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 어이없고 황당하고 늘 후회하면서도 또 떠나고야 마는
한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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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나에게 낯선 단어다. 동경의 단어이기도 하고.
나와는 몇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매번 '여행'이라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익숙한 곳,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말들을 사랑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설 말들에 공포를 느꼈다.
호기심이나 열망 대신, 겁을 내고 뒷걸음치기 바빴다.
그 덕에 나는 '진짜 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 덕에 우리 아이들도 '여행'이라고는 모르는 아이들로 자라나는 중이다.
외국 여행이 국내 여행보다 더 저렴해 너도나도 동남아 여행쯤은 한 번은 다 다녀온 요즘 같은 시절에 비행기 타보는 게 소원인 아이들이다.
심지어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이 지척에 있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
우리 아이들은 내내 하늘 위를 나는 비행기의 배만 보며 자랐다.
이런 자각이 들 때면 당장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미치겠다.
내일이라도 당장 비행기 표를 끊어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삶에서 외출할 줄도 모른다.
갑갑한 일상에서 며칠쯤 외출했다 돌아온다고 내 일상이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나는 익숙한 것에서 멀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내내 다른 이의 여행에 귀를 세운다.
그가 보고 온 것, 그가 겪고 온 것, 그가 깨달은 것.
그런 것들을 허겁지겁 주워 먹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한 번도 겪지 못한 일, 일상에서 깨닫기 어려운 것들.
그런 것들에 매료된다.

 

 

그러는 사이에 터널시야증후군에라도 걸린 듯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졌고 세상사를 바라보는 각도는 고정된 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미 전철의 문은 닫혀버렸다.
이제 전철 안의 상황에 좀 적응해보려 했더니 떠밀려 내려야 했다. 우리를 텅 빈 플랫폼에 버려둔 채 전철은 떠나 버렸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p. 070

 

 

 예전에 여행서만 주야장천 읽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테두리 밖으로 나갈 줄 모르는 고지식한 인간이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낯선 숨을 쉬는 일.
그게 여행서를 읽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일으키는 낯선 바람을 맞으면서 잠시 일상을 잊곤 했다.
혼자서도 떠나지 못했던 여행을 갓난 아이를 데리고는 더더욱 떠날 수 없었던 시절에 매일 집에서 육아에 지친 채 마음은 그들을 따라 낯선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때는 진짜 '여행서'라고 불릴만한 책들이 많았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먹고, 어떤 게 좋았는지.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일상 같은 이야기부터 여행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 생각들, 여행의 자잘한 팁까지 빽빽하게 나열한 책들.
그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음식이 어떤 맛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저 설명해주는 대로 그들을 따라 걸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은 여행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여행 에세이'.
'에세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여행서의 느낌은 확 달라졌다.
이제는 그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보고, 즐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이 고민하고, 깨닫고,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들.
여행의 '장소'가 아닌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들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런 책들이 더 좋았다.
그럴 수밖에.
어차피 나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 나라를, 그 도시를, 그 건물을, 그 음식을 .... 떠올릴 수가 없는 걸.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들의 생각을, 고뇌를, 성찰을 듣는 게 나았다.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성장하고, 깨우치고,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그 후부터 내가 사고, 읽은 여행 에세이들은 '여행' 그 자체보다 '감정'에 치중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지극히 에세이적이고, 지극히 감성적인 글들.
이 책도 그래서 선택했다.
한수희 작가의 그전 에세이들을 두 권이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세이 작가인 그녀가 들려주는 에세이스러운 여행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했으니까.

