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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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강한 심장을 준비하라!"

 

 

도대체 그 강한 심장은 어디다 쓰려고 준비하라고 하는 것일까.

너무 잔혹해서? 너무 공포스러워서? 너무 슬퍼서?

궁금했다.

무엇을 어떻게 담고 있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 단단히 심장을 무장해야 하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폐허 속에 홀로 서있는 무력한 고독을 느꼈다.

바짝 메말라 있는 이 소설은 읽을수록 목이 마르게 했다.

죽음 같은 갈증을 내내 불러왔다.

 

그렇다.

그런 소설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고독과 메마른 슬픔,

인간 내면의 이기심과 인간성의 바닥을 무심한 목소리로 고저 없이 들려준다.

마치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실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 가장 알맞은 화자, 죽은 아이를 내세워.

 

 

 

 

죽음은 마치 캄캄한 밤처럼 딩씨 마을을 철저하게 뒤덮고 있었고, 주위의 다른 마을들도 뒤덮고 있었다. 매일 마을의 거리를 오가는 이야기는 전부가 검은 소식들뿐이었다. 어느 집 누구의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소식, 아니면 어느 집 누가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중략…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죽음은 매일 모든 집의 문 앞을 서성거렸다.

<딩씨 마을의 꿈> _ P.31

 

 

지금은 익숙하지 않는 '매혈'이라는 행위가 한때는 경제 발전을 일으킬 만큼 커다란 돈벌이 수단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중국에서는 그것이 대대적으로 행해졌고, 정부에서 장려하는 일이었던가 보다.

누구라도 피를 팔아 부를 축척할 수 있었고, 그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인 것 마냥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어느 마을에서는 그 매혈로 인해 집단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삿바늘과 소독솜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런 마을 중 하나, '딩씨 마을'이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되었다.

책 속에 이야기는 소설이기에 많은 꾸밈이 들어가 있겠지만,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우리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절망과 슬픔과 욕망이 한데 어우러져 어느 것이 절망이고 어느 것이 욕망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휘져어진 죽음의 마을, '딩씨 마을'.

그 속에서 죽음이 목전에 와도 물질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그것을 향해 팔을 뻗으며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참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죽음만이 절망이 아님을,

살아 있음도 지독한 절망임을 낱낱이 보여준다.

우리가 미처 꺼내놓지 못한, 아닌 척 포장하고 있던 물질적 욕망에 대한 민낯이 죽음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미 넋이 나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이 문 앞을 지키고 있어 어느 집에서도 더 이상 밖에 나가 농사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밖에 나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열병이 문틈으로 들어올까 봐 모든 문을 꼭 닫고 대문도 굳게 걸어 잠갔다. 사실은 열병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병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문 앞을 지켰다.

<딩씨 마을의 꿈> _ P.31

 

 

죽음의 그림자가 온 하늘을 뒤덮은 마을.

어느 집에서도 죽은 이를 만날 수 있는 마을.

그렇게 하나 둘 죽은 이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따라 마을도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한다.

 

매혈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딩후이의 아들은 사람들의 원망에 의해 독살당한다.

그렇게 죽어,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학교 옆 건물 앞에 묻힌다.

그곳에서 내내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고, 죽음을 지켜본다.

그가 바로 이 글의 화자, 딩샤오창이다.

 

아무것도 잘못 한 것이 없던 열두 살의 아이는 그렇게 매집을 했던 아빠의 욕심과 피를 팔았던 마을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했다.

모든 일에 돈이 있었다.

그 원인은 결국 늘 돈이었다.

더 잘 살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던 사람들의 욕심이 부른 참사였다.

그렇게 '에이즈가 창궐한 마을에서 '독'때문에 죽어야 했던 아이.

 

여기서부터 벌써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 더 얼마나의 탐욕과 욕심들을 마주쳐야 하는지 걱정스러워진다.

인간성을 뛰어넘는 물질에 대한 욕망, 그 끝 모를 탐욕이 한마을을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또 그 마을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소설은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중국 문학은 아주 예전에 장르소설로 접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일본 문학이 익숙한 것에 비해, 똑같이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학은 아직 낯설다.

읽어 본 경험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먼저 찾아읽게 되는 상황도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익숙한 중국의 소설들은 무협지, 판타지, 로맨스 같은 장르 소설들이 대부분이고 순문학은 멀게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중국의 영화는 그토록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반면 문학은 어째서 관심받지 못하는 걸까.

반대로 일본의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반면 문학은 널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이유는 뭘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국문학을 가장 좋아하는 나에겐 답을 알기 힘든 의문인 것 같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읽게 된 중국의 순문학.

역시나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낯섦을 느꼈다.

왠지 한자로 쓰인 시조를 읽는듯한 느낌도 받았다.

비슷한 문장의 반복이 자주 사용되는데, 그만큼 중요한 문장의 강조의 의미인 건지, 시조를 읽듯 운율을 느끼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옌롄커의 글쓰기의 특징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장 자체가 가지는 시적인 분위기와 꿈과 현실을 오가는 엇갈림으로 인해 더더욱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낯설던 문장은 6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읽는 동안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고유의 매력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아주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한, 한 편의 길고 긴 시를 읽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사람이 죽는 것이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등불이 꺼진 것과 같았다. 무덤을 파고 사람을 묻는 일이 삽을 들어 마을 어귀에 구덩이를 파고 죽은 고양이나 개를 묻는 것만큼이나 순조로웠다. 슬픔도 없었고, 울음소리도 없었다. 울음소리와 슬픔은 말라버린 강과 같아서 소리도 없고 호흡도 없었다. 사람들의 눈물은 맑게 갠 날 허공에 떨어지는 빗방울만큼이나 희박하여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딩씨 마을의 꿈> _ P.505~506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내내 나의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너무 흔해빠진 죽음 앞에 감흥도 슬픔도 잊어버린 사람들.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해석 불가한 절망을 먹으며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그런 세상이, 그런 슬픔이, 그런 절망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딩씨 마을이 아니라고 해도, 집단적 트라우마가 우리들의 목을 조르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인간성이 조금씩 휘발되는 경험을 느낀 적이 있으리라.

