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혹. 迷惑.

1. 명사.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2. 명사.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

 

그렇다.

난 이 글에 미혹당했다.

한 번도 독에 노출된 적이 없는 무균의 상대에게 독은 더 빠르고 깊이, 치명적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나는 완벽히 독에 당하고 말았다.

책이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아올라 나를 홀리더니 내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독침을 가진 벌이 되어 내게 치명타를 입힌 것이다.

당했다,라고 느낀 순간 이미 나는 책에 중독되고 말았다.

 

책 자체가 하나의 위험하고 아름다운 독, 그 자체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알 수 없는 독의 세계에 천천히 중독되어 갔다.

낯설고 음습한 그 세계에는 환상과 실제가 뒤엉켜 나를 몽롱하게 만들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마치 약에 중독된 사람이 환각을 경험하는 것처럼, 나는 책에 중독되어, 이야기에 중독되어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을, 실제가 아닌 어떤 실제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환상 같으면서도 실제 같고, 거짓 같으면서도 진실 같은 이야기에 완벽히 매료당하고 만 것이다.

 

 

 

 

책 속에는 수많은 독이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맹독들, 이를테면 동물의 독이나 식물의 독, 혹은 청산가리나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먹거나 흡입하거나 바르면 죽음에 이르는 바로 그 다양한 독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독'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를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가 우리가 아닌 사람이 되어 악행을 저지르게 만드는 마음속의 독 또한 이 책 속에서 다뤄지고 있다.

독에서 시작해서 가지를 뻗어나가는 수많은 독에 대한 지식과 성찰들.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독에 노출되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독들에 중독되어 있는지, 삶의 환각과 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독의 내면을 촘촘히 들여다본다.

 

 

 

 

내게 이 책은 스토리가 가지는 서사성 보다도 그 스토리 이면에 있는 깊은 사유와 스토리를 따라 흐르는 삶에 대한 성찰적 질문들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겨있기에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허구와 실제가 교묘히 교차하는 서사적 구조가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작가의 사유에서 끝나지 않고 독자에게도 끊임없이 사유를 이끌어내는 이 글을 단순히 소설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때로는 환상소설 같기도 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 같기도 하고, 어떤 고백 혹은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재미있는 철학서를 읽고 있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끝없이 나에게 질문을 하고, 왜냐고 묻고, 망각과 마비에 사로잡힌 일상에서 깨어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글을 이끌고 가는 큰 움직임 또한 각각의 의미를 가질 테니 시작하는 이야기에 대해 잠시 적어본다.

 

 

 


 

'나'는 독성물질에 감염되어 병원에 실려왔다.

근육이 마비되고 몸속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생사 경계를 넘나들며 간신히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그렇게 혼몽한 상태로 균들과 싸우던 '나'를 이끄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치료를 받던 '조몽구'라는 이였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밤이 오면 혼자서 끝없이 중얼거리며 어떤 이야기를 했다.

끝없는 망각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순간, '나'는 조몽구의 목소리에 깨어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며칠이 지나 그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간직한 '나'가 남았다.

'나'는 나를 매료시킨 조몽구의 '독'에 관한 이야기를, 그 믿을 수 없는 매혹의 이야기들을 재구성해 들려주려 한다.

 

독이 독인 줄도 모르고, 자신의 속에 들어찬 독은 알지도 못하고, 수없이 외부의 독에 찔리고 감염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에게 '독'의 얼굴을 대면하게 해주려고.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독들이 흔하게 널브러져 있다.

'독'하면 내가 먼저 떠올리는 것은 독사, 지네, 말벌 같은 독을 지닌 동물이나 곤충들이다.

언제든 우리와 마주칠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또한 해독의 여지가 충분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다음은 식물들.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란 내게 독을 지닌 풀들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흔하게 존재했었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물의 이름들 중 너무 익숙하고 친근한 녀석들도 있었다.

심지어 요즘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능소화나 천사의 나팔 같은 꽃들은 독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단과 화분에 곱게도 피어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협죽도 또한 남쪽 동네에서는 화단에 키우는 꽃나무이기도 하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에서 아이비 하나쯤 키우는 경우가 흔한데, 사실 아이비 또한 독성을 지닌 식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알고도 키우고, 때로는 모른 채 키우기도 하는 독을 품고 있는 식물들.

하지만 그들이 자발적으로 어떤 감정을 품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

그들의 독을 이용해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슬프게도 인간인 경우가 많다. 책에서처럼.

 

때로는 우리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던 독성물질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삶이 편해지고, 빨라지는 동안 우리가 만들어 낸 독들이 자연을 공격하고, 다시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는 요즘이다.

숨을 쉬는 당연한 순간조차도 치명적일지 모를 독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시간들이 어쩐지 서글퍼진다.

삶의 곳곳에, 일상의 의미 없는 순간조차 우리는 독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았던, 어쩌면 알고 싶지 않고 외면하고 싶었던 어떤 진실에 대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치게 깊이, 그리고 넓게 세상의 모든 독에 대해 책은 입을 열었다.

미친 것도 같고, 섬망 증상을 겪고 있는 것도 같은 어떤 사람의 입을 빌려, 깨어나라고, 위험하다고, 중독과 해독의 시간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경고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으라고.

