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 어이없고 황당하고 늘 후회하면서도 또 떠나고야 마는
한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평점 :

'여행'이란 나에게 낯선 단어다. 동경의 단어이기도 하고.
나와는 몇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매번 '여행'이라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익숙한 곳,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말들을 사랑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설 말들에 공포를 느꼈다.
호기심이나 열망 대신, 겁을 내고 뒷걸음치기 바빴다.
그 덕에 나는 '진짜 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 덕에 우리 아이들도 '여행'이라고는 모르는 아이들로 자라나는 중이다.
외국 여행이 국내 여행보다 더 저렴해 너도나도 동남아 여행쯤은 한 번은 다 다녀온 요즘 같은 시절에 비행기 타보는 게 소원인 아이들이다.
심지어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이 지척에 있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
우리 아이들은 내내 하늘 위를 나는 비행기의 배만 보며 자랐다.
이런 자각이 들 때면 당장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미치겠다.
내일이라도 당장 비행기 표를 끊어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삶에서 외출할 줄도 모른다.
갑갑한 일상에서 며칠쯤 외출했다 돌아온다고 내 일상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나는 익숙한 것에서 멀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내내 다른 이의 여행에 귀를 세운다.
그가 보고 온 것, 그가 겪고 온 것, 그가 깨달은 것.
그런 것들을 허겁지겁 주워 먹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한 번도 겪지 못한 일, 일상에서 깨닫기 어려운 것들.
그런 것들에 매료된다.

그러는 사이에 터널시야증후군에라도 걸린 듯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졌고 세상사를 바라보는 각도는 고정된 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미 전철의 문은 닫혀버렸다.
이제 전철 안의 상황에 좀 적응해보려 했더니 떠밀려 내려야 했다. 우리를 텅 빈 플랫폼에 버려둔 채 전철은 떠나 버렸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p. 070
예전에 여행서만 주야장천 읽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테두리 밖으로 나갈 줄 모르는 고지식한 인간이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낯선 숨을 쉬는 일.
그게 여행서를 읽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일으키는 낯선 바람을 맞으면서 잠시 일상을 잊곤 했다.
혼자서도 떠나지 못했던 여행을 갓난 아이를 데리고는 더더욱 떠날 수 없었던 시절에 매일 집에서 육아에 지친 채 마음은 그들을 따라 낯선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때는 진짜 '여행서'라고 불릴만한 책들이 많았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게 좋았는지.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일상 같은 이야기부터 여행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 생각들, 여행의 자잘한 팁까지 빽빽하게 나열한 책들.
그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음식이 어떤 맛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저 설명해주는 대로 그들을 따라 걸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은 여행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여행 에세이'.
'에세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여행서의 느낌은 확 달라졌다.
이제는 그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보고, 즐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이 고민하고, 깨닫고,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들.
여행의 '장소'가 아닌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들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런 책들이 더 좋았다.
그럴 수밖에.
어차피 나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 나라를, 그 도시를, 그 건물을, 그 음식을 .... 떠올릴 수가 없는 걸.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들의 생각을, 고뇌를, 성찰을 듣는 게 나았다.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성장하고, 깨우치고,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그 후부터 내가 사고, 읽은 여행 에세이들은 '여행' 그 자체보다 '감정'에 치중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지극히 에세이적이고, 지극히 감성적인 글들.
이 책도 그래서 선택했다.
한수희 작가의 그전 에세이들을 두 권이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세이 작가인 그녀가 들려주는 에세이스러운 여행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했으니까.
한데 이 책은 너무 '여행서' 같아서 낯설었다.
그래, 정말 '여행'이야기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어온 수많았던 여행에 대한 이야기.
( 물론 여행을 하는 동안, 혹은 여행을 통해서 그녀가 깨달은 이야기들도 책 곳곳에 숨어있지만 )
심지어 여행서인 주제에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파격적이다.
내가 알던 여행서는 대부분 사진을 팥앙금처럼 달콤하게 품고 있었는데, 이 책은 팍팍하게도 글 속 어느 장소도 보여주지 않는다.
내 나라도 여행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치명적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태국이, 방콕이, 인도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다.
건물을 설명하고, 건축양식을 알려줘도,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티브이에서 얼핏 봤던 전혀 다른 모습의 그 나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집 밖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의 한계랄까.
서글펐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글의 나열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순이거나 장소순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같이 동행한 사람에 따라 나뉘거나 '한 번의 여행'을 기준으로 잡는 게 보통일 텐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모든 여행이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시간과 장소, 인물과 여행했던 시기마저 두서없이 등장한다.
챕터를 나눈 데는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앞에 등장했던 여행이 다시 또 등장하고 또다시 등장하자 왜 한 번의 여행을 이렇게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잘라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건지 의문스러워졌다.
어떤 카테고리로 그 여행의 조각들이 낱낱이 흩어져 시간과 장소를 망각한 채 제멋대로 뒤섞인 건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