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과 나 : 너에게로 가기까지
정유석 지음 / 스칼렛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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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은 얼마나 많은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가.

조용하고 단정한, 그래서 안정되고 편안한 사랑의 얼굴로

때로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는 사랑.

물 흐르듯 당연한 사랑도, 어느 날 갑자기 번개에 맞은 것처럼 깨닫게 되는 사랑도, 견디고 인내하는 참기만 하는 사랑도, 모든 걸 걸고 활활 타오르다 재만 남은 사랑도 모두 그저 '사랑'인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그렇게 조용할 수 있으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렇게 힘든 게 사랑일 리 없다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얼굴이 하나가 아니라서 우리는 이토록 사랑에 매혹당하는 게 아닐까.

사랑의 얼굴이 오직 하나라면 우리가 이토록 헤매고 고민하고 흔들리는 일 또한 없을 테니.

사랑이 여러 얼굴을 가지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늘 당혹스러우면서도 기어이 매혹당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내가 본 사랑은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책에 붙잡혀 있었다.

맹목과 집착으로 서로를 놓을 수 없는 두 사람.

처음부터 너였던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몰라 사랑 앞에 더 헤매었던 그들.

어떻게 변질되어도 결국 그 본질이 누구보다 올곧고 순수했던 그들에게 '사랑'말고 어떤 이름이 필요할까.

세상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고 싶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가지기 위해 세상이 그어놓은 선들을 굳건히 넘고 또 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 나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을 깊이 공감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후작과 나'는 놀랍게도 현대물이다.

(나만 시대물이라고 착각했는지도;;;)

현대의 영국 귀족 가문의 남자, 니콜라스와 고용인의 입양된 딸 진,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일곱 살과 열 살에 서로를 만나게 된 둘은 그렇게 내내 온 생을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맹목인지도 알지 못한 채 이름 붙인 적 없는 감정에 묶여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며 자라난다.

몸이 커가는 만큼 자라나는 감정을 숨기고 누르기 바빴던 닉에게 온몸으로 돌진하는 진.

사랑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욕망이라는 거짓을 들이대며 닉을 소유하고자 했던 진에게 어쩔 도리 없이 넘어가버린 닉은 열여덟의 진에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사랑을 말하지 못하므로 섹스를 말하는 둘.

너무 어린 그들의 섹스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안타깝다.

서로에게 가닿고 싶은 간절함, 서로가 서로의 것임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을 다르게 표현할 길이 없었던 둘은 섹스에 그 모든 것을 감춘다.

그러니까 섹스가 그들에겐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사랑의 고백이며 동시에 사랑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감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둘은 신분의 차이와 배경의 한계 앞에서 더 이상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무엇으로라도 서로를 소유하고 싶어 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몸의 욕망 뒤에 조심스레 감춰진 채 위태롭게 이어졌다. 

 

 

 

그 애가 보는 것은 오직 닉 웨즐리뿐. 그건 주변에 있는 그 어느 누구보다 약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만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최대한 감추고 최대한 물러서겠지.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기 전에 그나마 제가 가진 것마저 포기해 가면서까지.

p.233

 

 

 

서로가 자신 때문에 무언가를 잃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을 외면하기로 한다.

내 사랑 때문에 상대가 다치게 될까 봐, 내 사랑 때문에 상대가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봐, 혹시라도 내 사랑이 맹목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목을 조르게 될까 봐 한걸음 물러선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버리는 형태로 헤어짐을 맞이하지만 결국 서로를 위한 물러섬이었다.

그 한 걸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거웠는지는 누구라고 모를까.

 


 
그건 명백한 유혹이었다. 어릴 적에는 전속력으로 달려와 온몸으로 부딪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그를 안달 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결국 그가 버텨 내지 못하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P.310

멈춰있던 그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순간, 진짜 사랑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게 된 순간, 서로를 걱정하느라 자꾸만 주춤거리는 그 걸음들이 예쁘기만 했다.

그런 바보 같음이, 멍청이 같은 결정들이 결국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과 배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떤 실수도 이기심도 바닥을 치는 도덕심마저 그저 예뻐할 수밖에.

때로는 너무 깊어서 스스로도 그 바닥에 깔린 알맹이를 찾아내지 못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모든 시작의 걸음의 첫발을 내디뎌준 진의 용기와 올곧음을 사랑한다.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진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사랑은 외면하려고 노력한 멍청이지만) 매번 진의 손을 꼭 잡아준 닉의 잘못된 배려도 사랑한다.

서로를 너무 아껴서 다른 형태로 서로를 사랑해야 했던 둘.

미숙했지만 깊고 곧았던 둘의 사랑이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부지런히 넘어줘서 참 감사하다.

 

 

 

 

아마도 누군가는 첫 장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가 깜짝 놀라서 멈출지도 모르겠다.

