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누피, 나도 내가 참 좋은걸 피너츠 시리즈
찰스 M. 슐츠 지음, 강이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인스턴트 음식을 마구 먹는 것!"

자기애 넘치는 몽상가 스누피

 

 

어릴 적에 이 귀여운 스누피를 사랑해 본 적 없는 이가 있을까?

누구라도 보면 반해 버리는 스누피!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스누피와 어릴 적 추억에 젖어 보자.

 

 

어릴 적에 스누피는 그저 귀여운 강아지였는데... 책으로 만나는 스누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글이라니.

몽상을 즐기는 강아지라니!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지금도 머그컵이나 노트, 다양한 문구용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스누피는 그저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만화 속 주인공일 뿐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스누피를 만화로 본 기억이 없으니 정말 오랜만에 책으로 스누피의 진짜 이야기를 만나게 된 셈이다.

반갑고, 새롭고, 즐겁다.

 

 

때로는 악동 같고, 때로는 철학자 같은 스누피.

너무 똑똑하고 재치 넘치는 스누피의 에피소드는 자꾸 웃음이 세어나게 만든다.

에피소드들이 짧지만 그래서 더 공감하기 쉬운 것 같다.

특히나 영어로 서술되어 있어서 아이와 함께 읽기에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너무 어렵고 무거운 영어책은 아이들도 싫어한다.

좀 더 가볍고, 즐겁게,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면 공부하는 지겨움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나보다 더 좋아하며 읽은 책.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스누피.

 

 

"달아나버리고 싶은 기분 느낀 적 있어?"

"당연히 있지... 가끔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버리고 싶어."

"나도 데이지 힐 강아지 농장에서 살 때 그런 기분 느낀 적 있는데…"

"담장을 넘어서 간신히 농장을 탈출했건만, 이 세상으로부터는 달아나지 못하고 있으니, 원!"

 

 

스누피의 더 긴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오래전 봤던 만화영화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나에겐 추억을.

아이에겐 즐거움을 선물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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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브라운,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 피너츠 시리즈
찰스 M. 슐츠 지음, 강이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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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날 좋아하는 사람조차도 날 싫어해!"

세상 모든 근심을 안고 있는 찰리 브라운

 

 

어릴 적 기억 속의 찰리 브라운은 조금 바보스러운 걱정꾼이었던 것 같다.

늘 근심 걱정이 넘치는 아이였지만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아이이기도 했다.

만화를 보며 참 많이 웃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어 다시 책으로 만나는 찰리 브라운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어쩐지 더 소심해지고, 더 걱정이 늘고, 자신감이 줄어드는데... 그래서인지 어릴 땐 소심하게만 보이던 찰리 브라운이 이제는 가장 공감이 간다.

어느 순간 나도 근심 걱정을 매달고 살아가고 있었던가 보다.

그의 걱정은 나의 걱정을 위로해 준다.

 

 

 

 

 

 

 

 

"잠깐만, 찰리 브라운. 너 왠지 달라 보여… 좀 변한 거 같아…"

 

 "내 생각엔 아마…"

"난생처음으로 내가 필요해진 느낌이야!"

 

 

 

걱정꾸러기 소심쟁이 찰리 브라운.

그래서 더 가깝고, 더 애착이 가고, 더 친근한 찰리 브라운.

누구라도 마음속에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 거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나의 소심함과 답답함과 바보스러움.

그런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선뜻 이야기하며 친구와 나누는 모습은 되려 훨씬 더 용감하고 멋져 보인다.

내 속엔 찰리 브라운이 너무 많아!

걱정이 넘치는 우리 작은 애도 폭풍공감하며 읽은 책.

아이들과 함께 읽고, 웃고, 즐기며 이야기 나누기 좋은 책.

엄마는 어릴 적 추억을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될 테고, 아이들은 영어 원문을 함께 읽으며 영어가 조금이라도 더 쉬워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작은 사이즈라서 어디든지 들고 가기 좋다.

