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론 왕따였던 어른들 프로젝트가 현재 이 사회에 일어나는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한 명쾌한 솔루션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학교 폭력을 겪고 나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렇게 존재하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프로젝트의 의의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p.268 / 방과 후 _ 의현의 글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유튜브 조회 수 300만 '왕따였던 어른들' 무삭제판

 

고민고민하다가 읽게 된 책이다.

가끔 나는 그렇게 고개 돌린 방관자가 되곤 한다.

못 본 척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파서, 똑바로 바라는 보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 감고 싶어지곤 한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닌데도 내가 당한 일 같이 여겨지는 시간들이 있어서, 직접 눈을 맞추고 깊이 바라보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얼마나 깊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을까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팠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꼭, 바라봐야 하는 상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짐작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시간들과 고통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때, 나 또한 그런 고통의 방관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안다.

그렇게 읽게 된 책은, 나의 우려와는 달리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들의 상처의 깊이에 비해 내가 느끼는 고통은 현저히 적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그들이, 그 고통 속에서 한 걸음씩 두 걸음씩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 흘리며 고통을 울부짖지 않고, 담담하게 지난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현재의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어코 견뎌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나 또한 그 상처의 시간들에 대해 조금 더 담담한 시선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되려 지난 괴롭힘의 시간들과 상처를 간직한 지금을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면서 선명한 희망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아직은 상처가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서 빛이 났다.

견뎠고, 살아있고,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들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 고통의 시간들을 건너, 살아 있음으로.

 

 

 

 

희경 _ 누구는 경찰이 됐고, 누구는 소방관이 됐고.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진짜 너무 화가 나요. 화나서 잠도 안 왔어요. '네가? 그랬던 네가? 경찰서에 잡혀가야 하는 사람인 네가…사람 목숨 하나 죽일 뻔했던 네가?'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울먹이며) 가해자는, 누군가에게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겠지만 나한테는 정말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었으니까요.

 

p.51 / 3교시 _ 가해자와 방관자

 

 

 

그것이 참 무섭다.

'가해자'는 그냥 '악인'이면 좋을 텐데, 누가 봐도 아주 나쁜 사람이고 천하의 빌어먹을 놈이면 참 좋을 텐데, 사실은 그냥 평범한 너와 나라는 것.

너무 평범하고 흔하고 어디에나 있는 누구라는 것.

'피해자'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있는 너무 평범하고 흔한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무서우면서도 슬프다.

누가 우리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편을 나눠,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아주 깊은 상처를 받고 나서 나는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상이 망가지고 정신이 무너져 숨 쉬는 것조차 힘든데 나를 상처 준 그 사람은 너무 좋은 사람으로, 너무 잘 살고 있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너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내 삶은 이토록 피폐해졌는데 어떻게 너는 웃을 수 있는 건지, 어떻게 너는 여전히 사랑받으며 빛날 수 있는 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멱살 쥐어잡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악을 쓰고 싶어진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물리적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똑같은 질량의 똑같은 상처를 똑같이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들을 괴롭히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영 _ 똑같은 왕따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그 상처와 깊이는 제각각 다 다르기에 "나도 왕따를 당해봤으니까 잘 알아"같은 말은 함부로 못하겠어요. 그래도 같이 나눌 수 있고 울어줄 수는 있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어른이 된 우리는 이렇게 버티며 자라 여기에서 서로를 토닥이고 있으니, 그 아이들도 미래에 커서 그래 줬으면 좋겠고요.

 

p.96 / 6교시_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렇게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하며, 때로는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쪽으로 한걸음 발을 옮겨본 적도 있는 그들의 말들은 너무 깊고, 다정하다.

누구보다 성숙하고 반듯한,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말과 생각들을 만날 때마다 되려 내가 부끄러워졌다.

감히 '안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똑같은 상황 속에서 똑같은 고통을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상처들이니까 말이다.

그냥 울컥했다.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왜 '가해자'들이 휘두른 폭력을 견뎌야만 했나.

무엇이 이렇게 빛나고 다정한 그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나.

왜냐고,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네 맘에 안 들면 때려도 돼?

네 맘에 안 들면 함부로 대해도 돼?

네 기분이 나쁘면 욕하고, 무시하고, 경멸해도 돼?

누가 그래도 된다고 너에게 허락했니?

네까짓 게 뭐라고,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남을 짓밟고 군림하면서 웃었던 거야?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려도 되는 권한을 누가 너에게 줬어?

네 가치를 누가 정해줬는데?

네가 때리고 밟고 무시하고 괴롭혔던 아이들의 가치를 감히 네까짓 게 뭐라고 함부로 규정해?

'나'의 가치는 감히 나아닌 누군가가 판단하고 정해줄 수 없는 거야.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는 머저리들.

'피해자'가 잘못된 게 아니라 '가해자' 너희들이 잘못된 거야.

잘못은 너희들에게 있어.