우리를 인간답게, 인간으로 살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돌아보라고 어쩌면 극한의 절망에 대해, 상실에 대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폐허를 떠도는 공허한 바람의 냄새를 풍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끝 간 데 모르는 고독을 느끼기도 하고, 한없는 절망과 메마른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절망을, 그 고독을, 이 슬픔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발견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에 홀로 선 공포가 우리를 찾아오더라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절망이 우리를 찾아와도,

그 폐허가 우리의 내면이 되어서는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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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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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리고, 내게 옳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가끔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더군요. 삶의 방향을 정하고 저만의 가치관을 찾는 일에 더욱 매달리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역사의 쓸모> 들어가는 글 _ p.5~6

 

 

 

인생의 질문의 순간, 삶의 길을 잃는 순간, 생이 흔들리는 순간, 저자는 역사에게 그 길을 묻는단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의 답 또한 역사 속에서 찾아내고, 나아갈 길 또한 역사 속에서 길잡이를 발견한다고 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저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 나라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하는 교양?

아니면 학교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혹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강제로 외워야 하는 공부의 하나?

정말 깊이 있게 제대로 역사를 궁금해하고, 그 역사 속의 사건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궁금해하고 있었을까.

역사를 그저 '역사'라는 명사로만 받아들이고 알고 있었던 나에게, '역사의 쓸모'는 움직이는 역사, 살아있는 역사, 여전히 흐르고 있는 동사의 '역사'를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바로 역사라는 사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삶을 살아가는 자세 또한 갑자기 꼿꼿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가 들려주는 역사에는 숨이 있다.

죽어있는, 죽어버린 시간의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여전히 숨 쉬고 존재하는 역사.

단순한 사건의 나열로서의 역사가 아닌, 그 사건 속을 살아냈던 인물들의 눈빛과 숨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전혀 다른 의미와 무게를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어있던 역사의 무게는 모래알처럼 허망하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버리곤 하지만, 살아있는 역사의 무게는 단단한 돌처럼 묵직하게 손안에 남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알고 있었던 사건, 안다고 생각했던 역사 속 인물들.

그들이 낯설고, 생경한 느낌으로 다시 찾아온다.

 

그가 들려주는,

살아서 움직이는 '역사'를 읽어보자.

 

 

 

 

 

또한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형조에 있는 죄목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죄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여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_ P.75~76

 

 

 

역사란 무엇인가.

너무 근본적인 질문 같지만 한 번도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나버린 시간들 속에 남겨진 어떤 사건들과 인물들의 나열, 그러니까 어제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 이야기 속에서 교훈을 얻거나 애국심을 기르거나 민족정신 같은 것들을 고양시켜주는 일종의 도구 같기도 했다.

그런 내게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아찔함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왜 정약용 선생을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기억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내내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세에 그런 사람으로 전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그런 사람으로 후세에 남겨지기를 원했다.

실록에 적히는 몇 줄의 글 때문에 천하의 죄인으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 몇 줄의 기록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더 많은 글과 더 많은 기록을 남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려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오늘 하루가 어떤 역사로 기록되어질지, 몇백 년이 지나 까마득히 먼 후세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읽히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지나간 시간이 아닌, 지나버린 기록이 아닌, 오늘의 시간, 오늘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역사에 한 줄의 기록도 남겨지지 않을 나의 하루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뛰어난 사람도, 부지런한 사람도,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다.

너무도 흔하고, 넘치게 많은 '아무개'중 한 명일 뿐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내가 죽고 난 후의 평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정약용처럼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서, 그처럼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없어서 그런 나의 오늘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 인물로 기록되기엔 나는 지나칠 만큼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나는 사실, 그저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고 남겨지고, 그것이 시간을 건너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내 삶의 기록들이 어떻게 역사가 되어지는지, 지금의 평범함이 어떤 식으로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현재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시간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의 시간을 넘어 더 먼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아주 먼 미래에 오늘의 시간들이 어떤 식으로 기록되고 읽히게 될지, 나의 사소한 행동과 말들이 어떻게 남겨질지, 그 모든 오늘에 대한 책임을 우리 모두 나눠지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열악한 환경에서도, 귀양을 가고 핍박을 받던 상황에서도 정약용은 '역사'의 오늘을 누구보다 생생히 또렷하게 살아냈다.

 

그를 만난 오늘,

우리도 역사를, 지금을, 오늘의 시간을 좀 더 또렷하게 바라봐야겠다.

대단한 기록으로 남겨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후세에 '시대를 망하게 한 인물'들 중 하나로 기록되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의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누군가는 그저 바라만 보고 누군가는 기꺼이 그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삶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계기로든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꼭 말하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 나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가능성을 불신하지 말라고. 그러니 우리 쫄지 맙시다. 이미 엉망이라면 바다에 발 한번 담근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할 걸음 내딛어보자고요. 어린 활보가 그랬듯이.

 

_______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_ P.202

 

 

 

책을 읽으면서 아는 인물의 새로운 면모를 자주 만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의 업적은 똑같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가짐은 새롭게 읽히곤 한다.

장보고의 일생도 그것 중 하나였다.

장보고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을 통해 비춰진 그의 모습은 익숙한 듯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보고의 모습뿐 아니라 그 사이사이의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장보고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냈다.

내가 조각조각 알고 있던 그의 모습 위로, 촘촘히 채워지는 그의 새로운 면모들이 그를 좀 더 제대로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여전히 칭송받는 사람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묻혀진 사람인 것 같아서 씁쓸함 또한 감출 수 없었다.

 

어디선가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중국 와 일본의 역사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 속에 그는 자신의 모습의 절반도 제대로 적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승자의 역사이고, 사대부의 역사인 기록 속에서 인물들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묻혀버리거나 왜곡되고 날조되기도 하기에 조금 더 면밀히, 새로운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는가 보다.

 

그렇게 숨은 인물 중 우리에게는 조금은 덜 알려졌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이 있다.

전 생애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대동법 전국 시행을 내내 외쳤던 김육.