아이와 꼭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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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그래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피너츠 시리즈
찰스 M. 슐츠 지음, 강이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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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돌아봤는데, 흠잡을 게 없지 뭐야"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인 루시

 

 

 

오래전 만화영화로 방영했던 "피너츠 시리즈"

누구나 알고 있는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

그리고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가물가물한 루시와 라이너스, 패티, 그리고 우드스탁.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너무 귀엽고 깜찍한 책으로 각자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근에 트렌드처럼 만화 주인공이 등장해서 삶에 조언과 응원을 해주는 도서가 자주 출간되고 있다.

만화 속 스토리보다는 응원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글들이 실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정말 피너츠 시리즈 속 주인공들의 에피소드를 그대로 들려준다.

 

어쩌면 가장 요즘 사람들 같은, 루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루시! 그걸 놓치면 어떡해? 너한테 똑바로 갔잖아! 어떻게 그걸 놓칠 수가 있어?!!"

 

"난 지난 일 따윈 생각하지 않아"

 

 

 

루시의 당돌함과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싫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늘 상대를 배려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하루하루.

가끔은 지치고, 화가 나고, 때때로 억울하기 일쑤다.

내가 이렇게 참아주고 웃어주고 양보해줬는데, 왜 상대방은 나를 함부로 대할까?

인간관계에 너무 지쳐버린 그런 날, 루시를 읽어야겠다.

 

누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먼저 사랑하는 루시.

루시에게서 나를 아끼는 법을, 나를 먼저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루시의 대화법이 가끔은 너무 통쾌하니... 나 사실은 많이 쏘아붙이고 싶었나 보다.

남을 할퀴는 말을 너무도 쉽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들에게, 루시의 당돌함을 맛 보여주고 싶다.

 

"너만 소중한 거 아니야. 나도 너만큼 소중한 사람이야. 누구도 네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어.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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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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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p.56

 

 

 

차가운 도쿄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모든 나라는 모두 이런 도시를 가지고 있다.

돈의 흐름에 따라 모여들고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화려하지만 차가운 얼굴을 한 도시.

나는 책 속의 도쿄를 읽으며, 서울을 떠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잿빛 도시.

콘크리트의 딱딱함과 차가움을 딛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빙글빙글 도는 도쿄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서울..

국경을 넘어도 달라지는 게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차갑고 낯선 도시를 견디며.

책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나는 하나도 모른다.

일본에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럼에도 그가 그리는 시골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시골과 묘하게 닮아있다.

일본과 우리는 국민성이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느끼며 살아왔는데, 책 속에서는 하나 다를 게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어쩔 수 없게 닮은 꼴인 걸까.

우리는 왜 다른 곳에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도쿄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발에 밟힐 만큼 자유가 굴러다닌다.

떨어진 잎사귀처럼 빈 깡통처럼 어디에나 굴러다닌다.

고향이 귀찮아져서, 부모의 감시의 눈이 싫어서, 그 멋진 자유라는 것을 원하며 허위허위 찾아오는 것이지만, 너무도 쉽사리 눈에 들어오는 자유에 김이 빠져 차츰 그것을 갖고 놀아대게 된다.

스스로를 훈계할 능력이 없는 자가 소유한 질 낮은 자유는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키고 그 인간의 몸뚱이를 길가 진흙 구덩이로 끌고 들어간다.

p.230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방종한 이십 대를 거쳐 워커홀릭의 삼십 대를 지나 짙은 외로움을 짊어진 사십 대에서 멈춘다.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어쩌다 보니 도쿄에서 어른의 시간을 시작하게 되었다.

적당히, 내키는 대로, 의미 없는 대학생활을 버티다가 결국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의 끝까지 가닿은 그가 바닥을 치고 서서히 다시 날아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일본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무기력의 단면을 여과 없이 그려낸 느낌이랄까.

한국의 젊은이들이 꿈을 잃고, 내일이 없이, 오늘만을 간신히 살아내는 시간이 한없이 지속된다면 비단 남의 나라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시대에는 무기력이 역병처럼 번져나가 모두들 당연한 듯 내일이 없는 삶을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난다.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차츰차츰 일을 하고, 일상을 회복해가는 과정 또한 무기력의 나락으로 깊이 빠져들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바닥에 닿으면 그다음은 무조건 바닥을 차고 올라 수면으로 떠오르는 게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그렇게 무엇에도 흥미가 없던 그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게 되는 순간, 멈춰있던 일상이 다시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어른의 일, 어른의 책무, 어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뒤늦게 늙어버린 엄마를 돌아보게 된다.