가해자에게 참 한없이 관대한 이놈의 세상에 화가 난다.

 

 

 

 

가연 _ 없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집단이든지 정치를 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꼭 1명 이상은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그 정치질이나 권력 행사의 이면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타인에게 "같이 싫어하자"고 강요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요. 그런 과정에서 많은 친구를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요. 가해자, 방관자, 피해자의 구조가 생기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는 사람이 한정적인 학교 안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내 사람'을 만들려는 게 시작되고, 그게 물 타기가 되고, 물 타기에 동조해야 내가 다른 사람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요. 학교나 사회에서 '두루두루, 다 같이' 노는 게 정답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더 청소년 왕따가 도드라진다고 생각해요.

 

p.112~113 / 7교시 _ 내가 꿈꾸는 나의 미래

 

 

학교든 회사든 사적인 모임에서든 누군가를 따돌리고 끼리끼리 뭉쳐서 한 사람을 공격하는 건 참 흔하고 흔한 일이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 걸까.

사람들을 선동해 누군가를 교묘히 따돌리는 다 자란 '어른'들을 볼 때마다 여전히 '여고시절'에서 못 벗어난 덜자란 '가해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아직도 그렇게 밖에 못 사는 불쌍한 '덜 자란 가해자'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도 많다는 것에 한숨이 난다.

집단이 형성되고 끼리끼리 뭉치게 되는 모든 곳에 그런 덜자란 가해자가 꼭 있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도 현명해지지 못하는 서글픈 어른 아이들.

그렇게 밖에 관계를 형성할 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편을 나누고 누군가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가난해질 것을 믿는다.

그렇게 끝없이 누군가를 따돌리며 상처 주다가 결국은 혼자 남게 될 것을 믿는다.

기어코 내내 가해자로만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런 아이들을 걱정하는 '왕따였던 어른들'의 마음이 참 고맙고 미안하다.

겪어서 지금에 온 사람들의 충고는 그래서 더 날카롭고 정확한 게 아닐까.

그들의 말들이 오늘 고통스러운 어떤 아이의 마음을 죽음에서 건져주기를.

살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애처로운 지푸라기라도 되어주었기를.

또한, 그 울림이 커지고 커져서 더 이상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지 않게 되기를.

그렇게 사회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기를.

한 명씩 두 명씩 학교폭력에서 벗어나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그리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용기 있고 빛나는 모든 분들이, 꼭,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너무도 아픈 상처를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털어놓은 순간, 더 이상 그것이 상처가 아닌 누구보다 굳건히 살아남았다는 빛나는 증거로 남아지기를.

꼭, 꼭,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살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무엇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잘못도 부끄러움도 모두 가해자에게 있으니까요.

멋지고, 빛나요, 당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금기 머금은 바람

입술 겉을 적신다

난 손발이 모두 묶여도

자유하는 법을 알아

 

뱃노래 뱃노래

외로움을 던지는 노래

몇 고개 몇 고개의

파도를 넘어야 하나

 

악뮤, 「 뱃노래 」 가사 中 일부.

 

 

 

책을 읽기 전에 노래를 먼저 들었다.

이 책이 이번 앨범 '항해'의 모티브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설명 없이 노래 그 자체로 먼저 접하고 싶었다.

그렇게 들은 앨범 '항해'는 지금까지의 악뮤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함이 남아있다 느껴지도 했지만, 훨씬 더 깊어지고, 사색적으로 느껴지는 곡과 가사가 가슴을 울렸다.

나는 악뮤를 좋아하지만, 재기 발랄한 느낌의 곡들을 들으면서 순간을 즐겼지 여운을 즐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순위권 안에 있는 노래들만 듣고 앨범 전곡을 꼼꼼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한데, 이번 앨범의 '뱃노래'를 듣는 순간, '아... 나는 이 앨범을 사랑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혁의 사색적이고 아름다운 가사, 수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좋다'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가 이번 앨범에는 있었다.

그동안의 악뮤 노래는 '궁금하다', '신선하다', '재미있다', '즐겁다'의 느낌을 유발했다면, 이번 앨범은 '사색적이고 깊은,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떨림과 울림을 오랫동안 남겨주는' 여운은 준다.

 

특히나 '뱃노래'는 수현 특유의 음색과 깊어진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듣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찬혁이 만들어낸 가사와 선율들이 수현의 목소리를 만나 더 깊이 공명하고 있었다.

나는 끝없이 끝없이 그들의 떨림에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그들은 어디까지 가닿을 예정일까.

시간을 지나고, 세월을 건너, 삶의 나이테가 점점 늘어날수록 그들의 음악 또한 얼마나 더 깊어지고 넓어질 건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진다.

시간이 그들을 관통하는 동안, 그들이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스무 살이 되면 알아서 주어지는 어른의 이름 말고, 진짜 어른 말이다.)

누구보다 아름답게, 튼튼하게, 삶을 견뎌내기를.

