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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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아무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누군가와 살이 닿는 게 불쾌해지는 날들.
7월의 한복판.
완벽한 여름이었다.

어쩐지 '바깥은 여름'을 이 계절에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위기감에 휩싸여 책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머리를 하는 동안 시끄러운 미용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침 폭우가 쏟아졌고, 통창은 빗줄기에 젖어 불투명해졌다.
덕분에 세상과 단절된 나는 좀 더 편하게 책 속에 갇힐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조용히 음미하며 읽어야 할 것만 같았던 책은, 어느 순간 장소를 잊게 만들었고,
주위의 소음은 사라지고, 책 속의 그들의 고요한 일상이 펼쳐졌다.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었지만 한 권의 책 덕분에 나만 다른 공간 속에 머물다 왔다.


누군가의 일상을 싹둑 잘라낸 찰나의 순간들을 훔쳐보며.

 

 

 

나는 대체로 단편들을 좋아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 삶의 어느 시점을 잘라낸 단면들, 찰나의 황홀했던 혹은 슬픔에 갇혔던 시간의 기록.
그것들을 엿보는 그 짧은 호흡을 즐긴다.
순간이고 찰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이고 전부일지도 모를 단편의 기억들.
그들만이 줄 수 있는 그 여운이 좋다.

시간을 잘라낸 단면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뚝 잘려진 삶의 어느 한순간.
긴 삶 속에서 보이지 않던 생의 이면 같은 것들이 더 선명한 색채를 띄며 뚝뚝 흘러내린다.
그토록 생생한 생의 순간을 마주치며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나와 다른 삶, 또는 나와 비슷한 삶의 조각들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나를 사유하게 만들고 깨우치게 만든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한다.

삶의 모든 시간, 매초마다 깨달음이 있진 않다.
결국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깨닫고 나아간다.

그 찰나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내게 이 책은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슬픔으로 읽혔다.
자식을 잃은 부모, 아비를 잃은 아들, 남편을 잃은 여자, 사랑을 잃고, 믿음을 잃고, 나아갈 길을 모른 채 멈춰 선 사람들.

결핍과 상실, 그리고 남겨진 막막함.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모두 무언가가 부족하거나, 무언가를 잃은 채 살아간다.
마치 그것이 누구의 삶도 비켜 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고 살아간다.
꽉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펴보면 늘 움켜쥔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다.
가끔은 움켜쥘 수 없는 것들도 무사히 움켜쥐고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누군가의 삶을, 건강을, 믿음을, 사랑을 우리는 무사히 잘 지켜내고 있다고 믿는다.
절대 움켜쥘 수 없는 그런 것들을 기꺼이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믿곤 한다.
그래서 상실은 늘 고통스럽다.
믿었던 만큼 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 입동
요즘 티브이에서도 너무 자주 보도되는 안타까운 어린 생명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유치원 통학차량에서 내려 그 차에 치여 죽어버린 아이.
그 아이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해주는 유치원.
처음 가져본, 설레던 내 집에서 어느 날 아이가 사라져버린 풍경.
남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부부.
그리고 주위의 수군거림.

어쩔 수 없이 나는 엄마라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맺혔다.
처음 내 집을 샀을 때의 감정이라던지,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라던지, 그 평범한 일상을 강제로 박탈당한 상실감이랄지, 뭐 그런 것들이 몹시도 공감이 갔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감히 넘겨짚어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글을 읽는 내내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졌다.
내가 아는 감정들은 결국 다 '짐작'이니까.
당사자의 진짜 마음 따위 우리는 모르니까.
진짜 잃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마음의 고통을 작가는 일상의 어느 날을 통해 담담한 듯 무심하게 일러준다.
소리 지르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울부짖지 않으면서도 누구라도 크고 격렬하게 선명히 느낄 만큼.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 했다.
< 입동 p.16 >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 입동 p. 18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당신이 과민한 거라 설득했다.
< 입동 p. 23 >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우리 분수에 이 정도면 멀리 온 거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 입동 p.32~33 >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 입동 p.36~37 >


# 노찬성과 에반
아빠의 죽음 후 할머니와 둘이 사는 찬성.
할머니가 일하는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어느 날 버려진 강아지를 만나게 된다.
늙어서 버려진 강아지 에반.
둘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 되지만 에반에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암으로 죽어가던 에반에게 안락사를 시켜주고 싶었던 찬성은 어린 몸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모으지만, 하루만 더 함께 살고 싶은 마음과 돈이 생기자 저도 모르게 자라난 견물생심.
에반의 죽음을 하루씩 미루면서 소유하게 되는 것들.

