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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그림(서양미술 쪽)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림 관련 서적을 보면 늘 관심 있게 뒤적거리고, 구입해서 집에 모셔두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방면으로 박식하다거나 조예가 깊다거나 작품을 보는 깊은 눈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할 뿐이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나 화가의 삶에 대한 글들을 읽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내게 그림을 보는 일은 시를 읽는 일과 같다.
이해의 범주에 드는 일이 아니라 그저 느끼는 일이다.
시를 이해하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저 느껴지는 것을 느끼는 것뿐이므로.
그래서 시집을 좋아하고 시를 즐겨 읽으면서도 시를 가지고 서평을 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로지 어떤 느낌, 감정, 분위기 같은... 글로 설명될 수 없는 무형의 이미지들로 내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보다는 그림이 좀 더 선명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물론 현대미술 쪽으로 넘어오고서는 그것조차 불분명해졌지만)
그럼에도 내겐 그림은 평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감상'의 영역일 뿐.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그림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끼는 뭉클함과 낯선 일렁거림 들.
그것들을 이해의 범주로 끌어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저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림이 내게 전해주는 어떤 무형의 일렁임 들을.

줄리언 반스가 전해주는 서양 미술사는 익숙한 듯 낯설다.
같은 그림을 보고 이렇게 깊게 생각하고 사유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소설가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놓는 반스의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제리코 편에서는 소설가의 문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실제의 사건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스토리'를 끌어내기에 더 좋은 소재가 되기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이야기의 절묘한 조화는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 어떤 스토리가 숨겨져 있는지, 그것을 상상해 보는 재미.
그런 방식으로 그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내게는 매력적인 형태의 감상법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색감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도 색에 치중해서 그림을 감상하게 된다.
미술계에서 오래도록 선과 색을 가지고 무엇이 더 좋은 것(?)인가를 따졌었다는데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색에 손을 든다.
하늘이 파랑이라고 생각했지만, 화가가 잡아챈 하늘은 회색도 흰색도 파랑도 보라도 ... 그 어떤 색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빨간 사과에도 노랑이 담겨있고, 초록 잎에도 검정이 존재한다.
화가가 화폭에 담아놓은 세상은 예상하지 못했던 색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그 화가가 옮겨둔 색들을 사랑한다.
색을 바라보느라 그 그림 속에 담긴 스토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
다음번에 그림을 보러 가게 된다면, 그때는 그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좀 더 들여다보고 와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줄리언 반스의 박학다식함은 그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여러 분야에 지식이 넘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사적인 미술 산책이라고 하기엔 거의 평론 수준의 글들이라 그의 지식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지곤 했다.
미술사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으면서 자기만의 위트 있는 농담도 함께 건네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려운가 싶다가도 재밌고, 지루한가 싶다가도 빠져들게 된다.
종종 피식피식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문장들을 만나기도 한다.
약간의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선택한 화가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고)그 말을 좀 뒤집어 보자면, 일반인에게 흔하게 알려진 화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선택한 화가들 또한 유명하고, 화가 이름까진 모르더라도 '그림' 자체로 유명한 화가들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그림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알만한 화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고흐나 르누아르, 모네 같은 화가들은 너무 알려진 게 많아서 다루지 않았던 걸까.
덕분에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나는 네이버 검색을 해야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로만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보기 위해 매번 인터넷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 작가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그림이 실리지 않은 게 역시나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가가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책 표지 그림을 그린 '팡탱-라투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화가인데 그가 그린 인물화들이 인상적이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사람들의 표정과 어두운 분위기의 인물화들은 흡사 '조용한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침묵과 정숙, 절제의 틀에 꽁꽁 묶인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팡탱-라투르'를 검색하자 내게 너무 익숙한 정물화들이 등장했다.
화가의 이름은 모른 채 익숙하게 여기저기에서 봤었던 정물화들.
그 어둡고 딱딱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린 게 맞나 싶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그림에 당황했다.
책에서는 인물화 위주로 다루고 있었기에 그의 다른 면모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화가 다루는 전혀 다른 색의 표현이 그의 작품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대의 셀럽(?)들의 그림을 자주 그렸던 것 같은데, 표지에 등장하는 미소년은 유명한 시인 '랭보'였다. (랭보의 얼굴을 몰랐던 나만 놀랐나?)