 

 

 

 

 

이 책은 한 명의 예술가가 진정한 '나'로서 진정한 예술을 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예술이라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답이다.

그 속에서 악뮤의 '찬혁'의 마음속 길 또한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음악인의 길, 그가 소망하는 삶의 길을 엿보는 것은 마치 남의 일기장을 슬쩍 들여다보는 일처럼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몽환적이고, 사색적이며, 우화 같기도 하고 판타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 글을 어떻게 설명해낼 길이 없다.

읽어야지만 느껴지는 문장의 아름다움과 은유의 세계를 풀어 말한 자신이 없다.

그저 찬혁이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하고 깨달을 뿐.

 

이번 앨범을 미리 들은 사람에게는 이 한 권의 책 또한 하나의 음악으로 와닿지 않을까 싶다.

음악 같은 소설이다.

그의 발걸음을 닮은 소설이다.

터벅터벅이 아니라 타닷타닷, 퐁퐁퐁, 발끝에서도 음악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이십 대의 감성과 고민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한 폭의 그림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흔들리는 청춘들이 참 아름답다고, 오랜만에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나이구나, 정말 빛나는 나이구나 하고 부러워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린 친구들의 세상 다 산듯한 글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직 어리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나도 그 시기를 폭풍처럼 겪으며 지나왔음에도 살아온 시간만큼의 눈이 생겨버린 것이다.

맞는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닌 것'이 되어 내 뺨을 후려치기도 했고, 옳고 그름의 분명한 잣대가 되려 무너져 흐릿해지기도 했다.

삶은 살수록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글은 이해는 되지만 나에게 울림을 주기에는 조금 모자란 느낌으로 읽혔었다.

 

오랜만에 젊음 그 자체로 찬란한 글을 읽은 것 같다.

삶에 대한 고민과 의문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그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싶었다.

삶을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시선을 나도 간직하고 싶었다.

때가 묻어버린 뻑뻑한 '어른'의 눈에 촉촉한 그의 눈물이 스며든다.

 

눈을 깜빡이는 일이 조금 쉬워졌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걸 두려워해. 예를 들면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나, 제시간에 마감하지 못할 업무 따위를."

중략

"이런 걸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지. 내가 두려워하던 건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심지어 내 죽음도 여기서는 너무 작은걸."

중략

"그래서 통제하는 거야. 윗사람들은 파도가 아닌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라니까. 파도 앞에선 그들도 한없이 작아지니까.

 

물 만난 물고기 _ p.81~82

 

 

 

 

 

 

 

"난 이 동네 사람들이 매일 걸어 다니는 길을 청소해요. 그들은 자신이 아침에 길바닥에 껌 포장지를 버렸다는 사실을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까먹고 말아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치웠으니까요. 자신이 버린 포장지와 마주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래서 다시 기억할 일도 없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남편을 향한 분노 따위를 집 앞에 버리고 가요. 어떤 날은 학교에서 들고 온 시기와 질투 같은 것도 있지요. 나는 그들이 그렇게 표출해버리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을 주워 담습니다. 그럼 그들은 그 길을 지나면서 다시 같은 감정을 떠올리지 않게 되지요. 모든 걸 까먹은 채 집으로 들어가서 다시 예전같이 남편을 사랑해주는 거예요."

 

물 만난 물고기 _ p.113~114

 

 

 

 

이 작은 책 곳곳에 수많은 질문과 답이 숨어있다.

그런 질문들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숨을 고르고 고민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는 그저 그 질문들을 깊게 응시할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자신의 답만이 옳음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그 질문들이 깊이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답 또한 그래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지도.

강요하지 않는 질문과 답변에는 늘 숨 쉴 공간이 있어서 좋다.

그 공간에 내 고민과 답을 뱉어낼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의 질문과 답, 나의 질문과 답이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야말로 책을 읽으며 작가와 독자가 가장 깊이 숨을 섞으며 얽히는 순간이 아닐까.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바다를 더 사랑한다면, 그녀의 바다가 될 방법을 고민했다. 내가 그녀의 소원이 되고 싶었다. 소원을 이뤄주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가 얼룩말을 소원한다면 내가 그녀의 얼룩말이 되어 그녀가 날 원하게 할 것이다.

 

물 만난 물고기 _ p.132

 

 

 

 

 

삶과 죽음이 긍정과 부정의 의미로 나뉘는 것 또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오직 본능에 의한 것일 뿐.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생각해왔던 '삶의 끝'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슬퍼할 이유가 없다.

 

물 만난 물고기 _ p. 166

 

 

 

 

죽음 앞에서 나는 늘 남겨진 누군가였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대해 늘 원망이 있었다.

자신에게서 삶의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삶을 움켜잡아 줄 수는 없는 건지.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내내 짊어져야 할 슬픔과 상실을 애달파 해 줄 수는 없었던 건지.

그 안타까운 죽음들이 내내 아픈 만큼 원망스러웠다.