이미 들어봤거나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낯설거나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역사를 배우던 시절에는 김육이라는 인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를 제외하고도 외워야 했던 인물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생애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을 왜 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까웠다.

다행히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김육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건 아니고 '조선왕조실톡'이라는 웹툰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쉽게 쓰인 역사서가 왜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역사서는 왠지 고루하고 지겨울 것만 같고, 흥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찾아읽지도 않게 된다.

그나마 TV 강의를 통해서 여러 명의 역사 강사의 인문학 강의가 인기를 끌고, 인기에 힘입어 여러 채널에서 방송이 되면서 나처럼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이야기 앞으로 끌어당겨 놓았다.

나도 참 좋아하며 각각의 강의들을 열심히 보고 듣고 했지만, 어쩐지 책으로까지는 손이 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역사의 쓸모'를 읽으면서 역사 책(?)에 대한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쉽고 재미있고 즐겁게 역사를 이야기해준다면 얼마든지 더 많은 책들을 읽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학생들도 분명 공부의 카테고리를 벗어나 훨씬 더 즐겁고 재미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튀어 오르곤 했다.

살아있는 역사는 살아있는 생각을 불러오는 법인가 보다.

책을 읽으며 깊이 고민하고 내게 맞게 소화하려고 노력했던 몇 가지 생각들에 대해 적어본다.

 

 

 

 

# 우리 아이들의 꿈에 대해_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망쳐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은 그들의 꿈이 '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했을 뿐,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이지요.

 

_____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_ P.205

 

 

 

큰애가 초등학생이었던 때의 일이다.

학부모 상담을 갔던 내게 선생님이 보여준 우리 아이의 설문지 속 답변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 모른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냐고 묻는 질문에 우리 아이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적어놓았다.

대통령, 의사, 판사, 연예인 같은 직업이 아니라 불투명하고 애매한 '행복한 사람'이라는 꿈을 적은 아이를 보며 내가 참 아들을 잘 키웠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준 아들에게 너무너무 고마웠다.

꿈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직업을 말한다.

하나의 직업이 '꿈'이 되는 세상이 나는 늘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참 줄기차게 아이의 꿈을 묻는 설문지를 집으로 보내곤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냐, 어떤 직업인이 될 것이냐를 묻는 설문지다.

아이가 원하는 직업과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나란히 적어서 제출해야 한다.

그때마다 나는 늘 '아이가 원하는 직업'이라고 적어보냈다.

아이가 쓴 직업을 똑같이 써서 보내면 될 텐데, 내겐 직업 자체보다 아이가 되고 싶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에 매번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꿈은 늘 바뀌었다.

유치원 때에는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되고 싶다고 했다.

키가 작은 아들에게 커다란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는 가수부터 작가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직업들이 등장했다.

다양한 직업을 알게 되고 다양한 꿈을 꾸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된 지금,

우리 아들에게 꿈을 물으면, '모르겠다' 라고 답한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지 모르겠단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동사'의 꿈을 꾸던 아이가 자라면서 '명사'의 꿈을 꾸더니 이제는 아예 꿈이라는 것을 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꿈을 포기하게 만든다. 너무 빨리 현실을 가르치고, 너무 빨리 직업을 선택하게 만든다.

책 속에서 저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중학교 때부터 꿈을 선택해서 고등학교 내내 그 꿈을 향해서만 걸어야 간신히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입시 제도가 난감하기 그지없다.

 

아직은 정확한 직업을 선택하지 않아도 좋을 나이다.

아니,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몰라도 괜찮은 나이다.

현실 따위 내버리고 그저 꿈을 꿈인 채로 꾸기만 해도 좋을 나이다.

그런 나이의 아이에게 직업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그러니까 아이가 있던 꿈도 잃고 마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대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좋다.

직업이 아니면 더 좋다.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길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이 아니라도, 시간이 지나 어느 날이라도 자신의 꿈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꿈이 '명사'가 아닌 '동사'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커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던 아이의 마음이 분명히 살아움직이는 꿈과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동사의 꿈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학생들도 그랬을 거예요. 어릴 적부터 이렇게 학습이 된 거죠. 누구도 그다음은 질문하지 않아요. 대법원장이 되어서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동사의 꿈을 물어봐야 하는데 명사의 꿈만 듣고 나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니까 아이들도 거기까지만 생각을 하게 돼요. 그리고 자라면서 꿈을 잃어버립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에 자신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원하는 삶의 윤곽이 잡히는 법인데 모두 대학 입시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다 보니까 그럴 틈이 없는 거죠.

 

__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_ P.211~212

 

 

 

 

 

 

# 미투, 여자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_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정신적 유산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우리는 전통이라 부르고 대부분 그것에 따르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죠. 하지만 저는 그 전통이라는 것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당연히 그래 왔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그 기원을 낱낱이 가려본 적 없는 것들을 기꺼이 심판대에 올리고 과연 내가 따를 만한 생각인지를 살펴보는 거지요. 나에게 맞지 않는 생각이라는 판단이 들면 받아들이지 말고, 그 생각이 수정되는 데 힘을 보태면 됩니다.

 

____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_ P.249

 

 

 

미투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어느 채널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당연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조심스럽고, 숨겨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피해자인 게 더 이상 부끄러울 일이 아닌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피해자에게 더 많은 질타가 쏟아지는 현상이 완벽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많은 것들을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그래도 수많은 미투가 쏟아지고, 그 미투를 바라보는 시각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긍정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 반갑기 그지없다.

가끔은 나도 공격적인 페미니즘이 싫어서 여자임에도 얼굴이 찌푸려지고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편파적이거나 너무 공격적이어서 피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산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옳은 방향으로 세상이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그 안에서 때로는 옳지 않아 보이거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목소리나 행동들도 튀어나오곤 하지만, 결국은 옳은 세상으로 뚫고 나갈 것을 믿는다.

 

이 챕터의 글을 읽으면서 더더욱 그런 믿음이 단단해졌다.

강경한 목소리에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조근조근하게 미투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옳음을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서 안도의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가 억압받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해야 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여성을 옭아맸던 케케묵은 관습과 전통을 이제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조선으로부터 시작된 여성 억압의 역사가 이토록 길었다는 게 더 놀라울 일이다.