우리나라에 댄디보이 백석 시인이 있었다면, 프랑스엔 미소년 랭보가 있었나 보다.
시인이 너무 시인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암흑기를 나중이 아니라 먼저 거쳤다는 점에서도 그는 남다르다. 르동은 어둠이 세월과 함께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않고 일찌감치 어둠에서 탈출했다. 먼저 을씨년스러운 풍경, 포의 소설 같은 공포, 누아르 작품들의 우울한 두려움과 자포자기가 있고, 나중 작품에서 인광성 색채, 청금석 같은 파랑과 마로니에 갈색, 흐릿한 보라와 한련의 주황색, 파스텔 같은 홍조와 상처 자국이 있다. 또한 더 개인적인 것, 암시적인 것, 은밀한 몽상이 먼저의 작품들에 있다면, 나중 것들은 더 공개적이요 더 계획적이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르동 : 위로 위로! p.200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가, 르동.
르동 역시 줄리언 반스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된 화가다.
(물론 그림을 검색해보니 이미 알고 있는 그림들도 꽤 여러 점이었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으니 몰랐던 걸로;;;)
반스가 기가 막힌 문장으로 표현한 것처럼 르동의 그림은 두 가지로 나뉜다.
전기의 그림들은 어둡고 신비하고 몽환적이며 오싹하고 음울한 느낌이 강하다.
어떤 면에서는 동화적이거나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게 읽히기도 하는데, 반스의 표현처럼 '누아르'나 오컬트적인 요소가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좀 힘든 그림들이다.
그 그림들이 나에게 주는 기운들은 한없이 무겁고 우울하기 때문에.
반면 후기의 작품들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고 다정하다.
그가 꽃에 사용한 색감들은 그전 그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밝고 아름답다.
미술사에서는 드문 애처가였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평온한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하니 그의 화풍이 달라진 것은 '사랑'때문이었을까.
아내 카미유를 만나 결혼하면서부터 그의 화폭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뒤로 갈수록 그의 그림들은 점점 더 밝아지고 따뜻해졌으니, 그는 우리 모두가 삶에서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을 찾은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꽃그림이 더 좋다. 거기에 삶에 답이 있을 것만 같아서.
우리는 그의 작품을 두 가지 수준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림의 뜻에는 신경 쓰지 않고 불타는 듯한 색채에 살짝 선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후기 작품이 있고,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는 은밀한 상상력의 돌연변이 산물처럼 공중을 떠다니며 우리의 뇌리를 맴도는 르동의 자랑거리, 누아르 그림들이 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르동 : 위로 위로! p.208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은 행복일까 슬픔일까? 우리는 이에 대답이나 할 수 있을까? 가정생활의 풍요 속에 직관으로 엿보이는 무상함을 그렇게 강렬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면 물론 대답은 양쪽 다 일 수 있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 보나르 :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p.219
보나르의 그림을 보면서 반스는 무엇을 느꼈던 걸까.
옮긴이의 글을 읽다가 반스가 보나르 관련 글을 썼을 때가 아내를 잃은 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을 잡아 끈 문장이 있어 포스트잇을 붙여 두었는데,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다시 그 부분을 펼쳐보니 느낌이 묘해졌다.
단지 내가 결혼한 사람이라서 그 부분에 눈이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글쓴이의 마음이 너무 깊게 느껴져서 그 문장에서 멈췄었던가 보다.
호지킨 편에서 아내와 함께 떠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스의 문장들에서 깊은 애정을 느꼈기에 더 이 문장이 슬프게 다가온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낯선 화가이지만, 낯설지 않은 그림을 가진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웠다.
이미 알고 있는 화가의 이야기 또한, 내가 알던 그림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글을 써줘서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가 인용한 문장도 많았는데, 결국 미술 관련 책들을 인용할 만큼 많이 섭렵했다는 소리이기도 하니, 그의 방대한 지식에 존경을 표할 수밖에.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서양미술사는 얕지 않은 깊이로 인해 꽤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준다.
지나치게 딱딱한 인문도서가 아니기에 좀 더 유연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미술사 책이 아닌가 싶다.
줄리언 반스는 사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주 사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사실은 너무 지적인 미술 산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