 

한데 책을 읽다가, 어떤 죽음의 선택이 '절망'의 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마주치게 되었다.

절망에 내몰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들은 희망을 찾아 떠난 건지도 모르겠다고.

자살을 선택한 이를 질책했으면 했지 응원한 적이 없었던 나는 처음으로 낯선 의문과 마주했다.

너무도 낯선.

 

어쩌면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선택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을 얻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죽음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세상을 버리고, 나와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의 희망으로 걸어들어 간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남겨진 이들은 조금 덜 아프게 될까.

그의 낯선 시선이 어쩐지 감사했다.

우리는 매번 남겨진 사람들이라서.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찬혁.

그는 체념과 한숨이 발에 채듯 넘쳐나는 오늘을 희미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희망으로 걷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 희망이 분명해질 때까지, 또렷하게 보일 때까지 끝없이 노래하고 싶은 건지도.

그 노래의 끝에 우리가 찾던 무엇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이 책은 속삭인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건조한 이 시절을 그의 노래로 건너가고 싶다.

꿈이 잡히지 않는 이 서글픈 시절을 그의 노래로 꿈꾸고 싶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헤엄치듯이 살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름다운 그대에게 1~3 세트 - 전3권
펑크로드 지음 / 필프리미엄에디션(FEEL)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고 나서 리뷰 쓰기가 참 어려운 글들이 있다.

때로는 난해해서 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재미있어서 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슨 말을 해도 스포가 될 것만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조차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스토리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무엇이든 비밀로 남겨두어야 다음에 이 책을 읽을 독자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인생이 예측 불허의 당혹스러움이라면,

이 책은 인생을 닮았다.

무엇도 예측할 수 없게, 로설의 공식을 무참히 지르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로맨스'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이 책을 읽으면 대번에 '이럴 수는 없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너무도 잔인하고 잔혹한 삶의 바닥에서 매번 더 잔인하고 잔혹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작가라니.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나락으로, 끝의 끝으로만 밀어붙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주인공을 던져놓을 수도 있구나.

네가 어떻게 살아나나 보자고 매번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며 절망으로만 그녀를 끌어다 놓을 수도 있구나.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내가 생각했던 로맨스의 경계가 와장창 깨어졌다.

(어쩌면 이미 '피폐물'이라고 불리는 책들에서는 놀랍지 않은 설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의 비극은 한계가 없다」

책 뒷면의 이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이지 않을까.

이 한 권의 책에서만이 아닌,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또한 누군가는 그 한계 없는 비극에 몸부림치며 살기 위해 끝없이 애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어.

하나, 간단하게 죽는다. 둘, 복잡하게 산다. 어쩔래?"

 

 

그녀에게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귀족의 이름,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죽음 직전에 그녀가 부여잡은 생의 이름, 할리

또다시 삶의 끝에서 간신히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이름, 레이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번의 삶 끝에서 그녀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 죽을 것인지, 모든 기억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 삶이라도 살아볼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을 움켜쥔다.

그녀에게 주어질 삶이 얼마나 잔인하고 피폐할지 모른 채, 그렇게 생을 선택한다.

다시 주어진 삶은, 너무도 잔인하고 잔혹하기만 했다.

몸이 부서져라 훈련을 받고,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기도 하면서 오직 나라를 위한 무기로 존재해야 했다.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닌 도구, 오로지 나라를 위한 쓸모로만 존재하는 그런 부속품이 되었다.

그 삶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다.

인간성의 상실과 도덕성의 상실. 그리고 끝없는 체념.

살고 싶었던 그녀는, 과연 '살고'있는 것일까.

 

내가 온전한 내 것이었다면 죽음도 불사하고 그를 따라나설 텐데.

나 자신이 온전한 내 것이었다면 나는 그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나의 아름다운 그대에게」 1권, 1부 _ P.176

 

 

'나'이지만 완전한 나일 수 없는 상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삶.

그런 삶을 요구하는 국가.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삶 속에도 '사랑'은 스며든다.

국가를 위한 작전 속에서 '사랑'을 마주친 그녀는 끝없이 번민한다.

거짓의 옷을 뒤집어쓰고서만 마주 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느껴야 하는 절망과 슬픔.

그렇게 그녀의 삶은 또다시 더할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것이 그녀 삶의 마지막 추락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생의 비극은 한계가 없어'서 그녀가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잡은 동아줄은 매번 끊어져 절망의 우물로 그녀를 떨어트린다.

아아, 삶은 끝없는 비극이여라.

내딛는 발걸음마다 온통 진창이여라.

 

 

 

 

사람이 잔인한 정도가 대체 어디까진데요? 나는 정말 모르겠는데 루이씨는 알아요? 그 경계가 어디인지? 그럼 내가 그동안 당해 온건 그 정도 안에서 이루어진 건가요? 알면 좀 가르쳐 줘요. 나는 대체 어디까지 떨어져야 그 경계에 닿는 건가요?"

