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그대에게 1~3 세트 - 전3권
펑크로드 지음 / 필프리미엄에디션(FEEL)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고 나서 리뷰 쓰기가 참 어려운 글들이 있다.

때로는 난해해서 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재미있어서 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슨 말을 해도 스포가 될 것만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조차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스토리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무엇이든 비밀로 남겨두어야 다음에 이 책을 읽을 독자의 즐거움을 빼앗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인생이 예측 불허의 당혹스러움이라면,

이 책은 인생을 닮았다.

무엇도 예측할 수 없게, 로설의 공식을 무참히 지르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로맨스'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이 책을 읽으면 대번에 '이럴 수는 없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너무도 잔인하고 잔혹한 삶의 바닥에서 매번 더 잔인하고 잔혹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작가라니.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나락으로, 끝의 끝으로만 밀어붙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주인공을 던져놓을 수도 있구나.

네가 어떻게 살아나나 보자고 매번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며 절망으로만 그녀를 끌어다 놓을 수도 있구나.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내가 생각했던 로맨스의 경계가 와장창 깨어졌다.

(어쩌면 이미 '피폐물'이라고 불리는 책들에서는 놀랍지 않은 설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의 비극은 한계가 없다」

책 뒷면의 이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이지 않을까.

이 한 권의 책에서만이 아닌,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또한 누군가는 그 한계 없는 비극에 몸부림치며 살기 위해 끝없이 애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어.

하나, 간단하게 죽는다. 둘, 복잡하게 산다. 어쩔래?"

 

 

그녀에게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귀족의 이름,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죽음 직전에 그녀가 부여잡은 생의 이름, 할리

또다시 삶의 끝에서 간신히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이름, 레이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번의 삶 끝에서 그녀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 죽을 것인지, 모든 기억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 삶이라도 살아볼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을 움켜쥔다.

그녀에게 주어질 삶이 얼마나 잔인하고 피폐할지 모른 채, 그렇게 생을 선택한다.

다시 주어진 삶은, 너무도 잔인하고 잔혹하기만 했다.

몸이 부서져라 훈련을 받고,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기도 하면서 오직 나라를 위한 무기로 존재해야 했다.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닌 도구, 오로지 나라를 위한 쓸모로만 존재하는 그런 부속품이 되었다.

그 삶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다.

인간성의 상실과 도덕성의 상실. 그리고 끝없는 체념.

살고 싶었던 그녀는, 과연 '살고'있는 것일까.

 

내가 온전한 내 것이었다면 죽음도 불사하고 그를 따라나설 텐데.

나 자신이 온전한 내 것이었다면 나는 그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나의 아름다운 그대에게」 1권, 1부 _ P.176

 

 

'나'이지만 완전한 나일 수 없는 상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삶.

그런 삶을 요구하는 국가.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삶 속에도 '사랑'은 스며든다.

국가를 위한 작전 속에서 '사랑'을 마주친 그녀는 끝없이 번민한다.

거짓의 옷을 뒤집어쓰고서만 마주 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느껴야 하는 절망과 슬픔.

그렇게 그녀의 삶은 또다시 더할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것이 그녀 삶의 마지막 추락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생의 비극은 한계가 없어'서 그녀가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잡은 동아줄은 매번 끊어져 절망의 우물로 그녀를 떨어트린다.

아아, 삶은 끝없는 비극이여라.

내딛는 발걸음마다 온통 진창이여라.

 

 

 

 

사람이 잔인한 정도가 대체 어디까진데요? 나는 정말 모르겠는데 루이씨는 알아요? 그 경계가 어디인지? 그럼 내가 그동안 당해 온건 그 정도 안에서 이루어진 건가요? 알면 좀 가르쳐 줘요. 나는 대체 어디까지 떨어져야 그 경계에 닿는 건가요?"

「나의 아름다운 그대에게」 2권, 2부 _ P.206

 

 

마치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1권과 2권을 읽어내렸다.

담담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삶은 늘 절망의 끝으로 치달았으니, 거기에 색을 입힐 수가 없었다. 동정도 가당찮았다.

한없이 가라앉아 침잠해가는 그녀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읽어내며, 나 또한 함께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1,2권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찔리고 베여도 끝끝내 걷고 또 걷는 그녀의 걸음을 허투루 읽을 수는 없었기에 나 또한 또박또박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그녀는 따라 걸었다.

외면하고 싶은 절망도 꿋꿋이 참고 마주 보았다.