 

 

"…… 앞으로 살아가면서 너는 늘 이마에 손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서 본의 아닌 순교자, 대속자로서의 운명을 보게 될 거야. 모든 생명체는 살아 있기 위해 매 순간 자기 내부의 독성으로 외부의 독성과 싸우고 있어. 그러나 대부분 자기 내부의 독성을 의식하지 못하지. 하지만 너는 두통 때문에 그 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의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말 그대로 깨어 있으라는 게 아닐까. 매 순간 긴장하라는 게 아닐까. 일상의 마비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게 아닐까. 고대 인도의 한 철학자가 말했지. 우리가 진실로 깨어 있는 때는 꿈꿀 때의 그 짧은 순간일 뿐이라고. 우리가 깨어 있다고 믿는 시간은 단지 마야, 곧 미망과 환영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무엇이 미망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독도 따지고 보면 미망이고 환영이 아닐까."

 

p.196~197

 

 

 

 

독은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얼굴로 우리를 미혹한다.

우리는 독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그것에 환상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의지하고 복종하기도 한다.

그것이 독인 줄 알면서도, 내게 해를 입힐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속에 빠져들어 갈가리 찢기고 산산이 부서져버리기 일쑤다.

 

어떤 날,

사랑이 내겐 독이었고,

사람이 내게 독이었고,

슬픔이 내게 독이었다.

 

우리는 나약해서 매번 무언가에 중독되어 길을 잃었다가 불현듯 깨어나고는 한다.

갈가리 찢기는 고통 속에서 해독의 과정 또한 함께 앓는 모양이다.

살기 위해 내 속의 무언가가 끝없이 독과 싸워 삶을 이어나가도록 버텨주고는 한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나를 살게 하는 무엇.

책 속에서 끝없이 말하는 나 자신의 독이었을까.

아직은 내 속의 독이 세상의 독보다 조금 더 독해서 기어코 살아남고야 마는 것일까.

 

가끔은 그게 독이 든 잔임을 알고도 들이키고는 한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서도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순간들이 삶에는 종종 찾아오게 마련이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독주을 삼키고야 만다.

끝없이 독에 노출되고, 중독되고, 고통의 환각에 몸부림치다, 간신히 살아남는다.

우리를 일으키고 걷게 하는 독한 삶의 의지가 우리에게 내일을 선물하는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변명을 내뱉으며 지리멸렬하게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항체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온통 위험하고 두렵고 끝을 알 수 없는 세상과 내일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한, 우리는 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끝없이 두려움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살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너는 늘 두통에 시달리느라 거기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순간도 멍하니 보내는 일이 없이 항상 깨어 있는 거야.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p.198~199

 

 

 

 

내 안의 독이 원한을 만나 누군가를 해치는 칼이 되지 않기를.

내 안의 독이 사랑을 만나 당신을 낫게 하는 약이 되기를.

내 안의 독이 삶을 만나 버팀목이 되고, 힘이 되기를.

독이 가끔은 그렇게 약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당신의 독이 당신을 해치는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과 나는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 생을 이어가는 동지이므로,

우리가 온갖 독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피어난 독의 꽃이라 할지라도 살기 위해 피운 이 꽃으로 서로를 다치게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간신히, 그러나 굳건히 피워낸 독의 꽃들이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곧게 피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수없이 곤두박질쳐야 했는지 잊지 말자.

우리는 선명히 살아있기에 아름다운 존재들이니까.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의 꽃이야."

 

p.520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고르고 싶다.

처음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바로 이 몇 줄의 문장 때문이었으니까.

책의 첫 장을 열었던 때에도 책의 마지막 줄을 읽고 덮은 순간에도 오랫동안 마음을 잡아챈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이 얼마나 깊고 긴 여운을 남기는지.

가만히 읽고 또 읽으며 되뇌어 본다.

 

내 삶의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 오랜 탐독을 마치고 나면, 그때는 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까.

영영 모른 채 눈 감게 될까 봐, 우리는 그토록 불안하고 두려운가 보다.

생의 끝에서라도 내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면 그것으로 그 길고 긴 생의 걸음을 위로받을 수 있으려나.

 

생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느라 우리는 한 생을 모두 소진하고 만다.

여전히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끝없이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생의 의미를 더듬어 보고 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의문과 생각, 사유와 성찰이 '이야기'라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우리에게 함께 흘러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낚는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좋은 질문을 하는 책은 좋은 책이다.

그 책 속에 심지어 답안지가 없다 해도 좋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이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좋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 동안 모두 기꺼이 즐거워할 것을 믿는다.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거듭나고 한 뼘쯤 더 자라게 될 테니까.

 

내게 좋은 질문을 던져준 이 책은 그래서 내게 좋은 책으로 내내 기억될 것 같다.

 

 

 

 

살아 있는 매 순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외부의 적대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다른 생명체를 공격적으로 섭취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 하나하나야말로 곧 한 송이 '독의 꽃'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에서 이 말 또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의 모든 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약'이라고.

 

작가의 말, p.547

 

 

 

 

네가 너 자신을 살아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너를 사랑해도, 그건 개미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못하다는 거야.

p.1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