한데 이 책은 너무 '여행서' 같아서 낯설었다.
그래, 정말 '여행'이야기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어온 수많았던 여행에 대한 이야기.
( 물론 여행을 하는 동안, 혹은 여행을 통해서 그녀가 깨달은 이야기들도 책 곳곳에 숨어있지만 )
심지어 여행서인 주제에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파격적이다.
내가 알던 여행서는 대부분 사진을 팥앙금처럼 달콤하게 품고 있었는데, 이 책은 팍팍하게도 글 속 어느 장소도 보여주지 않는다.
내 나라도 여행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겐 치명적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태국이, 방콕이, 인도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다.
건물을 설명하고, 건축양식을 알려줘도,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티브이에서 얼핏 봤던 전혀 다른 모습의 그 나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집 밖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의 한계랄까.
서글펐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글의 나열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순이거나 장소순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같이 동행한 사람에 따라 나뉘거나 '한 번의 여행'을 기준으로 잡는 게 보통일 텐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모든 여행이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시간과 장소, 인물과 여행했던 시기마저 두서없이 등장한다.
챕터를 나눈 데는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단순한 사람이라 앞에 등장했던 여행이 다시 또 등장하고 또다시 등장하자 왜 한 번의 여행을 이렇게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잘라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건지 의문스러워졌다.
어떤 카테고리로 그 여행의 조각들이 낱낱이 흩어져 시간과 장소를 망각한 채 제멋대로 뒤섞인 건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너무 간절히 원해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싶어 한다. 살이 조금만 더 빠지면 나도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코를 조금만 더 세우면 될 수 있어. 눈을 키우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발끝을 들고, 거울을 보며 연습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친들 타고난 미모와 몸매와 매력의 소유자가 혜성처럼 등장해 그들이 간절히 원하던 그 자리를, 어떤 노력으로도 얻기 힘든 그 자리를 순식간에 낚아챈다.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 가혹해진다. 비교하고 자책하는 나날들의 연속.
끝내 그들은 갈망과 매력의 자리를 바꿔버린다. 슬프게도 그 자리가 원하는 기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매력은 쇼윈도에 너무 오래 걸어둔 옷처럼 색이 바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언제나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며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아, 내가 그 느낌을 모를 리가 없지.
p.090

 

 

작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의 작가는 몹시 까칠하고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 작가의 에세이가 두 권이나 집에 있고, 한 권은 읽지 않았지만 나머지 한 권은 부분 부분 읽었기 때문에 내가 알던 그녀와 이 책 속의 그녀 사이에 괴리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내 속에도 소심한 나와 쿨한 나와 까칠한 나와 유순한 내가 공존하며 살아간다.
한데 에세이에서 보여준 그녀의 단면과 이 여행서에 등장하는 그녀의 단면이 너무 다르게 보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세이를 정독했다면 전혀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뭐든 무식이 죄다. 왜 안 읽은 거지?)

그만큼 이 책이 솔직하고 거침없다.
타인에게 비춰질 나의 모습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속에 살아있는 나의 수많은 단면들을 너무 솔직하고 대책 없이 꺼내 놓는다.
책 속에 쓰여진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실제 그녀가 여행을 하면서 입 밖으로 다 내뱉지 않았을 테다.
지난 여행들을 한데 묶어 떠올리는 형태인 이 책을 쓰는 동안 그녀는 제 속에 숨어있던 감정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신랄하게 뱉어낸다.
어떤 면에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나도 내가 참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나를 전혀 모르는 타인 앞에 이토록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그녀의 글은 신랄하다.
남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무엇을 평가하기에 가차없다는 느낌이다.
돌리거나 포장하거나 속여 말하지 않는다.
느끼는 대로 직진.
그런 느낌이다.

굉장히 솔직하고 쿨한 사람이거나
굉장히 까칠하고 피곤한 사람이거나
굉장히 시니컬한 개인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그 세 가지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거나.
아마 그녀는 그런 사람일 것 같다.
(그녀 스스로는 굉장히 겁이 많고 극기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했다.)

그래서 그 간극의 차이가 매력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단순하기를 열망하지만 절대 심플 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나는 내가 굉장히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매우 복잡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ㅋ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나 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내가 쉴 곳이 없다. (당신의 쉴 곳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만의 시간을 산다. 그런데 이 시간이 나만의 시간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시간은 기나긴 시간 속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 이 시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것, 나 역시 그들처럼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릴 운명이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 나와 세계는 이어져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또, 그래서 이상하게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그런 것을 말로도 글로도 정확히 설명은 못하지만(천재들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타고난 둔재다.) 그냥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p.168

 

사람은 언제 둔해지느냐 하면, 부족함이 없을 때 둔해진다. 부족한 사람은 뭐든 오해하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없는 사람은 누가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면 '날 좋아하는 걸까?' 하고 오해한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이 학원만 다니면, 이 문제집만 풀면 성적이 오를 거라고 착각한다.
p. 301