이제는 그 시대를 허물고 새로운 시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맞다.

 

나도 모르게 전통에 따라 관습에 따라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살아온 시간들이 부끄러워진다.

같은 여자인 내가 여자를 그런 전통의 굴레에 따라 판단하고 정의 내렸던 순간들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그때는 그것이 맞는 줄 알았다.

그렇게 교육받고 강요받고 자랐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폐기물일 뿐이었다.

우리는 재활용도 불가능한 폐기물을 끌어안고 참 오랫동안 잘도 버텨왔다.

조선보다 더 앞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역사의 시간을 기억해야겠다.

우리의 뿌리가 그렇지 않았음을, 잘못된 악습이 우리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혀왔음을 인정해고 반성하며,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만들어 가야겠다.

 

당당한 미투의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 오늘을 사는 우리의 역사, 우리의 자세 _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역사라는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만큼 뒤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일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_ P.226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일생에 대해 서술한 챕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글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역사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내가 지금 누리는 것들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왔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의 죽음이 있었는지 모르지 않는다.

가장 아픈 시대는 일제강점기라고 생각하는 내게, 빼앗긴 나라를 후손에게 돌려주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투쟁하고 울부짖었던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하게 아려오고 숙연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런 희생을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대다.

내가 조국을 위해 투쟁하고 목숨을 버려야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닌, 감사의 마음과 존경의 마음을 갖추기만 해도 충분히 삶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는 시대인 것이다.

안일하고 나태하기 너무 쉬운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지금의 평화가 내내 이어질 것이라고 무한정 믿어버리고 만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앞선 시대의 수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에 살게 된 우리가 뒤이어 살게 될 세대를 위해 무임승차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면, 나는 무엇으로 그것을 지불할 수 있을까.

무임승차인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던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제국에서 민국으로, 백성에서 시민으로 변화를 이끌어냈던 사람들이 일제의 폭압에 항일운동으로 맞섰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여러 위험에 무엇으로 맞설 수 있을까요?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선거 참여겠죠. 시민의식이 다른게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정신, 법과 도덕을 준수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이릅니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다면, 권리만 찾고 의무는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시민사회가 탄생한 지 100년. 이제 시민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돌아 볼 시간입니다.

____________ <역사의 쓸모> _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_ P.281~282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았던 시간들에 대해 그렇지 않아도 부끄러워하는 요즘이다.

정치를 색안경 쓰고 바라봤던 나의 삐딱함을 반성하는 요즘이다.

유시민 작가님이 '알쓸신잡'에서 들려줬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면, 이 책은 정치에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되어 준다.

내가 잔다르크가 될 수 없다면, 혁명을 이끄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투표를 하고 정치에 참견하면서 나라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끝없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권리만 찾고 의무는 나 몰라라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좀 더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역사의 오늘을 책임진 지금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싶다.

 

작은 우리가 모여 나라를 이루고 있듯이, 작은 우리가 모여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의 세상,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야 하는 나라를 위해, 조금 더 역사에 눈을 뜨고 오늘의 역사에 깨어있어야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러모로 나를 부끄럽게 만든 책이다.

 

오늘의 부끄러움이 내일의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내일을 향한 오늘의 걸음에 어떤 의미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내가 잃어버렸던 나침판을 오늘 마주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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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내일 1~2 세트 - 전2권
라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어렵다.

특히나 그것이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면 더더욱 그 기다림의 길이가 길게만 여겨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여간해선 연재 글을 보지 않는다.

다음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작가는 작가대로 온 힘을 다하겠지만, 독자는 그 시간의 텀을 견뎌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재미있을수록 내일의 이야기를 기다리기가 힘이 든다.

누군가 밤새 내 곁에서 그 뒷이야기들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오랜만에 연재 중인, 아직도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읽었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책 한 권당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다음권을 기다리기가 좀 더 수월하게 느껴진다.

물론 큰 이야기의 축이 존재하지만 하나하나의 단편적인 이야기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고 생각의 길을 넓혀주니 그다음의 이야기를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리게 되나 보다.

 

이제 시작인 두 권의 책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들이 쓰일지 모르겠지만,

내 기다림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책을 만났다.

 

지금도 연재 중인 웹툰, 『내일』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늘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내일을 이야기한다.

오늘에서 멈춰버리고 싶은 사람들,

오늘만 살고 싶은 사람들,

내일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내일의 생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저승사자가 찾아간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 하는 사람들을 설득한다.

여기서 생을 멈추지 말라고, 계속 걸어야 한다고, 내일로 내일로, 끝없이 더 걸어야 한다고.

죽지 말라고, 살라고, 살고 싶지 않으냐고, 당신의 생의 끝은 오늘이 아니라고.

 

그들의 이야기에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생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하고 싶어진다.

왜, 왜냐고.

무엇 때문에 스스로 삶을 놓으려 했냐고.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느냐고.

오늘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게 만든 당신의 상처는 무엇이냐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살고 싶었던 거란다.

너무너무 누구보다 더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란다.

살고 싶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던 어느 하루, 그들은 누구보다 내일을 꿈꿨노라 고백하지도 못한 채 삶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고통과 슬픔과 절망에 등 떠밀려 생에서 사로 자꾸만 뒷걸음질 치다 결국 그렇게 죽음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으로 잡아당기는 저승사자라니,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그런데 작가가 그걸 해냈다.

죽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을 하는 그들에게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을 맡긴 것이다.

이보다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놀랍게도 그들은 정말 열심히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을 설득한다.

진심을 다해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연민한다.

 

 

 

 

1권에서는 취업 준비생인 최준웅이 구련과 임륭구를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쩌다 얼떨결에 그들과 얽혀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버린 준웅.

그 앞에 다시 나타난 그들은 자신을 저승사자라고 소개한다.

원래 준웅의 생은 아직도 너무 많이 남아있는데 그들의 실수 때문에 식물인간 상태로 3년을 보내게 되어버렸다.

나름의 자구책으로 그들이 내민 카드는 비정규직 저승사자로 취직해 자신들과 함께 일하는 것.

