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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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강한 심장을 준비하라!"

 

 

도대체 그 강한 심장은 어디다 쓰려고 준비하라고 하는 것일까.

너무 잔혹해서? 너무 공포스러워서? 너무 슬퍼서?

궁금했다.

무엇을 어떻게 담고 있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 단단히 심장을 무장해야 하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폐허 속에 홀로 서있는 무력한 고독을 느꼈다.

바짝 메말라 있는 이 소설은 읽을수록 목이 마르게 했다.

죽음 같은 갈증을 내내 불러왔다.

 

그렇다.

그런 소설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고독과 메마른 슬픔,

인간 내면의 이기심과 인간성의 바닥을 무심한 목소리로 고저 없이 들려준다.

마치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실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 가장 알맞은 화자, 죽은 아이를 내세워.

 

 

 

 

죽음은 마치 캄캄한 밤처럼 딩씨 마을을 철저하게 뒤덮고 있었고, 주위의 다른 마을들도 뒤덮고 있었다. 매일 마을의 거리를 오가는 이야기는 전부가 검은 소식들뿐이었다. 어느 집 누구의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는 소식, 아니면 어느 집 누가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중략…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죽음은 매일 모든 집의 문 앞을 서성거렸다.

<딩씨 마을의 꿈> _ P.31

 

 

지금은 익숙하지 않는 '매혈'이라는 행위가 한때는 경제 발전을 일으킬 만큼 커다란 돈벌이 수단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중국에서는 그것이 대대적으로 행해졌고, 정부에서 장려하는 일이었던가 보다.

누구라도 피를 팔아 부를 축척할 수 있었고, 그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인 것 마냥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어느 마을에서는 그 매혈로 인해 집단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삿바늘과 소독솜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런 마을 중 하나, '딩씨 마을'이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되었다.

책 속에 이야기는 소설이기에 많은 꾸밈이 들어가 있겠지만,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우리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절망과 슬픔과 욕망이 한데 어우러져 어느 것이 절망이고 어느 것이 욕망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휘져어진 죽음의 마을, '딩씨 마을'.

그 속에서 죽음이 목전에 와도 물질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끝내 그것을 향해 팔을 뻗으며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참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죽음만이 절망이 아님을,

살아 있음도 지독한 절망임을 낱낱이 보여준다.

우리가 미처 꺼내놓지 못한, 아닌 척 포장하고 있던 물질적 욕망에 대한 민낯이 죽음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미 넋이 나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이 문 앞을 지키고 있어 어느 집에서도 더 이상 밖에 나가 농사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밖에 나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열병이 문틈으로 들어올까 봐 모든 문을 꼭 닫고 대문도 굳게 걸어 잠갔다. 사실은 열병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병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문 앞을 지켰다.

<딩씨 마을의 꿈> _ P.31

 

 

죽음의 그림자가 온 하늘을 뒤덮은 마을.

어느 집에서도 죽은 이를 만날 수 있는 마을.

그렇게 하나 둘 죽은 이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따라 마을도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한다.

 

매혈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딩후이의 아들은 사람들의 원망에 의해 독살당한다.

그렇게 죽어,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학교 옆 건물 앞에 묻힌다.

그곳에서 내내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고, 죽음을 지켜본다.

그가 바로 이 글의 화자, 딩샤오창이다.

 

아무것도 잘못 한 것이 없던 열두 살의 아이는 그렇게 매집을 했던 아빠의 욕심과 피를 팔았던 마을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희생당했다.

모든 일에 돈이 있었다.

그 원인은 결국 늘 돈이었다.

더 잘 살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던 사람들의 욕심이 부른 참사였다.

그렇게 '에이즈가 창궐한 마을에서 '독'때문에 죽어야 했던 아이.

 

여기서부터 벌써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 더 얼마나의 탐욕과 욕심들을 마주쳐야 하는지 걱정스러워진다.

인간성을 뛰어넘는 물질에 대한 욕망, 그 끝 모를 탐욕이 한마을을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또 그 마을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소설은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중국 문학은 아주 예전에 장르소설로 접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일본 문학이 익숙한 것에 비해, 똑같이 가까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학은 아직 낯설다.

읽어 본 경험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먼저 찾아읽게 되는 상황도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익숙한 중국의 소설들은 무협지, 판타지, 로맨스 같은 장르 소설들이 대부분이고 순문학은 멀게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중국의 영화는 그토록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반면 문학은 어째서 관심받지 못하는 걸까.

반대로 일본의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반면 문학은 널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이유는 뭘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국문학을 가장 좋아하는 나에겐 답을 알기 힘든 의문인 것 같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읽게 된 중국의 순문학.

역시나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낯섦을 느꼈다.

왠지 한자로 쓰인 시조를 읽는듯한 느낌도 받았다.

비슷한 문장의 반복이 자주 사용되는데, 그만큼 중요한 문장의 강조의 의미인 건지, 시조를 읽듯 운율을 느끼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옌롄커의 글쓰기의 특징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장 자체가 가지는 시적인 분위기와 꿈과 현실을 오가는 엇갈림으로 인해 더더욱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낯설던 문장은 6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읽는 동안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고유의 매력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아주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한, 한 편의 길고 긴 시를 읽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사람이 죽는 것이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등불이 꺼진 것과 같았다. 무덤을 파고 사람을 묻는 일이 삽을 들어 마을 어귀에 구덩이를 파고 죽은 고양이나 개를 묻는 것만큼이나 순조로웠다. 슬픔도 없었고, 울음소리도 없었다. 울음소리와 슬픔은 말라버린 강과 같아서 소리도 없고 호흡도 없었다. 사람들의 눈물은 맑게 갠 날 허공에 떨어지는 빗방울만큼이나 희박하여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딩씨 마을의 꿈> _ P.505~506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내내 나의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너무 흔해빠진 죽음 앞에 감흥도 슬픔도 잊어버린 사람들.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해석 불가한 절망을 먹으며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그런 세상이, 그런 슬픔이, 그런 절망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딩씨 마을이 아니라고 해도, 집단적 트라우마가 우리들의 목을 조르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인간성이 조금씩 휘발되는 경험을 느낀 적이 있으리라.

우리를 인간답게, 인간으로 살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돌아보라고 어쩌면 극한의 절망에 대해, 상실에 대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폐허를 떠도는 공허한 바람의 냄새를 풍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끝 간 데 모르는 고독을 느끼기도 하고, 한없는 절망과 메마른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절망을, 그 고독을, 이 슬픔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발견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에 홀로 선 공포가 우리를 찾아오더라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절망이 우리를 찾아와도,

그 폐허가 우리의 내면이 되어서는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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