영화 속의 남편은 결국 아내의 얼굴을 베개로 덮어 누른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인지 알 것 같다. 사랑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 사랑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이 나이 듦과 병과 죽음이라는 것일 테다. 우리 역시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p. 124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의의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시간이 주체 못할 정도로 많아서 아이는 무료함의 수영장 속을 한없이 헤엄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시간은 가지 않는다. 그 시절의 시간은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시계처럼, 더운 날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흘러내릴 정도로 느리게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세계와 자신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세계의 무게와 자신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다 자란 어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신들이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며 어른이 되었음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멍하지 있지 말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뭐라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 그 시기가 아니면 언제 또 멍하니 있을 수 있고, 쓸데없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p. 183~184

 

 

 

그러고 보니 내 유년시절에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이 공상이었다.
그저 멍하니 벽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 그저 멍하니 바다를 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터무니없는 상상과 생각들로 그 느릿하고 지루한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
외동딸같이 자랐던(오빠가 무려 셋인데) 내가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빤했다.
종이 인형들을 줄 세워 놓고 일인 삼역정도는 뺨치게 연기하며 파티를 즐기거나, 저 바다 너머에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입에 거미줄이 생길 것 만 같은 공포에 벽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상 속 친구를 불러내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지껄이거나.
(오해하지 말기를. 난 미치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이다. 그냥 그땐 그랬다. 심심했으니까. 지루했으니까.)

우습게도 그랬던 내가 내 아이들에게는 의미 없이 사라지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잔소리를 한다.
아무 이유 없이 데굴데굴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아이를 보며, 제발 그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좀 생산적인 일을 해보라고 기어코 한마디 하고야 만다.
그렇다.
나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년기 시절의 나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시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아이들에게 어른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건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 충분히 굴러다닐 수 있는 시간인데 말이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양분이 될 테니까.

(어째 내 말투도 시니컬해지는 것 같은 건 착각인 걸까? ㅡ_ㅡ")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글이다.
블랙코미디스러운 시니컬한 유머가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신랄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 코드를 유지하는 능력.
이 글에는 그런 게 있다.
아무리 투덜대도, 아무리 까칠하게 대꾸해도 밉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날카롭게 본질을 꿰뚫는 깊은 시선이 있다.
그 시선들이 이 책을 단순한 '여행서'가 아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여행 에세이'로 만들어준다.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을 여행한 이야기를 나로 하여금 읽게 만드는 힘 또한 작가의 그 시선들에 있었다.
내내 태국과 인도와 방콕과 그 주변 나라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장소가 중요하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이 이 책의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나라들을 직접 여행한 사람들이 읽는다면 나보다 훨씬 더 깊은 공감과 즐거움을 느낄 테지만.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기어코 여행을 떠나고 또 떠나고야 마는 작가를 닮은 책이다.


내 좁고 좁은 시야가 이 책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넓어졌기를.
여행을 하며 넓고 깊어진 그녀의 시야를 아주 조금이라도 닮게 되었기를.

 

 

 

 

< 이 리뷰는 글담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도서를 읽고, 자유롭고 솔직하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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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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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아무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누군가와 살이 닿는 게 불쾌해지는 날들.
7월의 한복판.
완벽한 여름이었다.

어쩐지 '바깥은 여름'을 이 계절에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위기감에 휩싸여 책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머리를 하는 동안 시끄러운 미용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침 폭우가 쏟아졌고, 통창은 빗줄기에 젖어 불투명해졌다.
덕분에 세상과 단절된 나는 좀 더 편하게 책 속에 갇힐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조용히 음미하며 읽어야 할 것만 같았던 책은, 어느 순간 장소를 잊게 만들었고,
주위의 소음은 사라지고, 책 속의 그들의 고요한 일상이 펼쳐졌다.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었지만 한 권의 책 덕분에 나만 다른 공간 속에 머물다 왔다.


누군가의 일상을 싹둑 잘라낸 찰나의 순간들을 훔쳐보며.

 

 

 

나는 대체로 단편들을 좋아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 삶의 어느 시점을 잘라낸 단면들, 찰나의 황홀했던 혹은 슬픔에 갇혔던 시간의 기록.
그것들을 엿보는 그 짧은 호흡을 즐긴다.
순간이고 찰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이고 전부일지도 모를 단편의 기억들.
그들만이 줄 수 있는 그 여운이 좋다.