그가 방황하고 방종한 시간 동안 묵묵히 그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어느새 늙어버린 엄마.

그런 엄마와 뒤늦게 함께 도쿄살이를 시작한다.

 

하지만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기다려 주지 못한다.

한없이 기다려주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삶이란 늘 한정되어 있어서 끝을 향해 달리는 시간을 멈출 도리가 없다.

자식이 자라난 만큼 부모는 늙어간다.

아이가 진짜 어른이 되는 시간, 그 시간을 곁에서 누구보다 응원하고 기뻐해 주고 싶지만, 생의 인심은 그리 후하지 못하다.

삶은 참 박정하여서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은 늘 그 무언가를 잃는 순간이다.

너무 당연한 것, 아주 가까운 것, 지나치게 익숙한 것들은 잃을 때야 그 진짜 가치를 알 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외롭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니까.

 

 

 

 

인간의 능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취월장, 각종 도구가 발명되고 인간 장수의 비결도 발견되고, 우리는 과거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멋진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천 년 전의 사상가와 철학가들이 남긴 말, 오랜 옛날의 인간이 느꼈던 '감정'이나 '행복'에 관한 말이나 그 가치는 아직까지도 우스울 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놀라운 도구를 갖고 어떤 쾌적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도 인간이 느끼는 것은 내내 마찬가지다.

p.104

 

 

'도쿄타워'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의 시간까지 살아온 이야기가 담담하게 담겨있다.

자신의 좋은 부분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담지 않고, 부족하고 무능하고 모자란 부분까지도 서슴없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못난 인간이다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리 흔하진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의 어둡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모두 내보인다.

왜일까, 왜 솔직해지고 싶었던 걸까.

 

속죄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와 영영 이별한 뒤에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나를 경멸하고 싶기도 했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차라리 나를 비난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모자란 사람이고, 엄마에게 이렇게 잘못했다고, 너무나 많은 후회들이 나를 숨 막히게 찔러대서 살 수가 없다고, 차라리 나를 때려달라고, 위로하지 말고 비난하고 욕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원래 그렇다.

마지막이 오면 항상 남는 건 후회와 잘못뿐이다.

부모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다 같은 심정일 테지.

나는 그 슬픔을 두 번이나 겪었는데도 하나도 익숙해지지 못해서, 매번 그렇게 자책을 하고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나를 할퀴고 할퀴고 할퀴다 지칠 때까지.

 

그때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었다.

엄마와의 추억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엄마에게 잘못한 일들을 고해성사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속에서 뒤엉켜 정리되지 못한 채 나를 괴롭히고 찌르는 감정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싶었다.

나의 어두움, 부족함, 이기심,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모든 것들을 햇볕 아래 꺼내놓고 싶었다.

엄마 앞에서... 다 꺼내 보이지 못했던 마음과 미안함, 그리고 감사함과 사랑의 이름들.

그것들을 세상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세상이 아닌 어디에라도 가닿으라고.

 

 

 

이런 일이, 이런 식의 죽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모든 죽음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늙어가고 낡아가고 해어지고 무너지고 스러져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돌연 아무런 맥락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도 있었다. 그 죽음을 의식하면 살아있는 것조차 두려워진다. 어떤 그리움도 미래도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p.183

 

 

 

'늙어지고 낡아가고 해어지고 무너져 스러져가는 죽음', 느닷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

다른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어떤 모습으로 어떤 순간에 찾아와도 죽음은 낯설다.

당황스럽고, 느닷없다.

어떻게 해도 준비가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우리는 속고 있을 뿐, 돌연 닥친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다.

어차피 한 번뿐인 죽음이라 예습도 복습도 불가능한 것이다.

 

맥락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커다란지 겪은 사람은 알 것이다.

갑자기 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일.

그 일은 너무 고통스럽고도 잔인하다.

