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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이 있는가 하면 그저 참을 수 없어서 치는 몸부림이 있다.
P.19 「타오르는 마음」 _ 비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성이나 도덕성 같은 것을 넘어선 진짜 생존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끝까지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의 몸부림들은 정말 답을 구하기 위한 과정인 것일까.
단지 바꾸거나 부숴버릴 수 없는 어떤 한계 앞에서 그저 생짜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책장을 펴자마자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와락 겁을 먹을 만큼 그 질문들은 아프고 날카로웠다.
서로의 민낯을 보는 일은 매번 그렇게 불편하고 힘이 든다.
그럼에도 그 속에 담긴 나의 민낯을 꼿꼿이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얼굴을 한, 나의 감춰두었던 부끄러움의 민낯을.
나도 그저 그런 용기 없고 시시한 '사람'이라서.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침묵하는 사람이라서.

남은 이들은 느리고 뜨거운 기후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모호하고 둔중한 일상에 맞춰 자신의 삶을 적응시켜왔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눙치고 짐작하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거짓과 진실들. 주민이 300명 안팎인 작은 마을에서 속내를 잘못 드러내거나, 상대의 비밀을 섣불리 들췄다가는 그곳에서의 삶이 불가능해지는 수가 있었다.
P.16 「타오르는 마음」 _ 비말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작은 마을 '비말'
그곳은 황폐하고 넓은 평원과 뜨거운 태양, 건조한 바람을 품고 있는 곳이다.
부지런함만으로 생존을 일굴 수 없는 땅에서 근근이 삶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겐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간절했다.
그런 그들 앞에, 어느 날 발견된 불에 탄 시체들.
기괴하게 죽음을 맞이한 시체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불특정 다수의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살인이 왜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죽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의심을 키웠고, 두려움과 무력감에 대해 알아나갔다. 그 배움은 그들을 미치게 했다. 마을은 그 사건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언론은 상처받은 마을이 얼굴을 감싸려 들자 그 손을 잡아 뜯었고, 타지 사람들은 그 맨 얼굴을 보겠다며 몰려들었다.
P.22~23 「타오르는 마음」 _ 비말
처음은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알고자 하는 욕구가 누군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한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상대방의 상처를 헤집는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지금 헤집는 것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관음의 갈증을 채우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너무 쉽고 빠르게 그들은 잔인해져갔다.
살인 사건에는 가해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피해자의 슬픔 따위는 손쉽게 외면해 버리고, 모두들 관음증 환자들처럼 열광한다.
그리고 그 열광이 살인마를 찾는 축제로까지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돈의 기근에 시달렸고 누구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인마 하나가 나타나 사람 몇을 죽이는 것으로 마을에 돈을 가져다줬다.
P.26 「타오르는 마음」 _ 비말
그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희망 같은 생존이었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도덕성을 갉아먹고, 죄책감 같은 것은 내다 버린 채, 생존을 선택했다.
생존이라는 이름은 근사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스스로를 덜 나쁜 사람처럼 여겨지게, 어쩔 수 없었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생존'이라는 단어가 소비되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살인마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겨날 만큼 생존이 간절했었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 누구라고 허세를 부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멈춰진 듯, 소멸의 길로 들어선 낡아가는 마을에서 그들은 피해자를 버리고 살인마를 선택했다.
자신의 어딘가가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팔 게 없는 사람들은 늘 자기가 원치도 않는 걸 팔아야 해, 뭔지도 모르는 걸 팔아야 해,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으니까. 자식의 죽음을 파는 어머니가 있었고, 살인마의 범죄를 파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먹고 자라 온 우리들이 있었다.
P.135 「타오르는 마음」 _ D-day 올드맨
서글프다.
아무것도 팔게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팔아야 하는 삶이라니.
그 속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일그러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처를 팔고 있는 사람들이 멀쩡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이 글의 주인공인 화자 또한 마음속 어딘가가 뭉텅 잘려나간 사람이다.