시간을 잘라낸 단면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뚝 잘려진 삶의 어느 한순간.
긴 삶 속에서 보이지 않던 생의 이면 같은 것들이 더 선명한 색채를 띄며 뚝뚝 흘러내린다.
그토록 생생한 생의 순간을 마주치며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나와 다른 삶, 또는 나와 비슷한 삶의 조각들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나를 사유하게 만들고 깨우치게 만든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한다.

삶의 모든 시간, 매초마다 깨달음이 있진 않다.
결국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깨닫고 나아간다.

그 찰나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내게 이 책은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슬픔으로 읽혔다.
자식을 잃은 부모, 아비를 잃은 아들, 남편을 잃은 여자, 사랑을 잃고, 믿음을 잃고, 나아갈 길을 모른 채 멈춰 선 사람들.

결핍과 상실, 그리고 남겨진 막막함.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모두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무언가를 잃은 채 살아간다.
마치 그것이 누구의 삶도 비켜 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고 살아간다.
꽉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펴보면 늘 움켜쥔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다.
가끔은 움켜쥘 수 없는 것들도 무사히 움켜쥐고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누군가의 삶을, 건강을, 믿음을, 사랑을 우리는 무사히 잘 지켜내고 있다고 믿는다.
절대 움켜쥘 수 없는 그런 것들을 기꺼이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믿곤 한다.
그래서 상실은 늘 고통스럽다.
믿었던 만큼 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 입동
요즘 티브이에서도 너무 자주 보도되는 안타까운 어린 생명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유치원 통학차량에서 내려 그 차에 치여 죽어버린 아이.
그 아이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해주는 유치원.
처음 가져본, 설레던 내 집에서 어느 날 아이가 사라져버린 풍경.
남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부부.
그리고 주위의 수군거림.

어쩔 수 없이 나는 엄마라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맺혔다.
처음 내 집을 샀을 때의 감정이라던지,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라던지, 그 평범한 일상을 강제로 박탈당한 상실감이랄지, 뭐 그런 것들이 몹시도 공감이 갔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감히 넘겨짚어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글을 읽는 내내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졌다.
내가 아는 감정들은 결국 다 '짐작'이니까.
당사자의 진짜 마음 따위 우리는 모르니까.
진짜 잃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마음의 고통을 작가는 일상의 어느 날을 통해 담담한 듯 무심하게 일러준다.
소리 지르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울부짖지 않으면서도 누구라도 크고 격렬하게 선명히 느낄 만큼.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 했다.
< 입동 p.16 >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 입동 p. 18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당신이 과민한 거라 설득했다.
< 입동 p. 23 >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우리 분수에 이 정도면 멀리 온 거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 입동 p.32~33 >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 입동 p.36~37 >


# 노찬성과 에반
아빠의 죽음 후 할머니와 둘이 사는 찬성.
할머니가 일하는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어느 날 버려진 강아지를 만나게 된다.
늙어서 버려진 강아지 에반.
둘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 되지만 에반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암으로 죽어가던 에반에게 안락사를 시켜주고 싶었던 찬성은 어린 몸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모으지만, 하루만 더 함께 살고 싶은 마음과 돈이 생기자 저도 모르게 자라난 견물생심.
에반의 죽음을 하루씩 미루면서 소유하게 되는 것들.

인간의 본성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던 찬성이 '돈'이 생기자 탐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서글펐다.
너무 흔한 우리들의 모습이니까.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아이'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이면은 그래서 더 껄끄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찬성이 너무 안타까워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찬성과 에반의 모습을 통해 젊음과 나이듦의 대비를 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욕심도 넘치는 젊음과 잊혀짐이 일상이 되어버린 늙음.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한 생각들이라 자연히 그들에게서 그런 모습들이 오버랩되어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씁쓸하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그 시절 찬성은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몇 가지 깨달았는데, 돈을 벌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인내가 무언가를 꼭 보상해주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찬성은 그곳에서 새소리와 바람소리, 자동차 배기가스와 어른들의 하품을 먹고 자랐다. 환한 대낮, 차 안에서 일제히 잠든 이들은 모두 피로에 학살당한 것처럼 보였다. 혹은 졸음 쉼터 자체가 자동차 묘지 같았다.
< 노찬성과 에반 P.43 >


# 건너편
매번 헤어질 기회를 잃고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오래된 연인.
다시 이별을 말하는 여자.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 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 건너편 P.92 >