그들과 함께 일해주는 대신 식물인간에서 깨어나는 시기를 앞당겨 준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게 준웅은 산자도 죽은 자도 아닌 채 저승사자의 업무를 맡게 된다.

 

그런데 이 저승사자들, 좀 이상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게 아닌, 죽겠다는 사람을 뜯어말리러 다닌다.

스토커처럼 쫓아다니고, 그 사람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 과거를 알아내고, 죽으려는 이유를 알아낸 후 자살하려는 순간 그들 앞에 나타나 자살하지 않도록 돕는다.

화를 내거나 질책하기도 하고, 다독이고 다정히 어루만져 위로해 준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절박한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다시 생으로 걸음하도록 등 떠밀어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녀는 학원폭력의 피해자이다.

친했던 친구들에게 가장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소녀.

그 시달림과 괴롭힘이 그녀를 자꾸만 죽음으로 다가서게 밀어붙인다.

까마득한 절망과 끝없는 냉대가 사람을 얼마나 죽고 싶게 만드는지 너무 잘 보여준다.

 

 

 

"사실은 … 사실은 저 죽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지금이 싫어서 그랬던 거지…

살고 싶었단 말이에요…."

 

 

사실은 살고 싶었던 그 아이의 외침이 오랫동안 귓가에 울릴 것만 같다.

 

어느 날 아파트 고층에서 뛰어내린 아이들의 기사를 접하게 될 때마다 그 안타까움과 허망함을 이루 말하기 어렵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엄마라서 ... 그런 기사가 더더욱 힘이 든다.

무엇이 그 아이를 뛰어내리게 만들었을까.

죽음의 대한 공포,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을 감수하게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을 몰라주었다는 자책감.

또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도록 괴롭히면서도 죄책감이 없는 가해자들.

무엇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모두 어른의 책임이 아닐까.

남의 고통에 무감해지도록 변질되어가는 사회.

연민과 공감을 가르치지 않는 사회.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늘 더 아프다.

그리고 부끄럽다. 어른이라는 나의 자리가.

 

 

 

 

2권에서는 새로운 저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말고, 아주 현대적인 저승의 모습이랄까.

색다른 저승을 보여주고, 주인공인 두 저승사자의 숨겨진 스토리도 살짝 맛 보여준다.

책 전체 이야기의 큰 축이 되어줄 것 같은 그들의 지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다음권은 언제 나오나요?ㅜㅜ )

 

 

 

두 번째 이야기는 어느 재수생이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땐 공부를 잘했던 아이였는데 대학 진학에 실패한 한 번의 경험이 결국 그를 갉아먹고 있다.

큰 좌절과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그에게 대학입시에 성공한 대학생 친구들의 모습은 깊은 좌절과 상실감을 가져다줬다.

 

점점 바닥으로 추락하는 자신감은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규정짓게 만들고, 자괴감과 열등감은 의지를 꺾어 무기력한 상태로 끌어내린다.

 

지금의 사회가 젊은 청춘을 그렇게 내몰고 있다.

재수생이 아니라도, 대학생이나 취준생들 또한 그런 박탈의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열심히 죽을 만큼 노력해도 탈락을 맛보는 현실.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따라 걷고 싶어도 그 길이 보이지 않아 방황하는 청춘들.

어찌 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우리 모두의 이야기겠지.

 

 

 

 

청춘의 좌절은 때로 삶의 가장 큰 무기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의 부모님.

단단하고 굳건해 보이는 그분들도 청춘의 시절, 누구보다 깊이 상실과 좌절의 경험을 겪었던 분들이다.

갈 길을 잃고 헤매던 시간들이 그분들에게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을 걸어 지금에 이르신 부모님의 등을 바라보면 우리가 오늘 갈 길을 잃었어도 다시 길을 찾아 헤매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참 울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자식에서 부모가 되었고, 흔들려도 되는 나이에서 버텨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 부모님의 걸음,

그리고 내 아이들의 걸음.

그 사이에서 나는 뒤돌아볼 줄 모르는 무정한 자식이 되기도 했었고, 한없이 무정한 등을 바라보고 걸어야 하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좋은 자식은 못되었을망정,

좋은 부모는 되어봐야 하지 않을까.

 

자식이라는 이름은 늘 그렇게 이기적이고 무정하지만, 부모라는 자리는 늘 그렇게 인내하고 이해하는 자리일 테니까 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식의 자리를 잃었지만, 부모의 자리를 배우고 있는 나에게 주인공의 아버지의 모습은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또한 그렇게 오늘을 버티고 있을 남편이 생각나서 더 많이 울컥하고 눈물이 났던가 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존경을.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

 

 

 

 

가볍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지만 너무도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다.

발 디딜 곳이 죽음뿐인 사람들이 어떻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웹툰 특유의 위트와 가벼움으로 포장하려 해도 삶의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겠다.

우리들이 숨겨둔 가장 깊은 곳의 이야기니까.

말하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한 그 어둠 속 상처받은 우리를 다독여주는 이야기이기에.

살다가 딱 죽고만 싶은 순간이 어디 한번뿐이겠는가.

그 한 걸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십 대의 청소년에게는 그들만의 공감과 깨달음을 줄 테고,

이십 대의 청춘에게는 위로와 다독임이 되어줄 것 같다.

그리고 부모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지금 아이들이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이해하게 해줄 공감의 책이 되어 줄 거라고 믿는다.

아이와 함께 읽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물꼬를 터줄 것 같은 책이라 부모와 아이에게 함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나와 남편이 함께 읽었고,

이제 아이에게 읽으라고 권해줄 예정이다.

그리고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내가 모르는 지금의 아이들이 겪는 고민과 상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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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 오프라 윈프리, 세기의 지성에게 삶의 길을 묻다
오프라 윈프리 지음, 노혜숙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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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의 <슈퍼 소울 선데이>에 출연해 함께 이야기 나눈 수많은 영성 체험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직업은 천차만별이고, 종교, 나이, 성별, 인종도 모두 다르다.

그들은 다 다른 경험과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영성.

