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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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비밀을 품고 죽는다. 빅 엔젤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가장 끔찍한 사실을 안전하게 숨긴 채로 죽을 테니까. 삶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또한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긴 투쟁이다. 이것이 그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고, 그건 결코 죄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_ p.466

 

 

암 선고를 받고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는 빅 엔젤.

그는 수많은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였다.

마지막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던 빅 엔젤이 성대한 생일 파티를 준비했지만, 생일 파티 일주일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만다.

가족들은 빅 엔젤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비워두었고,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의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기에 빅 엔젤은 큰 결단을 내리고야 만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일주일 미루는 것.

너무도 황당한 일이었으나, 가족들을 위해서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장례식과 생일파티는 연달아 치러지게 된다.

가족들은 누군가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장례식과 누군가가 태어난 날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생일파티를 연이어 겪어야만 했다.

슬픔과 기쁨의 시간, 애도와 축하의 시간이 그렇게 시곗바늘의 흐름에 따라 뒤바뀌어 진행된다.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있을까.

 

하지만, 빅 엔젤의 생일은 오로지 축하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빅 엔젤은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그 죽음이 오늘 일지 내일일지 그보다 더 먼 시간이 흐른 뒤일지, 그곳에 모인 누구도 알 수 없었기에 파티는 즐거우면서도 슬픈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왜 빅 엔젤은 그토록 생일 파티에 집착했을까.

죽음을 코앞에 둔 그에게 생일 파티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생일 파티의 과장된 떠들썩함과 엄청난 대가족인 빅 엔젤의 가족들의 이야기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움을 이끌어 냈다.

이 수많은 등장인물은 무엇이지?

너무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지닌 가족들.

그들이 보여주는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은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따뜻했다.

가족이라고 해서 우리는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

각자의 비밀이 있고, 각자의 상처가 있고, 각자의 슬픔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 공유할 수도 없고, 모두 이해받을 수도 없다.

때로는 비밀은 비밀인 채로 묻혀야 아름다운 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각자의 상처와 슬픔과 비밀들을 간직한 채 그곳에 모였다.

빅 엔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적어도 빅 엔젤을 그 모든 이들을 한곳에 불러 모을 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한곳에 모여,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해간다.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털어놓기도 하고, 오래된 상처를 위로받기도 하며, 가족의 의미를 다시 깨달아 간다.

빅 엔젤은 어쩌면, 그들에게 가족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용서를 구하기도 했고, 마음 속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가족의 진정한 결합이었으리라.

너무도 멀어져 버린 가족들의 마음의 거리를 힘껏 당겨놓고 싶었으리라.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남겨진 가족들을 걱정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진정한 아버지로 빅 엔젤은 생을 끝마치고 싶었던가 보다.

 

 

 

시끌벅적하고 유머러스한 느낌을 가득 풍기는 책이지만, 70년을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빅 엔젤로 살면서 해야만 했던 일들, 하고 싶었던 일들, 감추어야 했던 비밀들을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우리는 듣게 된다.

그의 후회와 슬픔과 상처와 고통을.

그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과 즐거움을.

한 사람의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삶이 존재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노년의 죽음을 여러 번 지켜보았다.

그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 채 놓쳐버렸다.

할머니가 아빠가 엄마가 그 많은 이야기들을 내게 해주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놓쳐버린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빅 엔젤은 어떤 삶을 살아왔든, 분명 죽음의 순간에는 행복한 사람으로 죽게 될 것을 믿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애도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우리 생의 마지막이 다들 이런 모습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만나,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시간들이 주어진다면.

우리 모두의 생의 마지막 생일은 꼭 빅 엔젤처럼 사랑하는 이들로 북적이기를 빌어본다.

 

 

 

책을 다 읽고 아쉬웠던 점은,

내가 멕시코식 유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영어와 스페인어를 오가는 언어적 유희를 알아차리기엔 난 너무 영어와도 스페인어와도 먼 사람이었다.