「나의 아름다운 그대에게」 2권, 2부 _ P.206

 

 

마치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1권과 2권을 읽어내렸다.

담담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삶은 늘 절망의 끝으로 치달았으니, 거기에 색을 입힐 수가 없었다. 동정도 가당찮았다.

한없이 가라앉아 침잠해가는 그녀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읽어내며, 나 또한 함께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1,2권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찔리고 베여도 끝끝내 걷고 또 걷는 그녀의 걸음을 허투루 읽을 수는 없었기에 나 또한 또박또박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그녀는 따라 걸었다.

외면하고 싶은 절망도 꿋꿋이 참고 마주 보았다.

그게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으므로.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책 속의 이야기라는 것을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간혹 마음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흐리게나마 어느 시대쯤일지,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을지 짐작이 가기도 했으니까.

그녀의 삶에 드리운 처참함이 겉돌거나 과하게 부풀려진 느낌이 없어서, 어디엔가 마치 이런 삶이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 같은 울적함이 들었다. (이런 설정에서 현실감을 느낀다는 게 어찌 보면 부자연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으니까.

전쟁과 투쟁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우리들 또한 건너왔으니까 말이다.

가끔은 영화나 소설보다 현실이 더 끔찍하고 잔인하기도 하다는 걸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을 보는 내내 그렇게 마음이 일렁거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는 조금 더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어서 선과 악의 경계를 좀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조차 모호한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기 위해 온갖 나쁜 일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던 시대 속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이는 역할을 맡았다.

그 속에서 매번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는, 매번 삶에게 배신 당했다.

그녀를 더 나쁜 쪽으로, 나쁜 쪽으로, 한없이 내몰았다.

 

 

 

 

 

2부 끝에 등장하는 편지를 읽다가 울컥했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나를 다독이는 손길 같아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커다란 위로의 손길이 나를 쓰다듬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토닥임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삶은 늘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온전히 벗어나기가 힘들어 늘 어제를 짊어지고 걷느라 힘이 드니까 말이다.

물론 그녀에게도 이 편지가 지친 삶의 여정을 위안할 수 있는 깊은 위로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온몸을 좀먹는 후회로 얼룩진 시간을 버텨야 했던 그녀가 다시 앞을 향해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그렇게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 3부를 향해 갔다.

이 책이 로맨스일 수 있는 이유는 3부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순간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녀를 끝없이 생으로 끌어당겼던 사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삶 속에 물처럼 공기처럼 존재했던 사람.

배신하고 배신당해도 끝끝내 놓아지지 않았던 사랑.

그 사랑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3부가 존재했다.

감사하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나, 3부 없었으면 진짜 울뻔했다. 하아. 너무 좋다. 3부.ㅠ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갈기갈기 찢긴 심장으로, 수많은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그들은 다시 사랑을 한다.

 

 

 

 

 

 

 

혹시나 이 책을 처음 펼쳐 들고 읽기가 힘든 사람이 있다면, 꾹 참고 2권까지 읽으라고 당부하고 싶다.

괜찮다, 우리에겐 3권이 있다.

한없는 절망과 고통을 구르고 굴러 기어코 사랑에 가닿는 그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진창 속에도 희망을 꿈꾸며 같이 고단한 길을 건너보자.

잔인한 시간을 건너야만 완성되는 사랑이 있다.

바로 우리 눈앞에.

3부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아마도 1부와 2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마지막 이야기가 그토록 달콤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거다.

독자에게 필요한 건, 인내.

깜짝 놀랄 충격적 사건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도 그저 그다음 장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인내가 필요할 뿐이다.

진짜 '사랑'을 만나려면.

 

 

 

 

 

이 글을 '성장'이라고 봐야 하는지, 삶에 대한 처절한 '사투'라고 봐야 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성장이라고 부르기도 사투라 부르기도 힘들 만큼 험난한 여정이었으니까.

그녀의 선택이 때로는 잘못되고 맹목적이어도 나는 탓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처절한 생을 향한 걸음들을 그저 응원할 수밖에.

단지 그녀가 주인공이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언제 주인공이라고 무조건 신뢰하고 이해하고 용서했었나.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다들 한 치 앞을 몰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에 속아 진창을 구르기도 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우리 모두 한때는 무모했고, 어쩌면 여전히 무모하고 어리석다.

삶이 나에게 건네준 여러 번의 선택지 중, 나 또한 매번 옳은 길만을, 꽃길만을 선택하진 못했다.

매번 그 길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대부분이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였다.

나도 그녀처럼 생의 순간순간마다 매번 넘어지고 엎어졌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여전히 삶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은,

그녀처럼 기어코 생을 향해 손 뻗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더 그녀가 지나온 길들이 아팠다.

그녀도 나도, 생은 누구에게나 잔인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오늘 내가 먹을 점심 메뉴를 선택할 수 있어서

내 일상의 사소하고도 많은 선택들을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내 삶이 내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평온한 나의 일상이 소중해진다.