인간의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이며 진정한 자기 초월을 향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려는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제 _ [네이버 지식백과]

 

그들은 모두 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성에 대한 정의는 각자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체험하고 염원하는 영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론 같은 것으로 보인다.

신과 더 가까이 닿아있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영성이란 신에게 가닿는 어떤 것일 테지만, 일반인들에게 영성이란 내 겉모습과 자아를 넘어선 초월의 어떤 경험인듯싶다.

이를테면 명상을 하다가 마주치게 되는 완벽한 평화와 몰아의 순간.

혹은 우주와 내가 일치되는 느낌을 받는 경이의 순간 같은 것.

구도를 하는 신의 사제가 아니라도 살면서 한 번쯤 우리도 그런 순간을 마주치게 된다.

단지 그 순간이 끝없이 이어져 내 삶을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아주 찰나의 순간 빛처럼 번쩍이다가 사라져 버린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성에 가닿기 위해, 좀 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을 하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

인격의 높낮이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영혼은 높낮이가 없다는 진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고, 선한 의도를 가져야 하며, 마음 챙김을 통해 영성으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

자아를 넘어선 자유, 나의 본질 그 자체에 가닿기 위해 어제를 용서하고, 은총과 감사를 매일 되새길 것.

일의 성취 또한 영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며, 궁극적으로 사랑, 자비, 선의 베풂을 통해 진정한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대해 책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한다.

 

 

 

 

지금을 산다는 것.

오늘에 온전히 머문다는 것.

어제와 내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대부분 어제의 기억에 얽매여 내일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오늘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몸은 지금에 있지만, 마음은 어제에 있고, 정신은 내일에 있다.

가장 착실히, 온전하게 오늘에 머무는 방법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지나간 것과 오지 않은 것에 휘둘려 지금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에서 이제는 그만 벗어나고 싶다.

 

어제의 기억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지나버린 일들, 후회들, 상처들.

모든 것들이 나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미 바뀌지 않는 것들,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 여전히 나의 오늘에 끼어들어 자꾸만 어제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곤 한다.

간신히 그 어제에서 벗어나더라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온전히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싶다.

완벽한 지금의 시간 속에서 오늘을 선명하게 살아내고 싶다.

'매일매일 좋은 날'이라는 책을 읽은 후, 다도를 통해 지금을 온전히 느끼고 오늘에 집중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제대로 된 '오늘'을 살아내고 싶어졌었다.

그리고 '위즈덤'을 읽으며 '지금'에 집중하며 깨어있는 순간에 대해 다시금 갈구하게 되었다.

 

 

존 카밧진  많은 걸 놓치지요. 어느 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다음 날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나무 아래 앉는 즐거움을 놓친다면 그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순간들을 놓치면서 세월을 보내면 결국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측면들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너무 바빴다고요? 누가요? 누가 우리에게 '너는 시간이 너무 없어'라고 말하는 걸까요? 우리가 가진 것은 시간뿐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지금 이 순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만 그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완벽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위즈덤 p.69 _ 2장. 의도 / 존 카밧진 

 

 

 

내 속에 뻥 뚫린 커다란 구멍에 나는 무얼 채우고 살아가는지.

그 허기를, 그 허전함을, 그 뻥 뚫린 구멍의 공허를 참지 못하고 무엇이라도 욱여넣어 채우려 애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이 페이지를 읽다가 한참 멈춰있었다.

가끔은 그 구멍을 사랑으로 메우려고 애썼었고, 어느 날은 물질로 가득 채우려고 쇼핑을 해댔고, 허기로 오해해 먹을 것을 잔뜩 집어넣기도 했었다.

그래서 상처가 남았고, 자괴감이 들었고, 애꿎은 살만 쪄댔다.

그런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다.

그 구멍은 나 스스로, 나 자신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내 속의 나를 만나, 내가 생각하고 단정 지어놓았던 '가짜 나'가 아닌 진짜 '나'를 만나 나 자신과 화해하고 용서하고 그 너머로 향해 걸을 때 그 구멍은 조금씩 메워지는 게 아닐까.

 

 

 

 

조엘 오스틴 목사  놀라운 원리죠. 우리는 "나는 ~하다"라는 말을 하는 동안 우리 자신도 모르게 뭔가를 불러오게 됩니다. "나는 피곤하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외롭다" 등의 말을 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지요. 그러니 반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삶으로 불러올 수 있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위즈덤 p.49 _ 2장. 의도 / 조엘 오스틴 목사

 

 

 

"피곤하다", "힘들다", "지친다", "외롭다".

평상시에 내가 자주 내뱉는 말들 중 하나다.

저 말들의 힘 때문이었을까.

나는 늘 피곤하고 힘들고 기운이 없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의도조차 하지 않는 무기력의 상태에 놓여있는 순간이 점점 늘어났다.

어느 순간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내 체력이 원래 그렇게 바닥이라고 생각했고, 내 의지는 늘 제로라고 여겼다.

'나는 게으르다'라는 말도 자주 하는데, 자랑이라기 보다 누군가 지적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치부를 드러내 인정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지적 당하는 상황을 애초에 피하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의 단점을 똑바로 응시하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자학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그런 내게 조엘 오스틴 목사의 말은 충격이었다.

잘못된 행동, 부족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왜곡하지 않고 똑바로 보려고 했던 노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던 모양이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부정의 말보다 긍정의 말을 나 자신에게 더 많이 해줬어야 했는데, 남에게는 넘치게 긍정의 말들만 골라 하는 내가 사실은 스스로에게는 참 인색했던가 보다.

내가 원하는 긍정의 말들을 생각해 본다.

오늘부터는 나를 위한 긍정의 말들을 더 많이 내뱉어야겠다.

 

 

우리가 어떤 선언을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어떤 힘들과, 신에게 "이것이 내 의도다"라고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도를 소리 내어 크게 말하면 도움이 됩니다.

위즈덤 p.58 _ 2장. 의도 / 수 몽크 키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자아'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그동안의 경험과 스스로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내린 정의로 인해 이미 우리 자아는 왜곡당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자아를 형성했고, 우리가 늘 옳은 생각만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

때로는 상처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아는 페르소나를 창조해 낸다.

