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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평점 :

하지만 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p.56
차가운 도쿄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모든 나라는 모두 이런 도시를 가지고 있다.
돈의 흐름에 따라 모여들고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화려하지만 차가운 얼굴을 한 도시.
나는 책 속의 도쿄를 읽으며, 서울을 떠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드는 잿빛 도시.
콘크리트의 딱딱함과 차가움을 딛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빙글빙글 도는 도쿄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서울..
국경을 넘어도 달라지는 게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차갑고 낯선 도시를 견디며.
책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나는 하나도 모른다.
일본에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럼에도 그가 그리는 시골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시골과 묘하게 닮아있다.
일본과 우리는 국민성이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느끼며 살아왔는데, 책 속에서는 하나 다를 게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어쩔 수 없게 닮은 꼴인 걸까.
우리는 왜 다른 곳에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도쿄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발에 밟힐 만큼 자유가 굴러다닌다.
떨어진 잎사귀처럼 빈 깡통처럼 어디에나 굴러다닌다.
고향이 귀찮아져서, 부모의 감시의 눈이 싫어서, 그 멋진 자유라는 것을 원하며 허위허위 찾아오는 것이지만, 너무도 쉽사리 눈에 들어오는 자유에 김이 빠져 차츰 그것을 갖고 놀아대게 된다.
스스로를 훈계할 능력이 없는 자가 소유한 질 낮은 자유는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키고 그 인간의 몸뚱이를 길가 진흙 구덩이로 끌고 들어간다.
p.230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방종한 이십 대를 거쳐 워커홀릭의 삼십 대를 지나 짙은 외로움을 짊어진 사십 대에서 멈춘다.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어쩌다 보니 도쿄에서 어른의 시간을 시작하게 되었다.
적당히, 내키는 대로, 의미 없는 대학생활을 버티다가 결국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의 끝까지 가닿은 그가 바닥을 치고 서서히 다시 날아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일본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무기력의 단면을 여과 없이 그려낸 느낌이랄까.
한국의 젊은이들이 꿈을 잃고, 내일이 없이, 오늘만을 간신히 살아내는 시간이 한없이 지속된다면 비단 남의 나라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시대에는 무기력이 역병처럼 번져나가 모두들 당연한 듯 내일이 없는 삶을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난다.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벗어나 차츰차츰 일을 하고, 일상을 회복해가는 과정 또한 무기력의 나락으로 깊이 빠져들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바닥에 닿으면 그다음은 무조건 바닥을 차고 올라 수면으로 떠오르는 게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그렇게 무엇에도 흥미가 없던 그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게 되는 순간, 멈춰있던 일상이 다시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어른의 일, 어른의 책무, 어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뒤늦게 늙어버린 엄마를 돌아보게 된다.
그가 방황하고 방종한 시간 동안 묵묵히 그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어느새 늙어버린 엄마.
그런 엄마와 뒤늦게 함께 도쿄살이를 시작한다.
하지만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기다려 주지 못한다.
한없이 기다려주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삶이란 늘 한정되어 있어서 끝을 향해 달리는 시간을 멈출 도리가 없다.
자식이 자라난 만큼 부모는 늙어간다.
아이가 진짜 어른이 되는 시간, 그 시간을 곁에서 누구보다 응원하고 기뻐해 주고 싶지만, 생의 인심은 그리 후하지 못하다.
삶은 참 박정하여서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은 늘 그 무언가를 잃는 순간이다.
너무 당연한 것, 아주 가까운 것, 지나치게 익숙한 것들은 잃을 때야 그 진짜 가치를 알 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외롭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니까.
인간의 능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취월장, 각종 도구가 발명되고 인간 장수의 비결도 발견되고, 우리는 과거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멋진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천 년 전의 사상가와 철학가들이 남긴 말, 오랜 옛날의 인간이 느꼈던 '감정'이나 '행복'에 관한 말이나 그 가치는 아직까지도 우스울 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놀라운 도구를 갖고 어떤 쾌적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어도 인간이 느끼는 것은 내내 마찬가지다.
p.104