삶이 내게 더 관대하기를 늘 기대하지만, 더 잔인한 삶 속에 나를 내던지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그림(서양미술 쪽)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림 관련 서적을 보면 늘 관심 있게 뒤적거리고, 구입해서 집에 모셔두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방면으로 박식하다거나 조예가 깊다거나 작품을 보는 깊은 눈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할 뿐이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나 화가의 삶에 대한 글들을 읽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내게 그림을 보는 일은 시를 읽는 일과 같다.

이해의 범주에 드는 일이 아니라 그저 느끼는 일이다.

시를 이해하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저 느껴지는 것을 느끼는 것뿐이므로.

그래서 시집을 좋아하고 시를 즐겨 읽으면서도 시를 가지고 서평을 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로지 어떤 느낌, 감정, 분위기 같은... 글로 설명될 수 없는 무형의 이미지들로 내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보다는 그림이 좀 더 선명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물론 현대미술 쪽으로 넘어오고서는 그것조차 불분명해졌지만)

그럼에도 내겐 그림은 평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감상'의 영역일 뿐.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그림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끼는 뭉클함과 낯선 일렁거림 들.

그것들을 이해의 범주로 끌어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저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림이 내게 전해주는 어떤 무형의 일렁임 들을.

 

 

 

 

 

줄리언 반스가 전해주는 서양 미술사는 익숙한 듯 낯설다.

같은 그림을 보고 이렇게 깊게 생각하고 사유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소설가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놓는 반스의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제리코 편에서는 소설가의 문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실제의 사건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스토리'를 끌어내기에 더 좋은 소재가 되기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이야기의 절묘한 조화는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 어떤 스토리가 숨겨져 있는지, 그것을 상상해 보는 재미.

그런 방식으로 그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내게는 매력적인 형태의 감상법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색감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도 색에 치중해서 그림을 감상하게 된다.

미술계에서 오래도록 선과 색을 가지고 무엇이 더 좋은 것(?)인가를 따졌었다는데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색에 손을 든다.

하늘이 파랑이라고 생각했지만, 화가가 잡아챈 하늘은 회색도 흰색도 파랑도 보라도 ... 그 어떤 색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빨간 사과에도 노랑이 담겨있고, 초록 잎에도 검정이 존재한다.

화가가 화폭에 담아놓은 세상은 예상하지 못했던 색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그 화가가 옮겨둔 색들을 사랑한다.

색을 바라보느라 그 그림 속에 담긴 스토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

다음번에 그림을 보러 가게 된다면, 그때는 그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좀 더 들여다보고 와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줄리언 반스의 박학다식함은 그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여러 분야에 지식이 넘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사적인 미술 산책이라고 하기엔 거의 평론 수준의 글들이라 그의 지식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지곤 했다.

미술사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으면서 자기만의 위트 있는 농담도 함께 건네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려운가 싶다가도 재밌고, 지루한가 싶다가도 빠져들게 된다.

종종 피식피식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문장들을 만나기도 한다.

 

 

약간의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선택한 화가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 말을 좀 뒤집어 보자면, 일반인에게 흔하게 알려진 화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선택한 화가들 또한 유명하고, 화가 이름까진 모르더라도 '그림' 자체로 유명한 화가들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그림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알만한 화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고흐나 르누아르, 모네 같은 화가들은 너무 알려진 게 많아서 다루지 않았던 걸까.

 

덕분에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나는 네이버 검색을 해야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로만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보기 위해 매번 인터넷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 작가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그림이 실리지 않은 게 역시나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가가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책 표지 그림을 그린 '팡탱-라투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화가인데 그가 그린 인물화들이 인상적이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사람들의 표정과 어두운 분위기의 인물화들은 흡사 '조용한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침묵과 정숙, 절제의 틀에 꽁꽁 묶인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팡탱-라투르'를 검색하자 내게 너무 익숙한 정물화들이 등장했다.

화가의 이름은 모른 채 익숙하게 여기저기에서 봤었던 정물화들.

그 어둡고 딱딱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린 게 맞나 싶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그림에 당황했다.

책에서는 인물화 위주로 다루고 있었기에 그의 다른 면모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화가 다루는 전혀 다른 색의 표현이 그의 작품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대의 셀럽(?)들의 그림을 자주 그렸던 것 같은데, 표지에 등장하는 미소년은 유명한 시인 '랭보'였다. (랭보의 얼굴을 몰랐던 나만 놀랐나?)

우리나라에 댄디보이 백석 시인이 있었다면, 프랑스엔 미소년 랭보가 있었나 보다.