십 대의 섹스에 대해 나름 관대한 ( 옳다는 게 아니라 현실의 반영이라는 관점에서 책에 등장하는 십 대의 섹스에 대해 관조하는 편에 가까운 ) 나조차도 여주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해 책 읽기를 멈췄으니까 말이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인의 작은 체구나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열아홉의 주인공의 모습이 훨씬 더 어리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쓰인 도입부 때문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내가 이 주인공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책장을 덮어두었다가 며칠은 지나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도 앞부분에서는 자꾸만 머뭇거려진 게 사실이다.

 

 

의외로 로설 독자분들 중 십 대의 섹스에 심한 거부감을 지니신 분들이 많다.

그리고 남주의 절대적 정절을 원하는 분들 또한 많은 걸로 알고 있는지라..... 이 책의 진짜 묘미를 느끼기도 전에 그런 부분에서 진입장벽을 느끼고 멈춰버리는 분들이 있으실 것만 같다는 우려가 들었다.

나도 가끔 책을 읽다가 어떤 부분에 발이 걸려 넘어진 후 너무 쉽게 뒤돌아버리는 경우가 있으니까.

19금 도서인데다 씬이 여럿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만큼 외설스럽거나 퇴폐적이지 않다는 것.

(내가 너무 외설스럽거나 퇴폐적이라 그렇게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잠깐.....움찔)

입만 되바라진 여주와 여주를 아끼느라 여주한정 금욕적인, 몸만 되바라진 남주가 등장하는 씬에 비해 사실은 굉장히 건전하다는 게 함정.

섹스는 그들에게 그저 사랑을 표현하는 한 형태일 뿐이다.

섹스가 쾌락의 도구로 사용되는 책도 참 많다. (특히나 요즘 나오는 로설 이북에서는 엄청나다는 소문이..;;)

쾌락과 사랑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혼돈하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그 간극의 차이를 예민하게 캐치해내고야 만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느끼는 것이다.

몸의 오르가슴을 넘어 심장의 오르가슴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나누는 섹스가 단순히 쾌락을 위한 행위가 아닌 완벽한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완충된 사랑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절대 섹스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심장이 없는 섹스가 주는 허무를 견뎌낼 수가 없으니까.

 

 

이 책 속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장면이었다.

다시 재회한 둘의 섹스 장면.

누구보다 기민하게 감정적 오르가슴에 반응하는 남주는 헤어질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보지만 결국에는 사랑이 빠진 섹스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왜 나를 안아주지 않느냐고, 예전처럼 내 목을 꽉 끌어안고 온몸으로 자신을 안아 주기를 원하는 남주의 말에서 울컥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것을 너무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그동안 사랑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외면하고 질책하던 남주에게서 터져 나온 사랑의 진심이 안쓰러워서 가슴이 저릿했다.

그렇게 무엇으로 포장하려고 애써봐도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던 사랑의 맨얼굴이 발가벗고 살을 맞댄 순간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터져 나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섹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체온을 온전히 느끼는 일이라고 믿는 나에게는 그래서 더 찡한 순간이었던가 보다.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체온을 되찾는 순간이었으니까.

 

쾌락을 전면부에 내세운 19금 로설에 지쳐서 무엇을 봐도 감흥이 없던 요즘이었는데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섹스' 그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사랑과 섹스의 불가분의 관계를 정직하고 섬세하게 관통한 글이라 다 읽은 후의 남겨진 느낌이 더 좋았다.

사랑의 이름으로 섹스를 변질시키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19금 로설중 많은 책들이 섹스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떤 행위든 용납하는 반면, 섹스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도 여주를 함부로 대하거나 성적인 강요나 성적인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주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시작이 엄청나서(?) 오해할 뻔했던 책은, 사실은 너무 곧고 단정한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어 질 것만 같다.

오로지 서로에게 서로뿐인,

그래서 도저히 벗어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었던 사랑에 묶여 서로를 덜 다치게 하려고 몸부림치느라 스스로 상처받고 힘들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

안타까우면서도 찡한 아름다운 사랑의 한 형태를 엿보았던 시간이었다.


 

 

 

첫 번째에서 놓쳤던 사랑의 숨겨진 언어들을

두 번째 읽으면서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지라, 두 번 읽기를 추천해본다.

( 그들의 사랑의 역사를 다 알고 다시 들여다보며 숨겨진 사랑의 표현들을 엿보는 묘미가 있다.ㅎ)

 

 

 

처음부터 19금을 들이대지만 단단한 알맹이를 품고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께 추천!

오랫동안 서로에게 휩싸여 오직 하나뿐인 사랑에 열광하시는 분들께 추천!

신분 차이를 느끼기 힘든 현대에서 진짜 후작과의 신분 차이를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 추천!

오로지 여주를 위한, 여주에 의한, 여주뿐인 남주의 사랑을 보고 싶다면 추천!

비틀리고 넘어지고 도덕적인 기준에 부합하더라도 그저 맹목적인 사랑이 좋다면 추천!

섹스와 사랑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으시다면 추천!

그리고 꼭, 끝까지 읽기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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