'도쿄타워'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의 시간까지 살아온 이야기가 담담하게 담겨있다.
자신의 좋은 부분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담지 않고, 부족하고 무능하고 모자란 부분까지도 서슴없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못난 인간이다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리 흔하진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의 어둡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모두 내보인다.
왜일까, 왜 솔직해지고 싶었던 걸까.
속죄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와 영영 이별한 뒤에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나를 경멸하고 싶기도 했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차라리 나를 비난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모자란 사람이고, 엄마에게 이렇게 잘못했다고, 너무나 많은 후회들이 나를 숨 막히게 찔러대서 살 수가 없다고, 차라리 나를 때려달라고, 위로하지 말고 비난하고 욕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원래 그렇다.
마지막이 오면 항상 남는 건 후회와 잘못뿐이다.
부모를 잃은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다 같은 심정일 테지.
나는 그 슬픔을 두 번이나 겪었는데도 하나도 익숙해지지 못해서, 매번 그렇게 자책을 하고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나를 할퀴고 할퀴고 할퀴다 지칠 때까지.
그때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었다.
엄마와의 추억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엄마에게 잘못한 일들을 고해성사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속에서 뒤엉켜 정리되지 못한 채 나를 괴롭히고 찌르는 감정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싶었다.
나의 어두움, 부족함, 이기심,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모든 것들을 햇볕 아래 꺼내놓고 싶었다.
엄마 앞에서... 다 꺼내 보이지 못했던 마음과 미안함, 그리고 감사함과 사랑의 이름들.
그것들을 세상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 세상이 아닌 어디에라도 가닿으라고.

이런 일이, 이런 식의 죽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모든 죽음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늙어가고 낡아가고 해어지고 무너지고 스러져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돌연 아무런 맥락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도 있었다. 그 죽음을 의식하면 살아있는 것조차 두려워진다. 어떤 그리움도 미래도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p.183
'늙어지고 낡아가고 해어지고 무너져 스러져가는 죽음', 느닷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
다른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어떤 모습으로 어떤 순간에 찾아와도 죽음은 낯설다.
당황스럽고, 느닷없다.
어떻게 해도 준비가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우리는 속고 있을 뿐, 돌연 닥친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다.
어차피 한 번뿐인 죽음이라 예습도 복습도 불가능한 것이다.
맥락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커다란지 겪은 사람은 알 것이다.
갑자기 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일.
그 일은 너무 고통스럽고도 잔인하다.
하지만 예견된, 죽음을 향해 자꾸만 기울어가는 가족을 지켜보는 일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속수무책으로 죽음에게 엄마를 빼앗겨야 하는 마사야를 보며 지난 시간의 내가 떠올랐다.
하루하루 착실하게 죽음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기만 하는 엄마를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그렇게도 무기력하고 잔인한 순간을 통과해 엄마를 잃었다.
죽음에게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더더욱 참회록인 것이다.

말과 돈으로는 안되는 크나큰 것이 있다. 시간을 들이고 수고를 기울이지 않으면 전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다.
아부지의 인생은 큼직하게 보였지만, 엄니의 인생은 열여덟 살의 내가 보아도 어쩔 수 없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건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내게 나눠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p.192
나도 엄마의 인생을 얼마간 상속받았다.
우리 집은 사 남매니까 사분의 일씩의 인생을 나눠가진다 해도 엄마의 인생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엄마는 우리를 낳고 무엇으로 사셨을까.
자신의 인생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도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섭섭한 얼굴 한번 하지 않았던 엄마.
엄마에겐 엄마의 인생이라는 것이 있긴 했던 걸까.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마도 엄마는 자식들을 걱정하셨겠지.
내내 자식을 위해 살아왔던 삶의 습관처럼.
자식이라는 건 이기적인 존재다.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뚝 잘라 내게 주었다 해도 감사함을 모른다.
마치 나 혼자 세상에 나와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살았던 것 같이 뻔뻔하게 군다.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기대고 보채다가,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노터치를 외친다.
자식은 내내 그런 존재로 살게 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신이 부모가 되면, 그때서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자라난 만큼, 딱 그만큼의 부모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미처 그 마음들을 다 헤아려보기도 전에 부모님을 잃게 되면, 내내 후회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된다.
어느새 엄마의 얼굴을 내가 하고 있다.
내가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가 내게 말하고 행동할 때, 엄마의 마음을 그때서야 알게 되어 가슴이 미어진다.
아이가 내게 준 상처보다, 내가 엄마에게 준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의 고통이 훨씬 더 크다.
서글프다.
이 책을 읽고도 전화할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엄마를 떠올리며, 아빠를 떠올리며 더 가까이 지내야겠다고, 더 다정한 딸이 되겠다고 다짐조차 할 수 없는 오늘의 시간이 참 차갑다.

' 원래 희망이란 있는 것이라고도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땅에는 애초에 길이란 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