시인이 너무 시인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암흑기를 나중이 아니라 먼저 거쳤다는 점에서도 그는 남다르다. 르동은 어둠이 세월과 함께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않고 일찌감치 어둠에서 탈출했다. 먼저 을씨년스러운 풍경, 포의 소설 같은 공포, 누아르 작품들의 우울한 두려움과 자포자기가 있고, 나중 작품에서 인광성 색채, 청금석 같은 파랑과 마로니에 갈색, 흐릿한 보라와 한련의 주황색, 파스텔 같은 홍조와 상처 자국이 있다. 또한 더 개인적인 것, 암시적인 것, 은밀한 몽상이 먼저의 작품들에 있다면, 나중 것들은 더 공개적이요 더 계획적이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르동 : 위로 위로! p.200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가, 르동.

르동 역시 줄리언 반스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된 화가다.

(물론 그림을 검색해보니 이미 알고 있는 그림들도 꽤 여러 점이었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으니 몰랐던 걸로;;;)

반스가 기가 막힌 문장으로 표현한 것처럼 르동의 그림은 두 가지로 나뉜다.

전기의 그림들은 어둡고 신비하고 몽환적이며 오싹하고 음울한 느낌이 강하다.

어떤 면에서는 동화적이거나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게 읽히기도 하는데, 반스의 표현처럼 '누아르'나 오컬트적인 요소가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좀 힘든 그림들이다.

그 그림들이 나에게 주는 기운들은 한없이 무겁고 우울하기 때문에.

 

반면 후기의 작품들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고 다정하다.

그가 꽃에 사용한 색감들은 그전 그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밝고 아름답다.

미술사에서는 드문 애처가였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평온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하니 그의 화풍이 달라진 것은 '사랑'때문이었을까.

아내 카미유를 만나 결혼하면서부터 그의 화폭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뒤로 갈수록 그의 그림들은 점점 더 밝아지고 따뜻해졌으니, 그는 우리 모두가 삶에서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을 찾은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꽃그림이 더 좋다. 거기에 삶에 답이 있을 것만 같아서.

 

 

우리는 그의 작품을 두 가지 수준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림의 뜻에는 신경 쓰지 않고 불타는 듯한 색채에 살짝 선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후기 작품이 있고,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는 은밀한 상상력의 돌연변이 산물처럼 공중을 떠다니며 우리의 뇌리를 맴도는 르동의 자랑거리, 누아르 그림들이 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르동 : 위로 위로! p.208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은 행복일까 슬픔일까? 우리는 이에 대답이나 할 수 있을까? 가정생활의 풍요 속에 직관으로 엿보이는 무상함을 그렇게 강렬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면 물론 대답은 양쪽 다 일 수 있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보나르 :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p.219

 

 

 

보나르의 그림을 보면서 반스는 무엇을 느꼈던 걸까.

옮긴이의 글을 읽다가 반스가 보나르 관련 글을 썼을 때가 아내를 잃은 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을 잡아 끈 문장이 있어 포스트잇을 붙여 두었는데,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다시 그 부분을 펼쳐보니 느낌이 묘해졌다.

단지 내가 결혼한 사람이라서 그 부분에 눈이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글쓴이의 마음이 너무 깊게 느껴져서 그 문장에서 멈췄었던가 보다.

호지킨 편에서 아내와 함께 떠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스의 문장들에서 깊은 애정을 느꼈기에 더 이 문장이 슬프게 다가온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낯선 화가이지만, 낯설지 않은 그림을 가진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웠다.

이미 알고 있는 화가의 이야기 또한, 내가 알던 그림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글을 써줘서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가 인용한 문장도 많았는데, 결국 미술 관련 책들을 인용할 만큼 많이 섭렵했다는 소리이기도 하니, 그의 방대한 지식에 존경을 표할 수밖에.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서양미술사는 얕지 않은 깊이로 인해 꽤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준다.

지나치게 딱딱한 인문도서가 아니기에 좀 더 유연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미술사 책이 아닌가 싶다.

 

줄리언 반스는 사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주 사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사실은 너무 지적인 미술 산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
올린카 비슈티차.드라젠 그루비시치 지음, 박다솜 옮김 / 놀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별의 박물관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

 

이별을 전시할 공간이 있다면 나는 나의 이별을 그곳에 걸어 놓고 싶을까.

한참을 생각해 봤다.

누군가를 영영 잃어버린 상처를,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을, 조각나 버린 사랑을 그곳에 걸어두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그들은, 식어버린 사랑 앞에서 지난 사랑의 흔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지금 사랑은 부서져버렸다고 해도, 그 사랑을 이루었던 파편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지난 사랑의 물건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랑의 기억들을, 사랑이 통과하고 지나가버린 쓸쓸한 잔재들을 전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이별의 박물관은 처음 문을 열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지나온 흔적을 덕지 덕지 묻힌 이별의 잔재들을 보러 왔다.

 

이별로 인해 남겨진 사랑의 순간들을 보며, 그들은 공감했고 위로받았다.

이별 이후에도 여전히 지난 사랑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멈춰있는 물건들.