그게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으므로.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책 속의 이야기라는 것을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간혹 마음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흐리게나마 어느 시대쯤일지,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을지 짐작이 가기도 했으니까.

그녀의 삶에 드리운 처참함이 겉돌거나 과하게 부풀려진 느낌이 없어서, 어디엔가 마치 이런 삶이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 같은 울적함이 들었다. (이런 설정에서 현실감을 느낀다는 게 어찌 보면 부자연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으니까.

전쟁과 투쟁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우리들 또한 건너왔으니까 말이다.

가끔은 영화나 소설보다 현실이 더 끔찍하고 잔인하기도 하다는 걸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을 보는 내내 그렇게 마음이 일렁거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는 조금 더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어서 선과 악의 경계를 좀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조차 모호한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기 위해 온갖 나쁜 일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던 시대 속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이는 역할을 맡았다.

그 속에서 매번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는, 매번 삶에게 배신 당했다.

그녀를 더 나쁜 쪽으로, 나쁜 쪽으로, 한없이 내몰았다.

 

 

 

 

 

2부 끝에 등장하는 편지를 읽다가 울컥했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나를 다독이는 손길 같아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커다란 위로의 손길이 나를 쓰다듬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토닥임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삶은 늘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온전히 벗어나기가 힘들어 늘 어제를 짊어지고 걷느라 힘이 드니까 말이다.

물론 그녀에게도 이 편지가 지친 삶의 여정을 위안할 수 있는 깊은 위로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온몸을 좀먹는 후회로 얼룩진 시간을 버텨야 했던 그녀가 다시 앞을 향해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그렇게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 3부를 향해 갔다.

이 책이 로맨스일 수 있는 이유는 3부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순간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녀를 끝없이 생으로 끌어당겼던 사람.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삶 속에 물처럼 공기처럼 존재했던 사람.

배신하고 배신당해도 끝끝내 놓아지지 않았던 사랑.

그 사랑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3부가 존재했다.

감사하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나, 3부 없었으면 진짜 울뻔했다. 하아. 너무 좋다. 3부.ㅠ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갈기갈기 찢긴 심장으로, 수많은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그들은 다시 사랑을 한다.

 

 

 

 

 

 

 

혹시나 이 책을 처음 펼쳐 들고 읽기가 힘든 사람이 있다면, 꾹 참고 2권까지 읽으라고 당부하고 싶다.

괜찮다, 우리에겐 3권이 있다.

한없는 절망과 고통을 구르고 굴러 기어코 사랑에 가닿는 그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진창 속에도 희망을 꿈꾸며 같이 고단한 길을 건너보자.

잔인한 시간을 건너야만 완성되는 사랑이 있다.

바로 우리 눈앞에.

3부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아마도 1부와 2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마지막 이야기가 그토록 달콤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거다.

독자에게 필요한 건, 인내.

깜짝 놀랄 충격적 사건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도 그저 그다음 장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인내가 필요할 뿐이다.

진짜 '사랑'을 만나려면.

 

 

 

 

 

이 글을 '성장'이라고 봐야 하는지, 삶에 대한 처절한 '사투'라고 봐야 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성장이라고 부르기도 사투라 부르기도 힘들 만큼 험난한 여정이었으니까.

그녀의 선택이 때로는 잘못되고 맹목적이어도 나는 탓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처절한 생을 향한 걸음들을 그저 응원할 수밖에.

단지 그녀가 주인공이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언제 주인공이라고 무조건 신뢰하고 이해하고 용서했었나.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다들 한 치 앞을 몰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에 속아 진창을 구르기도 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우리 모두 한때는 무모했고, 어쩌면 여전히 무모하고 어리석다.

삶이 나에게 건네준 여러 번의 선택지 중, 나 또한 매번 옳은 길만을, 꽃길만을 선택하진 못했다.

매번 그 길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대부분이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였다.

나도 그녀처럼 생의 순간순간마다 매번 넘어지고 엎어졌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여전히 삶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은,

그녀처럼 기어코 생을 향해 손 뻗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더 그녀가 지나온 길들이 아팠다.

그녀도 나도, 생은 누구에게나 잔인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오늘 내가 먹을 점심 메뉴를 선택할 수 있어서

내 일상의 사소하고도 많은 선택들을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내 삶이 내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평온한 나의 일상이 소중해진다.

삶이 내게 더 관대하기를 늘 기대하지만, 더 잔인한 삶 속에 나를 내던지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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