# 침묵의 미래
마지막 화자를 잃은 언어의 이야기.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설명을 본 순간 이 글이 왜 다른가를 완벽히 이해했다면 너무 경솔한가.



# 풍경의 쓸모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책 뒷면의 실린 글과 가장 어울리는 글이 아니었나 싶다.
글 속에 담긴 단편적인 그의 행적들 말고, 그의 갈 곳 잃은 마음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순간 갈 길을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선 우리들의 막막함을 보여주는 글이 아니었을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 풍경의 쓸모 p.173 >


# 가리는 손
내겐 너무 무서웠던, 섬뜩했던, 두려웠던 이야기.
나는 내 아이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옳은 것인가, 내가 모르는 내 아이를 인정하고 의심하는 게 옳은 것인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던 아이가 너무 낯선 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을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 가리는 손 p.190 >
-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 가리는 손 p.199~200 >
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 가리는 손 p.212 >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켜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 그런 걸 다 설명하진 않는다.
< 가리는 손 p.213~214 >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학생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같이 죽어버린 남편.
남겨진 아내.
왜 그 아이의 마지막 손을 잡으면서 남겨질 내 손은 떠올리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버린 남편에게 화가 나 있던 그녀는, 죽은 아이의 누나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서야 남편이 구하고자 했던 어린 생의 눈빛을 마주 본다.
너무도 살고 싶었을 두 생의 눈빛을.

그녀가 가고 싶었던 곳은 지상 어디에도 없지 않았을까.
아마도 남편의 품속은 아니었을까.
남편이 잃어버린 그 삶 속은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동안 참 여러 번, 말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했다.
염려와 위로의 형태로 건넨 말들이 때로는 흉포한 폭력이 되어 상대를 할퀴기도 하는 것을.
내가 그 말들에 날카로운 칼날과 뽀족한 가시를 담지 않았기에 순하고 가벼운 말들이라 안위하지만, 때때로 뜻 없던 그 말들이 엄청난 무게로 상대를 짓눌러 질식시키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의 무게는, 말의 힘은 뱉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고 강력한가 보다.
의도하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죽일 수 있다.
생각보다 자주 흔하게 그런 일들을 행하고 산다.
간사하고 날카로운 혀를 가진 '인간'이라서.
그 세치의 혀로 너무 많은 상처를 입히며 살아간다.

단 한 번도 말에 칼을 품지 않고, 경멸을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가 뱉은 말에 누군가는 상처를 입었을 테다.

쉽게 뱉은 나의 말이
뜻 없이 건넸던 나의 말이
위로와 연민의 말들 마저
혹시 당신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문득, 나의 말들이 무서워지는 밤이다.
말의 무게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밤이다.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던 것 같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보다 막막함을 담은 그들의 눈빛이 더 마음을 찔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우두커니 멈춰 선 사람들.
어디론가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나도 그런 눈빛이었던 적이 있었던 것만 같다.



한 권의 책이
우리를 다시 생각하고 하고,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다시 행동하게 만들어 준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줄의 문장으로 우리는 위로받고 내일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타인을 모두 이해하기엔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지만,
이왕이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눈 날리는 구 속에 갇힌 채 바깥의 여름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더운 바깥에서 눈 쌓인 구 속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그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연민도, 낯섦도, 호기심도, 부러움도, 이질감도, 그게 뭐든,,, 다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눈 속에 담긴 그 많은 감정들 모두.

누구의 삶도 우리는 애처로워 할 수 없다.
내 삶 또한 매번 애처로우므로.
살아간다는 일 만으로도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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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 이 문장이 당신에게 닿기를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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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나는 그 말을 누구에게 건네고 싶을까.

사랑이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떨림이나 설렘 따위를 잊은지도 오래다.
이제는 사랑 앞에 긴장하지도 초조하지도 않다.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것처럼 사랑도 시간 앞에 순응해 일상이 되어간다.

차곡차곡 일상의 먼지와 함께 쌓인 사랑들.
후에 어느 날,
내가 숨 쉬는 모든 날들이 사랑이었노라 말할 수 있기를.

사랑은 오래되어 설렘을 잃었지만
여전히 사랑은 사랑인 채로 아름답다.



 

 

 

 

오랜만에 만난 최갑수님의 에세이.
여행 에세이로 만 만나다가 사랑에 관한 감성적 해석이 담긴 글로 만나니 무언가 묘하다.
원래도 감성적인 문장이 트레이드 마크인 분이다 보니 역시 이 글 또한 감성 충만.