하지만 예견된, 죽음을 향해 자꾸만 기울어가는 가족을 지켜보는 일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속수무책으로 죽음에게 엄마를 빼앗겨야 하는 마사야를 보며 지난 시간의 내가 떠올랐다.

하루하루 착실하게 죽음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기만 하는 엄마를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그렇게도 무기력하고 잔인한 순간을 통과해 엄마를 잃었다.

죽음에게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더더욱 참회록인 것이다.

 

 

 

 

말과 돈으로는 안되는 크나큰 것이 있다. 시간을 들이고 수고를 기울이지 않으면 전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다.

아부지의 인생은 큼직하게 보였지만, 엄니의 인생은 열여덟 살의 내가 보아도 어쩔 수 없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건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내게 나눠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p.192

 

 

 

나도 엄마의 인생을 얼마간 상속받았다.

우리 집은 사 남매니까 사분의 일씩의 인생을 나눠가진다 해도 엄마의 인생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엄마는 우리를 낳고 무엇으로 사셨을까.

자신의 인생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도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섭섭한 얼굴 한번 하지 않았던 엄마.

엄마에겐 엄마의 인생이라는 것이 있긴 했던 걸까.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마도 엄마는 자식들을 걱정하셨겠지.

내내 자식을 위해 살아왔던 삶의 습관처럼.

 

자식이라는 건 이기적인 존재다.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내게 주었다 해도 감사함을 모른다.

마치 나 혼자 세상에 나와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살았던 것 같이 뻔뻔하게 군다.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기대고 보채다가,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노터치를 외친다.

자식은 내내 그런 존재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신이 부모가 되면, 그때서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자라난 만큼, 딱 그만큼의 부모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미처 그 마음들을 다 헤아려보기도 전에 부모님을 잃게 되면, 내내 후회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된다.

어느새 엄마의 얼굴을 내가 하고 있다.

내가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가 내게 말하고 행동할 때, 엄마의 마음을 그때서야 알게 되어 가슴이 미어진다.

아이가 내게 준 상처보다, 내가 엄마에게 준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의 고통이 훨씬 더 크다.

 

 

서글프다.

이 책을 읽고도 전화할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엄마를 떠올리며, 아빠를 떠올리며 더 가까이 지내야겠다고, 더 다정한 딸이 되겠다고 다짐조차 할 수 없는 오늘의 시간이 참 차갑다.

 

 

 

 

' 원래 희망이란 있는 것이라고도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땅에는 애초에 길이란 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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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과 나 : 너에게로 가기까지
정유석 지음 / 스칼렛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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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은 얼마나 많은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가.

조용하고 단정한, 그래서 안정되고 편안한 사랑의 얼굴로

때로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는 사랑.

물 흐르듯 당연한 사랑도, 어느 날 갑자기 번개에 맞은 것처럼 깨닫게 되는 사랑도, 견디고 인내하는 참기만 하는 사랑도, 모든 걸 걸고 활활 타오르다 재만 남은 사랑도 모두 그저 '사랑'인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그렇게 조용할 수 있으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렇게 힘든 게 사랑일 리 없다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얼굴이 하나가 아니라서 우리는 이토록 사랑에 매혹당하는 게 아닐까.

사랑의 얼굴이 오직 하나라면 우리가 이토록 헤매고 고민하고 흔들리는 일 또한 없을 테니.

사랑이 여러 얼굴을 가지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늘 당혹스러우면서도 기어이 매혹당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내가 본 사랑은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책에 붙잡혀 있었다.

맹목과 집착으로 서로를 놓을 수 없는 두 사람.

처음부터 너였던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몰라 사랑 앞에 더 헤매었던 그들.

어떻게 변질되어도 결국 그 본질이 누구보다 올곧고 순수했던 그들에게 '사랑'말고 어떤 이름이 필요할까.

세상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고 싶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가지기 위해 세상이 그어놓은 선들을 굳건히 넘고 또 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 나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을 깊이 공감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후작과 나'는 놀랍게도 현대물이다.