그것들이 가진 힘은 의외로 대단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슬픔을 공명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유로, 전혀 다른 사람과 헤어졌지만, 이별의 순간 느꼈던 고통을 다들 알고 있다.

그리고 예전 그곳에 멈춰진 채 부서져버린 사랑의 쓸쓸함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별과 이별이 만나 손을 잡고, 물건과 물건이 모여 또 다른 의미가 된다.

 

 

 

한때, 이별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너무 슬프지만 애틋하고, 외로워 보여 더 안아주고 싶었던 단어였다.

다들 싫어하는 이별을 나는 좀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괜히 센치해지고, 괜히 감상적이 되곤 했던.

 

하지만 좀 더 자라 진짜 이별을 겪게 되자, 너무도 고통스러워 이별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변하는 것도, 사랑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도 너무 끔찍했다.

많이도 울었고, 많이도 힘들었고, 많은 상처로 남겨졌다.

 

그렇지만 그 빌어먹을 이별은 끊임없이 날 찾아왔다.

가족과도 이별해야 했고, 연인과도 이별해야 했고, 친구와도 이별해야 했다.

삶의 길목마다 불쑥 나타난 이별과 기어코 마주쳐야만 했다.

그 순간들마다 나는 마냥 잊으려고 참 많이도 노력했다.

잊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별들이 어쩐지 안쓰러워졌다.

그 힘든 순간들마다 이렇게 마지막 남은 사랑과 슬픔과 고통과 미련을 함께 포장해 보낼 곳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은 사랑했던 그 순간들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도 안타까워 서글프기도 했다.

그토록 간절했던 한 시기가 끝났음에 가끔은 애도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 이 이별 박물관을 만났다면, 좀 더 다정하게 내 속의 고통과 이별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곳에 걸어두고 나 대신 내 이별을 쓰다듬어 줄 누군가 덕분에 나는 정말 잊어버리고 살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나의 지나버린 어떤 시간들을.

 

 

 

 

이 책에는 많은 이별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짐작이 가능한 이별의 시간들도 있고, 짐작은 어렵지만 쓰다듬어주고 싶은 순간들도 있다.

상실의 공포와 슬픔, 사랑이 끝나버리고서야 깨닫게 되는 사랑의 의미.

때로는 원망이, 때로는 그리움이 토해져 나온다.

모두 다른 목소리로 이별의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찬란했던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당신과 나만 알고 있는.

멈췄거나, 영영 소멸되어 버린 우리의 지나간 사랑 이야기.

 

 

 

사랑은 때로는 너무 잔인해서 고통스럽고, 너무 차가워서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기도 한다.

아름답거나 따뜻하기만 했던 사랑은 없다.

이별은 원래 차갑고 고통스러운 존재인데, 그 이별에 닿기까지 누군가는 참 많이도 울고, 추웠던가 보다.

잔인했던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다행스럽다.

적어도 그 사랑을 끝내기에 가장 필요한 분노와 슬픔을 주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 마지막을 이렇게 남기는 것은,

완벽한 홀가분의 상태를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망을 하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마지막 찌꺼기를 외면하고 싶어서 였을까.

 

 

 

 

그는 말했다. "사랑하며 살아. 내가 죽으면 재를 필름 통에 담아 친구들에게 나눠줘. 세상 곳곳에 재를 흩뿌려주면 좋겠다."

 

 

 

이별의 기억은 동시에 사랑의 기억이기도 하다.

필름 통에 사랑하는 사람의 재를 담아 세상 곳곳에 뿌려주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그와 나눈 사랑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이별하는 중일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서 완벽히 헤어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별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그와 그녀가 남긴 필름 통속의 재를 보면서 그들을 기억해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별을 추모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슬픔으로부터 걸어 나와 일상의 순간들을 다정히 껴안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의 유언처럼.

'사랑하며 살아'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의 그 이별의 순간들이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슬픔의 기억들이 서로 만나, 서로를 쓰다듬고 위로한다.

부모님을 잃었던 시간들의 고통들을 다정히 안아준다.

서투르고 어리석었던 사랑의 마지막도 탓하지 않고 이해해준다.

상처받았던 시간들이, 원망하고 미워했던 시간들이 천천히 조금씩 소멸되어 간다.

 

이 책 속에는

오로지 이해와 위로와 토닥임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분명 잘못된 상대를 만나 무너지고 고통스러웠던 사랑의 기억들도 존재하고, 원망과 분노가 여전히 살아있는 글들도 존재한다.

짧은 순간 불처럼 사랑했던 기억도,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별도 담겨있는데.... 어째서 책을 덮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이런 위로가 받고 싶어서 사람들이 '이별 박물관'을 찾아가고, 남겨진 물건들을 바라보는 건가 보다.

 

 

 

지금 이별하고 있는 사람,

이미 한참 전에 이별을 경험했던 사람,

이별에 마음 아파본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누구라도 한 번쯤 겪었을 이별의 순간을 담담히 손잡아 주는 고마운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