각 장마다 만나게 되는 어느 책의 한 구절, 시의 단편들, 가사에 담긴 이야기들이 반가웠다.
최갑수님의 감성적 글과 어우러져 더 폭발하는 감성을 뽐냈던 글들.

목차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단어를, 문장을 고르고 골라 적었는지 느껴질 만큼 분위기가 있다.
덕분에 짧은 한 줄의 소제목들로도 감정이 뭉클 움직이는 순간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을 오해해서, 당신을 오역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죠.

나는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게 사랑이니까요.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답고 선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워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닐는지.

 

우리의 삶이 겹쳐져 한결 짙어진 부분을 사랑이라는 말로 부를까.

 

 

사랑에 관한 짧고 군더더기 없는 글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인의 에세이는 그래서 좋다.
같은 단어로도 전혀 다른 감성을 지닌다.
한 줄의 문장으로도 놀라울 만큼 깊은 감정을 드러낸다.
시인의 언어는 그래서 깊고 쓸쓸하고 다정하다.


 

 

 

 

마치 산문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의 글들.
몇 번씩 다시 읽었다.
구절구절마다 너무 좋아서 시를 읽듯 다시 읽고 또 읽고.
이젠 시를 쓰지 않는다는 말도 거짓인 듯... 넘치는 시인의 감성에, 언어에, 눈빛에 감탄한다.


마당이 없어 가난한 나도 비에 젖은 나뭇잎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인생을 잊기 위해 만난 그를
잊지 않으려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어쩌다 보니, 하필 오늘 비가 내리는 가난한 오후다.


 

 

 

 

글도 글이지만
그의 사진도 너무 좋다.
그동안은 그의 책들을 보며 풍경에 눈을 두었었는데, 이 책 속에선 인물에 더 눈이 갔다.
그가 담아낸 사람들의 표정.
그 표정들이 어쩜 이렇게 눈을 사로잡는지.
사진을 찍는 순간 대상을 사랑한다는 그의 마음이 이런 아름다운 사진으로 탄생하나 보다.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일상에 침몰되지 않고 낯섦을 짊어지고 세상을 부유하기에 이렇게 섬세하고 깊이 있게 사랑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걸까?
먼 곳에서 바라보는 사랑과 그리움은 얼마나 더 간절하고 절실한 걸까?
떠나기 때문에, 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젊은 모양이다.

한참 어린 내가
일상에 침몰당해 늙어버린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젊음을 잃은지 너무 오래된 노인이 되어버린 기분.
사랑을 애틋해하지 않는 순간, 우린 모두 대책 없이 늙어지고 있다.

익숙해져서 소중한지 모른 채 내버려 둔 내 사랑의 조각들을 윤이 나게 반들반들 닦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한 책이었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최갑수의 여행하는 문장들의 연작이자 마침점 같은 책이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이라고 한다.
연작이니 함께 읽으면 더 좋을 듯.
책꽂이에 있던 책을 나도 꺼내 놓았다.

 

 

 

 


 

<위즈덤하우스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도서를 읽고 자유롭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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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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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다가 찡

바람 잘 날 없는 식구 이야기

 

 

그렇다.
말 그대로 한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에세이나 수필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한 남자의 가족 이야기.
복작복작하고, 피식 웃음이 나고, 종종 코끝이 찡해지는 진짜 사는 이야기.
나는 여기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모두 작가의 진짜 이야기라고 믿는다.
그맘때 아이들을 키웠고, 키우고 있는 엄마라서 그 이야기들의 진실이 너무도 잘 보였으니까.
(가족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기에 허구가 섞여있거나 각색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진짜 우리들 사는 이야기가 다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짧게 짧게 엮어진 이야기는 가벼운 듯, 무겁고, 웃음이 나다가 눈물이 나고, 종종 가슴이 콱 막히기를 반복하며 나를 공감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가 된 지금의 우리, 아직 세상 때가 한참 덜 묻은 보송한 아이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보듬어 사는 모두가 그곳에 있었다.
서툴렀던 육아에 지쳤던 순간들,
엄마가 되고 나이가 한참 들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부모님의 마음들,
돌이킬 수 없는 지나버린 시간들,
아이가 커가면서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들,
남녀가 아닌 가족이 되어 더 단단해진 부부애.
내가 지나온 많은 시간과 추억들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당신도 그렇게 살았구나.
당신도 나처럼 그렇게 서툴렀었구나.
당신도 우리들처럼 천천히 어른이 되었구나.
그것은 다른 방식의 위로였고, 따뜻한 다독임이었다.