그렇게 우리가 만든 자아에 우리가 갇혀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자아, 인격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본래의 '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본질 그대로의 나를 만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영성의 순간이 아닐까.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완벽한 자유.

물질에도, 관계에도, 상처에도 얽매이지 않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나와 만나는 길.

그리고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런 순간이 필요할 때마다, 자꾸만 무언가에 얽매일 때마다 이 책을 꺼내 읽어야겠다.

 

 

 

이 책은 만듦새가 참 좋다.

판형도 마음에 들고 양장의 재질도 흔하지 않아서 참 이쁘다.

무엇보다도 대담집이라고 봐도 무방한 책인데 답답하지 않고 빡빡하지 않아서 좋다.

보통의 대담집은 글자만 가득 빽빽하게 들어차서, 그 속의 대화를 읽고 의미를 헤아리기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름 대담집 형태가 읽기 쉬운 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기본적으로 책을 꾸준히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차피 빽빽한 글자의 부담감은 똑같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쉽고 가깝게 읽기 좋은 만듦새가 아닐까 싶다.

여백과 사진의 존재가 글자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도 하고, 책 자체가 읽고 생각하고 여유를 가져야 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담고 있는 내용과도 참 잘 어울리는 편집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편집 자체를 흥미롭게 바라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이 책은 받자마자 가장 먼저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겠구나, 좀 더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함께 읽기 좋겠구나, 하는 생각.

 

 

 

"멈춰 서서 세 번 심호흡을 하라, 이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심호흡 같은 책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내일을 향해서만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자신만의 트라우마에 갇혀 고통받는 요즘 사람들에게 잠깐의 쉼, 혹은 마음을 다스리는 심호흡 같은 역할을 해줄 책이다.

내 속의 나, 온전한 나, 본래의 나를 만나는 시간.

그 시간의 길을 열어줄 좋은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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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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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 迷惑.

1. 명사.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2. 명사.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

 

그렇다.

난 이 글에 미혹당했다.

한 번도 독에 노출된 적이 없는 무균의 상대에게 독은 더 빠르고 깊이, 치명적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나는 완벽히 독에 당하고 말았다.

책이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아올라 나를 홀리더니 내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독침을 가진 벌이 되어 내게 치명타를 입힌 것이다.

당했다,라고 느낀 순간 이미 나는 책에 중독되고 말았다.

 

책 자체가 하나의 위험하고 아름다운 독, 그 자체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알 수 없는 독의 세계에 천천히 중독되어 갔다.

낯설고 음습한 그 세계에는 환상과 실제가 뒤엉켜 나를 몽롱하게 만들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마치 약에 중독된 사람이 환각을 경험하는 것처럼, 나는 책에 중독되어, 이야기에 중독되어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을, 실제가 아닌 어떤 실제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환상 같으면서도 실제 같고, 거짓 같으면서도 진실 같은 이야기에 완벽히 매료당하고 만 것이다.

 

 

 

 

책 속에는 수많은 독이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맹독들, 이를테면 동물의 독이나 식물의 독, 혹은 청산가리나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먹거나 흡입하거나 바르면 죽음에 이르는 바로 그 다양한 독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독'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를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가 우리가 아닌 사람이 되어 악행을 저지르게 만드는 마음속의 독 또한 이 책 속에서 다뤄지고 있다.

독에서 시작해서 가지를 뻗어나가는 수많은 독에 대한 지식과 성찰들.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독에 노출되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독들에 중독되어 있는지, 삶의 환각과 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독의 내면을 촘촘히 들여다본다.

 

 

 

 

내게 이 책은 스토리가 가지는 서사성 보다도 그 스토리 이면에 있는 깊은 사유와 스토리를 따라 흐르는 삶에 대한 성찰적 질문들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겨있기에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허구와 실제가 교묘히 교차하는 서사적 구조가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작가의 사유에서 끝나지 않고 독자에게도 끊임없이 사유를 이끌어내는 이 글을 단순히 소설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때로는 환상소설 같기도 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 같기도 하고, 어떤 고백 혹은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재미있는 철학서를 읽고 있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끝없이 나에게 질문을 하고, 왜냐고 묻고, 망각과 마비에 사로잡힌 일상에서 깨어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글을 이끌고 가는 큰 움직임 또한 각각의 의미를 가질 테니 시작하는 이야기에 대해 잠시 적어본다.

 

 

 


 

'나'는 독성물질에 감염되어 병원에 실려왔다.

근육이 마비되고 몸속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생사 경계를 넘나들며 간신히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그렇게 혼몽한 상태로 균들과 싸우던 '나'를 이끄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치료를 받던 '조몽구'라는 이였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밤이 오면 혼자서 끝없이 중얼거리며 어떤 이야기를 했다.

끝없는 망각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순간, '나'는 조몽구의 목소리에 깨어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며칠이 지나 그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간직한 '나'가 남았다.

'나'는 나를 매료시킨 조몽구의 '독'에 관한 이야기를, 그 믿을 수 없는 매혹의 이야기들을 재구성해 들려주려 한다.

 

독이 독인 줄도 모르고, 자신의 속에 들어찬 독은 알지도 못하고, 수없이 외부의 독에 찔리고 감염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에게 '독'의 얼굴을 대면하게 해주려고.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독들이 흔하게 널브러져 있다.

'독'하면 내가 먼저 떠올리는 것은 독사, 지네, 말벌 같은 독을 지닌 동물이나 곤충들이다.

언제든 우리와 마주칠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또한 해독의 여지가 충분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다음은 식물들.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란 내게 독을 지닌 풀들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흔하게 존재했었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물의 이름들 중 너무 익숙하고 친근한 녀석들도 있었다.

심지어 요즘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능소화나 천사의 나팔 같은 꽃들은 독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단과 화분에 곱게도 피어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협죽도 또한 남쪽 동네에서는 화단에 키우는 꽃나무이기도 하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에서 아이비 하나쯤 키우는 경우가 흔한데, 사실 아이비 또한 독성을 지닌 식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알고도 키우고, 때로는 모른 채 키우기도 하는 독을 품고 있는 식물들.