(나만 시대물이라고 착각했는지도;;;)

현대의 영국 귀족 가문의 남자, 니콜라스와 고용인의 입양된 딸 진,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일곱 살과 열 살에 서로를 만나게 된 둘은 그렇게 내내 온 생을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맹목인지도 알지 못한 채 이름 붙인 적 없는 감정에 묶여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며 자라난다.

몸이 커가는 만큼 자라나는 감정을 숨기고 누르기 바빴던 닉에게 온몸으로 돌진하는 진.

사랑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욕망이라는 거짓을 들이대며 닉을 소유하고자 했던 진에게 어쩔 도리 없이 넘어가버린 닉은 열여덟의 진에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사랑을 말하지 못하므로 섹스를 말하는 둘.

너무 어린 그들의 섹스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안타깝다.

서로에게 가닿고 싶은 간절함, 서로가 서로의 것임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을 다르게 표현할 길이 없었던 둘은 섹스에 그 모든 것을 감춘다.

그러니까 섹스가 그들에겐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사랑의 고백이며 동시에 사랑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감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둘은 신분의 차이와 배경의 한계 앞에서 더 이상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무엇으로라도 서로를 소유하고 싶어 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몸의 욕망 뒤에 조심스레 감춰진 채 위태롭게 이어졌다. 

 

 

 

그 애가 보는 것은 오직 닉 웨즐리뿐. 그건 주변에 있는 그 어느 누구보다 약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만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최대한 감추고 최대한 물러서겠지.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기 전에 그나마 제가 가진 것마저 포기해 가면서까지.

p.233

 

 

 

서로가 자신 때문에 무언가를 잃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을 외면하기로 한다.

내 사랑 때문에 상대가 다치게 될까 봐, 내 사랑 때문에 상대가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봐, 혹시라도 내 사랑이 맹목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목을 조르게 될까 봐 한걸음 물러선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버리는 형태로 헤어짐을 맞이하지만 결국 서로를 위한 물러섬이었다.

그 한 걸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거웠는지는 누구라고 모를까.

 


 
그건 명백한 유혹이었다. 어릴 적에는 전속력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부딪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그를 안달 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결국 그가 버텨 내지 못하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P.310

멈춰있던 그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순간, 진짜 사랑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게 된 순간, 서로를 걱정하느라 자꾸만 주춤거리는 그 걸음들이 예쁘기만 했다.

그런 바보 같음이, 멍청이 같은 결정들이 결국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과 배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떤 실수도 이기심도 바닥을 치는 도덕심마저 그저 예뻐할 수밖에.

때로는 너무 깊어서 스스로도 그 바닥에 깔린 알맹이를 찾아내지 못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모든 시작의 걸음의 첫발을 내디뎌준 진의 용기와 올곧음을 사랑한다.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진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사랑은 외면하려고 노력한 멍청이지만) 매번 진의 손을 꼭 잡아준 닉의 잘못된 배려도 사랑한다.

서로를 너무 아껴서 다른 형태로 서로를 사랑해야 했던 둘.

미숙했지만 깊고 곧았던 둘의 사랑이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부지런히 넘어줘서 참 감사하다.

 

 

 

 

아마도 누군가는 첫 장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가 깜짝 놀라서 멈출지도 모르겠다.

십 대의 섹스에 대해 나름 관대한 ( 옳다는 게 아니라 현실의 반영이라는 관점에서 책에 등장하는 십 대의 섹스에 대해 관조하는 편에 가까운 ) 나조차도 여주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해 책 읽기를 멈췄으니까 말이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인의 작은 체구나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열아홉의 주인공의 모습이 훨씬 더 어리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쓰인 도입부 때문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내가 이 주인공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책장을 덮어두었다가 며칠은 지나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도 앞부분에서는 자꾸만 머뭇거려진 게 사실이다.

 

 

의외로 로설 독자분들 중 십 대의 섹스에 심한 거부감을 지니신 분들이 많다.

그리고 남주의 절대적 정절을 원하는 분들 또한 많은 걸로 알고 있는지라..... 이 책의 진짜 묘미를 느끼기도 전에 그런 부분에서 진입장벽을 느끼고 멈춰버리는 분들이 있으실 것만 같다는 우려가 들었다.