이 작가가 엄청난 부자여서 타워팰리스 꼭대기에 살고 있고, 영어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조기유학을 준비하는 부모였다면, 아마도 내가 받은 감정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어쩐지 가슴 한켠에서 꼼지락대는 패배감 같은 게 생겨났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에세이나 수필, 자기개발서 같은 책들을 읽다 보면 묘하게 상대적 박탈감을 이끌어내는 책들이 있다.
서울 한복판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면서, 준 재벌쯤 되는 사람들과 비교해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소도시에서 아파트 두 채를 사고도 남을 금액의 전세에 살면서 가난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일 년에 두어 번은 스스로를 위한 여행을 떠나면서 쉼 없는 일상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는 어쩐지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 같을 때가 많다.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삶에 발목 잡힌 사람들에게 쉽게 여행을 떠나라 말하고,
꿈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시급한 인생들에게 꿈을 꾸어라 말하고,
책임져야 할 가족들을 이고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책임에서 가벼워지라고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 하기 힘든 것들, 그래서 우리를 조금은 허무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그 속에서 위로와 공감을 받기엔 내 일상과 그들의 일상이 서로를 비켜지나고 만다.

그래서 타워팰리스에 살고 있지 않는 작가가,
왁자지껄한 세 아이의 아빠인 작가가,
흙의 감사함을 알고 있는 순박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작가가,
아직도 부모의 마음을 배워가고 있는 중인 작가가 고맙다.
일상을 지나다 한 번쯤 마주쳐서 서로의 등을 토닥여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작가가 고맙다.

 

우리는 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어쩐지 닮은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괜히 콧날이 시큰해지고, 자꾸만 고개가 끄덕여지고, 내 이야기 같은 삶들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 속의 가족이 그렇다.
너무 평범하고 너무 흔한 가족의 모습이라서 더 그렇다.
그래서 더 반갑고, 더 웃음이 나고, 더 눈물이 난다.

길 가다 나와 똑닮은 눈빛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이해가 있다.
당신의 일상과 나의 일상을 이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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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집만 읽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 난해하고 아름다움 언어들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시의 언어가 건네주는 여운이 좋았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시인들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한껏 취해있었다.

게다가 감성이 차고 넘치고도 끈덕지게 남아서, 세상의 모든 것들에 감정을 이입하던 시절이었다.

하필 그런 시절에 만난 시들은 몇배의 감성으로 폭팔해 내안에 남았고, 이제 메마르고 가난한 어른이 된 지금도 내 안 어딘가 숨어있던 시의 조각들이 문득 다시 시를 찾게 만든다.

 

문학과 지성에서 내 서재안 문학과 지성의 시집들을 포스팅 하는 이벤트를 하기에 책장을 뒤지다 보니 생각보다 내게 문학과 지성의 시집이 많지 않아 놀랐다.

가지고 있는 시집의 3분의 1도 채 안되는 양이라 왜 이것밖에 없나 싶은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하긴, 예전엔 오로지 시집만 사고 읽고 했었지만, 어느날 부턴가 에세이와 수필, 소설들에 자리를 빼앗긴 책장은 이제는 시집에게 내어준 칸이 몇 안되니... 놀랄것도 없다 싶기도 하다.

예전 시집들은 다 어딜 간건지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고, (분명 사고 읽은 기억은 있는데;;)

오래전 읽었다 다시 꺼내본 시집에 반가움이 일기도 했다.

시를 읽지 않은 시절이 오래된 것을 반증하는 듯 대부분 일년 안밖에 구입한 시집들이 많다.

작년 가을부터 다시 시집이 읽고 싶어서 샀던.

 

다시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좋았던 시집을 하나 추천해 본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누구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같이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슬픔을 담담하게 표현한 시집을 한 권쯤은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이 시에 대해 말했을때 그도 나에게 같은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다.

작년 내가 읽은 책중에 베스트오브베스트를 차지해던 시집.

이번에 심보선시인의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도 구입할 예정이다.

그의 감성이, 그의 시언어가 여전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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