인간의 본성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던 찬성이 '돈'이 생기자 탐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서글펐다.
너무 흔한 우리들의 모습이니까.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아이'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이면은 그래서 더 껄끄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찬성이 너무 안타까워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찬성과 에반의 모습을 통해 젊음과 나이듦의 대비를 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욕심도 넘치는 젊음과 잊혀짐이 일상이 되어버린 늙음.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한 생각들이라 자연히 그들에게서 그런 모습들이 오버랩되어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씁쓸하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그 시절 찬성은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몇 가지 깨달았는데, 돈을 벌기 위해선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인내가 무언가를 꼭 보상해주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찬성은 그곳에서 새소리와 바람소리, 자동차 배기가스와 어른들의 하품을 먹고 자랐다. 환한 대낮, 차 안에서 일제히 잠든 이들은 모두 피로에 학살당한 것처럼 보였다. 혹은 졸음 쉼터 자체가 자동차 묘지 같았다.
< 노찬성과 에반 P.43 >


# 건너편
매번 헤어질 기회를 잃고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오래된 연인.
다시 이별을 말하는 여자.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 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 건너편 P.92 >


# 침묵의 미래
마지막 화자를 잃은 언어의 이야기.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설명을 본 순간 이 글이 왜 다른가를 완벽히 이해했다면 너무 경솔한가.



# 풍경의 쓸모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책 뒷면의 실린 글과 가장 어울리는 글이 아니었나 싶다.
글 속에 담긴 단편적인 그의 행적들 말고, 그의 갈 곳 잃은 마음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어느 순간 갈 길을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선 우리들의 막막함을 보여주는 글이 아니었을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 풍경의 쓸모 p.173 >


# 가리는 손
내겐 너무 무서웠던, 섬뜩했던, 두려웠던 이야기.
나는 내 아이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옳은 것인가, 내가 모르는 내 아이를 인정하고 의심하는 게 옳은 것인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던 아이가 너무 낯선 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을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도 잘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긴 시간이 지난 뒤, 자식에게 애정을 베푸는 일 못지않게 거절과 상실의 경험을 주는 것도 중요한 의무란 걸 배웠다.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세상은 이곳과 비교도 안 되게 냉혹할 테니까. 이 세계가 그 차가움을 견디려 누군가를 뜨겁게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는 곳이 되리라는 것 역시 아직 알지 못할 테니까.
< 가리는 손 p.190 >
-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 가리는 손 p.199~200 >
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 가리는 손 p.212 >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켜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 그런 걸 다 설명하진 않는다.
< 가리는 손 p.213~214 >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학생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같이 죽어버린 남편.
남겨진 아내.
왜 그 아이의 마지막 손을 잡으면서 남겨질 내 손은 떠올리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버린 남편에게 화가 나 있던 그녀는, 죽은 아이의 누나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서야 남편이 구하고자 했던 어린 생의 눈빛을 마주 본다.
너무도 살고 싶었을 두 생의 눈빛을.

그녀가 가고 싶었던 곳은 지상 어디에도 없지 않았을까.
아마도 남편의 품속은 아니었을까.
남편이 잃어버린 그 삶 속은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동안 참 여러 번, 말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했다.
염려와 위로의 형태로 건넨 말들이 때로는 흉포한 폭력이 되어 상대를 할퀴기도 하는 것을.
내가 그 말들에 날카로운 칼날과 뽀족한 가시를 담지 않았기에 순하고 가벼운 말들이라 안위하지만, 때때로 뜻 없던 그 말들이 엄청난 무게로 상대를 짓눌러 질식시키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의 무게는, 말의 힘은 뱉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고 강력한가 보다.
의도하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죽일 수 있다.
생각보다 자주 흔하게 그런 일들을 행하고 산다.
간사하고 날카로운 혀를 가진 '인간'이라서.
그 세치의 혀로 너무 많은 상처를 입히며 살아간다.

단 한 번도 말에 칼을 품지 않고, 경멸을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가 뱉은 말에 누군가는 상처를 입었을 테다.

쉽게 뱉은 나의 말이
뜻 없이 건넸던 나의 말이
위로와 연민의 말들 마저
혹시 당신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문득, 나의 말들이 무서워지는 밤이다.
말의 무게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밤이다.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던 것 같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보다 막막함을 담은 그들의 눈빛이 더 마음을 찔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우두커니 멈춰 선 사람들.
어디론가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나도 그런 눈빛이었던 적이 있었던 것만 같다.



한 권의 책이
우리를 다시 생각하고 하고,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다시 행동하게 만들어 준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줄의 문장으로 우리는 위로받고 내일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
타인을 모두 이해하기엔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지만,
이왕이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눈 날리는 구 속에 갇힌 채 바깥의 여름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더운 바깥에서 눈 쌓인 구 속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그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연민도, 낯섦도, 호기심도, 부러움도, 이질감도, 그게 뭐든,,, 다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눈 속에 담긴 그 많은 감정들 모두.

누구의 삶도 우리는 애처로워 할 수 없다.
내 삶 또한 매번 애처로우므로.
살아간다는 일 만으로도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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