9년 전 살인사건이 있던 밤, 그 사건을 유일하게 목격한 어린아이가 마음속 얼룩 하나 없이, 뾰족한 모서리 하나 없이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음속 얼룩은 자꾸만 퍼져서 온 마음을 까맣게 물들이고, 뾰족한 모서리는 자꾸만 스스로를 찌르는 무기가 되어 그녀를 괴롭혀왔다.
그녀가 내뱉은 말들은 미친 사람의 허언으로 메아리칠 뿐이었다.
외면도, 무모한 부딪힘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다.
"너는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범인을 잡고 싶어 하지 않아. 그저 이 상황이 견딜 수 없고, 무섭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게 맞든 틀리든 그저 달려나가겠다는 거야. 그렇게 늘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해."
P.222 「타오르는 마음」 _ 너희들이 범인을 잡길 바라
이제 그녀는 진실을 알고 싶다.
정답을 찾아야만 한다.
9년 만에 다시 시작된 살인의 범인을 그녀는 꼭 잡고 싶다.
세상에 알리고 싶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그렇게라도 구원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주인공과 살인마의 시점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쓰여있다.
심지어 범인을 초반에 알려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범인이 누구인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 두 마리 토끼를 이 책은 다 잡았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따라갈 때 느끼는 당혹감과 사건 자체의 반전만으로도 충분히 책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게 더 오래 남은 것은, 살인범이 누구인가가 아니었다.
살인범이 A든 B든 C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진실은 밝혀졌고, 궁금증은 풀렸지만, 그 마을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것보다 더 쓸쓸한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인보다 더 무섭고, 더 잔인하고, 서글픈 우리들의 민낯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만 같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옌렌커의 딩씨 마을의 꿈을 떠올렸다.
건조하고 부서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매혈을 하던 딩씨 마을의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보여서였다.
책장을 덮고도 허허롭고 메마른 풍경이 잊히지 않았는데, 이 책 또한 내게 쓸쓸한 풍경을 남겼다.
사람들의 내면이 부서져가는 모습은 누가 그려도 이렇게 슬픈 일인 건가 보다.
무겁고 쓸쓸한 돌 하나가 또 마음에 남겨졌다.
곧 검은 구멍 같은 아침이 올 것이다. 도로변에 뒹구는 빈병 같은 아침이 올 것이다. 해안가에 떠내려온 죽은 고래 같은 아침이 올 것이다. 그 아침이 너무 길고 지루해서, 죽음에 이르지 못할 타격만을 내게 줄 것이다. 언제까지 그 짓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그 비참함을 언제까지 견뎌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아침을 한 번쯤은 더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P.409 「타오르는 마음」 _ 위도, 길고 큰 하품
툭툭 던져둔 문장들이 시시 때대로 나를 찔러댔다.
건조하고 시니컬한, 한없이 무겁고 서글픈 문장들이 나를 감탄하게도, 우울하게도 만들었다.
덕분에 많은 생각들을 하고 또 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끄럽기도 했다.
관심이 세상을 바꾸고,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그 관심이 때로는 누군가를 할퀴고 상처 입힌다.
어디까지가 관심이고 어디서부터 폭력이 되는 건지, 그 모호한 경계를 우리는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까.
생존을 위하여 나는 나의 무엇을 팔고 있을까.
무엇을 내어주고 삶을 영위하고 있을까.
슬픈 건 우리들 대부분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언가를 팔아치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영혼이 가난해져가고 있다.
살면 살수록 마음이 허기진 이유가 어쩌면 나도 모르게 팔아치워버린 '무엇'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 엉엉 울고 싶어진다.
그렇게 자꾸만 고갈되어 가는 '어떤 것'으로 인해, 점점 더 침묵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들.
깨트리지 못해서 도망 쳐버린 순간들.
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 켜켜이 쌓여 우리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든다.
눈 감으면 안 되는 것들을 보며 눈 감게 만들고, 침묵하면 안 되는 일들에 침묵하게 만든다.
우리가 조금씩 그렇게 상실해버린 어떤 것들에 대해,
끝끝내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들에 대해,
이 책은 말하고 있다.
_ 삶의 부조리 앞에 나는 어째서 그리도 온순했던가.
침묵이 부끄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