 접점이 어떻게 가까워질지 마음을 졸이다 보면 어느 새 작가의 시선은 범인의 심리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떠난 배우와 묻지마 살인을 한 피의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화산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부글부글 발화되길 기다리는 용암은 어느 운명적인 한 순간 돌발적인 동기로 인해 외부로 분출하며 폭발했을 것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그 사건이 외부로 불거진 폭발만 보았기에 이해할 수 없었고, '묻지마' 살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는 끓어오르는 용암이 있었고 트루먼 카포티와 같은 저널리스트는 인간을 이해하고픈 욕구가 있기에 그 속을 들여다보았던 모양이다.

좋은 문학은 인간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도와준다. '인 콜드 블러드'는 바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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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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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것은 신나지만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세상에 없던 스타일을 만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 아이디어에 열광하고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새로운 스타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이 비를 타고 반짝이며 떨어지는 황홀경의 경험이라고 할까. 걱정과 근심을 모두 버리고 소설의 환타지에 빠지게 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남자 대학생이 선배의 언약식에서 본 클럽 여자 후배에게 꽂힌다. 그래서 그 후배를 사모하며 쫒아다니기 시작하는데 그후 전개가 황당하다. 황당하니까 우리는 환타지라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매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독특한 스타일과 통통 튀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의 향방을 궁금하게 만드는 흡인력을 놓치지 않고 있다.


예전 대학 시절 우리의 연애를 연상케 하며 기묘하게 향수를 자극하는데, 여기에 갖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따라온다. 책 읽는 동안, 한껏 젊어진 느낌으로 따뜻한 솜이불 속에 들어 앉아 온돌방의 호사를 누리는 느낌이다. 물론 글을 읽는 재미로 몸에는 약간 달뜬 열기가 있다, 이 재미있는 소설을 남에게 잘못 권했다가는 독특한 스타일 만큼 욕먹기 싶상이지만 그래도 한번 권해보련다.


"책은 짧아 읽어봐 아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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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앗 - AJ공동기획신서 2
김서영 지음, 아줌마닷컴 / 지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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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처도 시앗 앞에서는 돌아선다'란 말이 있다. '시앗'은 첩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아무리 부처의 덕성을 지닌 본처도 시앗의 존재를 좋아할리 없다는 뜻이다. (부처상처럼 무거운 돌덩어리를 연상해도 된다)

가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십오 년을 사귀어 온 불륜녀가 있음을 알았다. 조강지처는 그  후 처음 삼년 간은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앗'과 남편을 징계하려 애썼다. 남편과 '시앗'을 헤어지게 하려했다. 그럼에도 둘의 관계가 이어지자 남편과 시앗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시앗'은 조강지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꼬리를 치기 시작하고 남편은 '산보'라는 핑계로 시앗의 집에 대놓고 방문한다. 철철이 미국이다 유럽이다 명승지로 남편이 시앗과 여행가는 것을 눈감아준다. 칠거지악의 족쇄가 채워진 조선시대도 아닐 텐데 조강지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짧고 간결한 문체로 남편과 시앗이 노는 꼴을 관찰한 그녀의 산문에는 그 둘이 떠나간 빈자리에 25년의 세월만큼 큰 그녀의 상실감이 느껴진다. 그 글 바닥에는 소리 없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다.

이 글이 실화인만큼 많은 사람이 저자에게 질문을 한 모양이다. '왜 이혼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가정이라는 것, 본처라는 자리가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자리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저자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나는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 형벌을 주기위해 저자가 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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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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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것을 인생의 축복이다. 나는 소설 [달을 먹다]를 읽고 오랜만에 이런 축복의 세례를 다시 받았다. 축복의 세례에 더해 더욱 포만감을  느끼는 것은 한국 문학만이 줄 수 있는 모국어의 성찬을 맛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말과 우리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것도 현대가 아니라 역사 속의 배경을 택해  도발적인 형태의 실험을 해 새로운 맛을 보여주었다. 작가의 재주에 놀랄 다름이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라다. 여기저기서 본 듯한 짜깁기한 소설이나 대본에 지쳐가는 요즈음인데 김진규라는 작가는 데뷔작에서 남들이 닿지 못하는 대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나 드나들면서 문학의 주변을 어지럽혔는데 하늘의 소명을 받은 작가의 손길은 이런 걸작으로 뽑는 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수 많은 문학의 범재들에게 낯 부끄러운 자극을 주었다.

이 글은 사극이다. 영 정조 시대의 개혁과 보수가 충돌할 무렵의 삶이 이 글의 배경이다. 너무나 잘나 호색으로 일생을 보내는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묘연이 시집가고 자식 희우를 낳는다. 그렇게 발생한 인간관계와 인과관계가 이 소설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이해와 오해의 간극'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작가가 만들어 낸 공감의 장이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조상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핏줄로 흘려 내려온 공통 분모가 우리의 마음 속에 흐르고 있다. 어느 집안에나 은밀히 속삭이는 불륜의 애정사가 있을 것이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패륜의 과거가 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나 희망 때문에 생과 사를 넘다 드는 불행한 선택을 한 어두운 비밀이 있다. 작가는 그런 우리에게만 허용되고 속삭일 수 있는 규방의 이야기를 재료로 버무려 놓았다. 정련된 언어의 향기에 취해 있지만 이야기의 진솔함에 독자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우리도 모르게 고답적이라고 형식적이라고 낙인 찍어 놓았던 우리 선조의 삶은 사실 이러했을 것이다. '공자왈 맹자왈'을 외아리며 신분과 계급에 옥죄인 삶이 그들에게 주어졌겠지만 그 속에서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비명을 외치기도 했을 것이고 입을 틀어 막으며 참기도 했을 것이다.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지만 사랑 받을 수 없는 삶이 지금도 있듯이 그 시절도 그러했을 것이다. 백년 전에도 오백 년 전에도 사람은 있었고 사랑을 했고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삶이 사서(史書)에 남은 몇 줄의 기록안에 갇혀 있었다. [달을 먹다]는 그 갇혀진 삶들에게 자유를 주고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우리의 역사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정련된 언어, 이야기의 개성, 글의 도발적인 구조에 더 없이 만족스럽다. 차마 TV나 영화로 옮길 수 없는 소설의 장르적 정체성마저 챙기고 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한 없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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