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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
올린카 비슈티차.드라젠 그루비시치 지음, 박다솜 옮김 / 놀 / 2019년 9월
평점 :

이별의 박물관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
이별을 전시할 공간이 있다면 나는 나의 이별을 그곳에 걸어 놓고 싶을까.
한참을 생각해 봤다.
누군가를 영영 잃어버린 상처를,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을, 조각나 버린 사랑을 그곳에 걸어두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그들은, 식어버린 사랑 앞에서 지난 사랑의 흔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지금 사랑은 부서져버렸다고 해도, 그 사랑을 이루었던 파편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지난 사랑의 물건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랑의 기억들을, 사랑이 통과하고 지나가버린 쓸쓸한 잔재들을 전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이별의 박물관은 처음 문을 열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지나온 흔적을 덕지 덕지 묻힌 이별의 잔재들을 보러 왔다.
이별로 인해 남겨진 사랑의 순간들을 보며, 그들은 공감했고 위로받았다.
이별 이후에도 여전히 지난 사랑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멈춰있는 물건들.
그것들이 가진 힘은 의외로 대단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슬픔을 공명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유로, 전혀 다른 사람과 헤어졌지만, 이별의 순간 느꼈던 고통을 다들 알고 있다.
그리고 예전 그곳에 멈춰진 채 부서져버린 사랑의 쓸쓸함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별과 이별이 만나 손을 잡고, 물건과 물건이 모여 또 다른 의미가 된다.

한때, 이별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너무 슬프지만 애틋하고, 외로워 보여 더 안아주고 싶었던 단어였다.
다들 싫어하는 이별을 나는 좀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괜히 센치해지고, 괜히 감상적이 되곤 했던.
하지만 좀 더 자라 진짜 이별을 겪게 되자, 너무도 고통스러워 이별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변하는 것도, 사랑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도 너무 끔찍했다.
많이도 울었고, 많이도 힘들었고, 많은 상처로 남겨졌다.
그렇지만 그 빌어먹을 이별은 끊임없이 날 찾아왔다.
가족과도 이별해야 했고, 연인과도 이별해야 했고, 친구와도 이별해야 했다.
삶의 길목마다 불쑥 나타난 이별과 기어코 마주쳐야만 했다.
그 순간들마다 나는 마냥 잊으려고 참 많이도 노력했다.
잊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별들이 어쩐지 안쓰러워졌다.
그 힘든 순간들마다 이렇게 마지막 남은 사랑과 슬픔과 고통과 미련을 함께 포장해 보낼 곳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은 사랑했던 그 순간들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도 안타까워 서글프기도 했다.
그토록 간절했던 한 시기가 끝났음에 가끔은 애도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 이 이별 박물관을 만났다면, 좀 더 다정하게 내 속의 고통과 이별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곳에 걸어두고 나 대신 내 이별을 쓰다듬어 줄 누군가 덕분에 나는 정말 잊어버리고 살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나의 지나버린 어떤 시간들을.

이 책에는 많은 이별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짐작이 가능한 이별의 시간들도 있고, 짐작은 어렵지만 쓰다듬어주고 싶은 순간들도 있다.
상실의 공포와 슬픔, 사랑이 끝나버리고서야 깨닫게 되는 사랑의 의미.
때로는 원망이, 때로는 그리움이 토해져 나온다.
모두 다른 목소리로 이별의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찬란했던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당신과 나만 알고 있는.
멈췄거나, 영영 소멸되어 버린 우리의 지나간 사랑 이야기.

사랑은 때로는 너무 잔인해서 고통스럽고, 너무 차가워서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기도 한다.
아름답거나 따뜻하기만 했던 사랑은 없다.
이별은 원래 차갑고 고통스러운 존재인데, 그 이별에 닿기까지 누군가는 참 많이도 울고, 추웠던가 보다.
잔인했던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다행스럽다.
적어도 그 사랑을 끝내기에 가장 필요한 분노와 슬픔을 주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 마지막을 이렇게 남기는 것은,
완벽한 홀가분의 상태를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망을 하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마지막 찌꺼기를 외면하고 싶어서 였을까.

그는 말했다. "사랑하며 살아. 내가 죽으면 재를 필름 통에 담아 친구들에게 나눠줘. 세상 곳곳에 재를 흩뿌려주면 좋겠다."
이별의 기억은 동시에 사랑의 기억이기도 하다.
필름 통에 사랑하는 사람의 재를 담아 세상 곳곳에 뿌려주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그와 나눈 사랑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이별하는 중일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서 완벽히 헤어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별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그와 그녀가 남긴 필름 통속의 재를 보면서 그들을 기억해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별을 추모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슬픔으로부터 걸어 나와 일상의 순간들을 다정히 껴안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의 유언처럼.
'사랑하며 살아'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의 그 이별의 순간들이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슬픔의 기억들이 서로 만나, 서로를 쓰다듬고 위로한다.
부모님을 잃었던 시간들의 고통들을 다정히 안아준다.
서투르고 어리석었던 사랑의 마지막도 탓하지 않고 이해해준다.
상처받았던 시간들이, 원망하고 미워했던 시간들이 천천히 조금씩 소멸되어 간다.
이 책 속에는
오로지 이해와 위로와 토닥임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분명 잘못된 상대를 만나 무너지고 고통스러웠던 사랑의 기억들도 존재하고, 원망과 분노가 여전히 살아있는 글들도 존재한다.
짧은 순간 불처럼 사랑했던 기억도,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별도 담겨있는데.... 어째서 책을 덮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이런 위로가 받고 싶어서 사람들이 '이별 박물관'을 찾아가고, 남겨진 물건들을 바라보는 건가 보다.

지금 이별하고 있는 사람,
이미 한참 전에 이별을 경험했던 사람,
이별에 마음 아파본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누구라도 한 번쯤 겪었을 이별의 순간을 담담히 손잡아 주는 고마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