하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어떤 감정을 품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

그들의 독을 이용해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슬프게도 인간인 경우가 많다. 책에서처럼.

 

때로는 우리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던 독성물질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삶이 편해지고, 빨라지는 동안 우리가 만들어 낸 독들이 자연을 공격하고, 다시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는 요즘이다.

숨을 쉬는 당연한 순간조차도 치명적일지 모를 독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시간들이 어쩐지 서글퍼진다.

삶의 곳곳에, 일상의 의미 없는 순간조차 우리는 독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았던, 어쩌면 알고 싶지 않고 외면하고 싶었던 어떤 진실에 대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치게 깊이, 그리고 넓게 세상의 모든 독에 대해 책은 입을 열었다.

미친 것도 같고, 섬망 증상을 겪고 있는 것도 같은 어떤 사람의 입을 빌려, 깨어나라고, 위험하다고, 중독과 해독의 시간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경고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으라고.

 

 

"…… 앞으로 살아가면서 너는 늘 이마에 손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서 본의 아닌 순교자, 대속자로서의 운명을 보게 될 거야.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기 위해 매 순간 자기 내부의 독성으로 외부의 독성과 싸우고 있어. 그러나 대부분 자기 내부의 독성을 의식하지 못하지. 하지만 너는 두통 때문에 그 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의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말 그대로 깨어 있으라는 게 아닐까. 매 순간 긴장하라는 게 아닐까. 일상의 마비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게 아닐까. 고대 인도의 한 철학자가 말했지. 우리가 진실로 깨어 있는 때는 꿈꿀 때의 그 짧은 순간일 뿐이라고. 우리가 깨어 있다고 믿는 시간은 단지 마야, 곧 미망과 환영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무엇이 미망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독도 따지고 보면 미망이고 환영이 아닐까."

 

p.196~197

 

 

 

 

독은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얼굴로 우리를 미혹한다.

우리는 독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그것에 환상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의지하고 복종하기도 한다.

그것이 독인 줄 알면서도, 내게 해를 입힐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속에 빠져들어 갈가리 찢기고 산산이 부서져버리기 일쑤다.

 

어떤 날,

사랑이 내겐 독이었고,

사람이 내게 독이었고,

슬픔이 내게 독이었다.

 

우리는 나약해서 매번 무언가에 중독되어 길을 잃었다가 불현듯 깨어나고는 한다.

갈가리 찢기는 고통 속에서 해독의 과정 또한 함께 앓는 모양이다.

살기 위해 내 속의 무언가가 끝없이 독과 싸워 삶을 이어나가도록 버텨주고는 한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나를 살게 하는 무엇.

책 속에서 끝없이 말하는 나 자신의 독이었을까.

아직은 내 속의 독이 세상의 독보다 조금 더 독해서 기어코 살아남고야 마는 것일까.

 

가끔은 그게 독이 든 잔임을 알고도 들이키고는 한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서도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순간들이 삶에는 종종 찾아오게 마련이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독주을 삼키고야 만다.

끝없이 독에 노출되고, 중독되고, 고통의 환각에 몸부림치다, 간신히 살아남는다.

우리를 일으키고 걷게 하는 독한 삶의 의지가 우리에게 내일을 선물하는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변명을 내뱉으며 지리멸렬하게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항체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온통 위험하고 두렵고 끝을 알 수 없는 세상과 내일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한, 우리는 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끝없이 두려움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살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너는 늘 두통에 시달리느라 거기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순간도 멍하니 보내는 일이 없이 항상 깨어 있는 거야.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p.198~199

 

 

 

 

내 안의 독이 원한을 만나 누군가를 해치는 칼이 되지 않기를.

내 안의 독이 사랑을 만나 당신을 낫게 하는 약이 되기를.

내 안의 독이 삶을 만나 버팀목이 되고, 힘이 되기를.

독이 가끔은 그렇게 약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당신의 독이 당신을 해치는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과 나는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 생을 이어가는 동지이므로,

우리가 온갖 독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피어난 독의 꽃이라 할지라도 살기 위해 피운 이 꽃으로 서로를 다치게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간신히, 그러나 굳건히 피워낸 독의 꽃들이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곧게 피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수없이 곤두박질쳐야 했는지 잊지 말자.

우리는 선명히 살아있기에 아름다운 존재들이니까.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야."

 

p.520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고르고 싶다.

처음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바로 이 몇 줄의 문장 때문이었으니까.

책의 첫 장을 열었던 때에도 책의 마지막 줄을 읽고 덮은 순간에도 오랫동안 마음을 잡아챈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이 얼마나 깊고 긴 여운을 남기는지.

가만히 읽고 또 읽으며 되뇌어 본다.

 

내 삶의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 오랜 탐독을 마치고 나면, 그때는 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까.

영영 모른 채 눈 감게 될까 봐, 우리는 그토록 불안하고 두려운가 보다.

생의 끝에서라도 내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면 그것으로 그 길고 긴 생의 걸음을 위로받을 수 있으려나.

 

생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느라 우리는 한 생을 모두 소진하고 만다.

여전히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끝없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생의 의미를 더듬어 보고 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의문과 생각, 사유와 성찰이 '이야기'라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우리에게 함께 흘러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낚는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좋은 질문을 하는 책은 좋은 책이다.

그 책 속에 심지어 답안지가 없다 해도 좋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이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좋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 동안 모두 기꺼이 즐거워할 것을 믿는다.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거듭나고 한 뼘쯤 더 자라게 될 테니까.

 

내게 좋은 질문을 던져준 이 책은 그래서 내게 좋은 책으로 내내 기억될 것 같다.

 

 

 

 

살아 있는 매 순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외부의 적대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다른 생명체를 공격적으로 섭취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 하나하나야말로 곧 한 송이 '독의 꽃'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에서 이 말 또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의 모든 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약'이라고.

 

작가의 말, p.547

 

 

 

 

네가 너 자신을 살아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너를 사랑해도, 그건 개미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못하다는 거야.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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