나도 가끔 책을 읽다가 어떤 부분에 발이 걸려 넘어진 후 너무 쉽게 뒤돌아버리는 경우가 있으니까.

19금 도서인데다 씬이 여럿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만큼 외설스럽거나 퇴폐적이지 않다는 것.

(내가 너무 외설스럽거나 퇴폐적이라 그렇게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잠깐.....움찔)

입만 되바라진 여주와 여주를 아끼느라 여주한정 금욕적인, 몸만 되바라진 남주가 등장하는 씬에 비해 사실은 굉장히 건전하다는 게 함정.

섹스는 그들에게 그저 사랑을 표현하는 한 형태일 뿐이다.

섹스가 쾌락의 도구로 사용되는 책도 참 많다. (특히나 요즘 나오는 로설 이북에서는 엄청나다는 소문이..;;)

쾌락과 사랑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혼돈하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그 간극의 차이를 예민하게 캐치해내고야 만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느끼는 것이다.

몸의 오르가슴을 넘어 심장의 오르가슴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나누는 섹스가 단순히 쾌락을 위한 행위가 아닌 완벽한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완충된 사랑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절대 섹스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심장이 없는 섹스가 주는 허무를 견뎌낼 수가 없으니까.

 

 

이 책 속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장면이었다.

다시 재회한 둘의 섹스 장면.

누구보다 기민하게 감정적 오르가슴에 반응하는 남주는 헤어질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보지만 결국에는 사랑이 빠진 섹스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왜 나를 안아주지 않느냐고, 예전처럼 내 목을 꽉 끌어안고 온몸으로 자신을 안아 주기를 원하는 남주의 말에서 울컥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너무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그동안 사랑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외면하고 질책하던 남주에게서 터져 나온 사랑의 진심이 안쓰러워서 가슴이 저릿했다.

그렇게 무엇으로 포장하려고 애써봐도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던 사랑의 맨얼굴이 발가벗고 살을 맞댄 순간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터져 나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섹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체온을 온전히 느끼는 일이라고 믿는 나에게는 그래서 더 찡한 순간이었던가 보다.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체온을 되찾는 순간이었으니까.

 

쾌락을 전면부에 내세운 19금 로설에 지쳐서 무엇을 봐도 감흥이 없던 요즘이었는데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섹스' 그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사랑과 섹스의 불가분의 관계를 정직하고 섬세하게 관통한 글이라 다 읽은 후의 남겨진 느낌이 더 좋았다.

사랑의 이름으로 섹스를 변질시키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19금 로설중 많은 책들이 섹스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떤 행위든 용납하는 반면, 섹스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도 여주를 함부로 대하거나 성적인 강요나 성적인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주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시작이 엄청나서(?) 오해할 뻔했던 책은, 사실은 너무 곧고 단정한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어 질 것만 같다.

오로지 서로에게 서로뿐인,

그래서 도저히 벗어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었던 사랑에 묶여 서로를 덜 다치게 하려고 몸부림치느라 스스로 상처받고 힘들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

안타까우면서도 찡한 아름다운 사랑의 한 형태를 엿보았던 시간이었다.


 

 

 

첫 번째에서 놓쳤던 사랑의 숨겨진 언어들을

두 번째 읽으면서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지라, 두 번 읽기를 추천해본다.

( 그들의 사랑의 역사를 다 알고 다시 들여다보며 숨겨진 사랑의 표현들을 엿보는 묘미가 있다.ㅎ)

 

 

 

처음부터 19금을 들이대지만 단단한 알맹이를 품고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께 추천!

오랫동안 서로에게 휩싸여 오직 하나뿐인 사랑에 열광하시는 분들께 추천!

신분 차이를 느끼기 힘든 현대에서 진짜 후작과의 신분 차이를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 추천!

오로지 여주를 위한, 여주에 의한, 여주뿐인 남주의 사랑을 보고 싶다면 추천!

비틀리고 넘어지고 도덕적인 기준에 부합하더라도 그저 맹목적인 사랑이 좋다면 추천!

섹스와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으시다면 추천!

그리고 꼭, 끝까지 읽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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