게다가 멕시코와 미국의 역사를 모르니 글의 저변에 깔린 역사적 풍자들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만이 이해하는 두 나라의 적대적 감정 같은 것들, 살아가면서 몸으로 체득해가는 그런 감정들. 먼 나라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알기 어려운 어떤 것들. 그것들을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외국에서 책에 쏟아진 찬사를 긍정하려면 근본적으로 역사적 지식과 언어적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아름다움과 재미를 나는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더 이해해보고 싶고, 더 웃고 싶고, 재치 있는 문장에 무릎을 탁 치고 싶은데... 내게 그만큼의 해석 능력이 없었다.

책을 읽고 나서도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가 놓쳐버린 어떤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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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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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여행이듯 도시도 여행이다. 인간이 생로병사 하듯 도시도 흥망성쇠 한다. 인간이 그러하듯 도시 역시 끊임없이 그 안에서 생의 에너지를 찾아내고 새로워지고 자라고 변화하며 진화해나가는 존재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도시 3부작을 펴내며_ P.6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도시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애착은 당연한 것일 테지만, 과연 우리는 도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루가 다르게 귀퉁이 어딘가라도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는 도시.

날마다 다르게 성장해가고, 조금씩 쇠퇴해가는 도시.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일을 하고 잠에 들며 내일을 꿈꾼다.

우리 생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같이 나이 들고 같이 변화해가는 도시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

어제 바뀐 도시의 한 귀퉁이를 우리는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기는 한 것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도시에 대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래서 더 흥미롭고 놀랍다.

몰랐던 이야기, 놓치고 있었던 이야기, 가려져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 우리 앞에 데려다 놓는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방면으로 해석해서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시선이 넓어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도시란 이런 것이구나, 처음으로 도시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이 책은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도시 3부작'중 첫 번째 책이다.

첫째 권,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둘째 권,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성장하고 기뻐하고 상상하라』

셋째 권, 『우리 도시 예찬: 그 동네 그 거리의 매력을 찾아서』

이렇게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된 '도시 3부작'을 통해 그녀가 도시적 삶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하고 통찰한 시선을 우리에게 선물해 준다.

그 첫 번째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으니, 다음 권의 책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나머지 책들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일단 그 첫 번째 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책은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그 안에서도 12가지 콘셉트에 의해 분류되어 있다.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고 싶을 만큼 이 콘셉트들은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무심히 바라보던 것, 알고 있었지만 지나쳐버렸던 문제점들까지 꼼꼼하게 자각시켜주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도시가 이어져가고 있는지, 우리가 도시에서의 삶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책을 통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광장이 지닌 의미, 그 광장이 앞으로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 보전 지구의 진실, 기록과 보존과 보전이 왜 이 도시에 꼭 필요한 의미인지, 여행의 또 다른 의미, 스토리를 가진 도시의 힘, 비무장지대의 올바른 사용법, 공간을 보존하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코딩과 디코딩, 부동산을 통한 머니게임, 아파트 공화국보다 더 문제인 단지 공화국, 'ㅂ'자 돌림병, 부정부패의 민낯_ 엘시티(나 같은 건축 무지렁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물), 신도시와 달동네의 다른 얼굴, 디스토피아로 가지 않기 위한 우리의 노력.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만큼 인상적이고 중요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한 권의 책 속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우리는 많은 경우 속고 산다. 많은 경우 속은 척하며 산다. 많은 경우 일부러 눈을 감으려 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많은 거짓말을 하며 산다. 모르는 척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위선적이라서, 위악적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삶이란 게 그러하다. 위선과 거짓말이 없다면 현실은 견딜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멈추고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3부│머니 게임의 공간 : 현상과 구조_ P.262

 

 

 

읽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거나 현실 속에서 겪었던 고충들이 튀어나올 때면 반갑기도 했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을 경청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다가, 나랑 같은 주파수에서 갑자기 저자의 음성이 들려올 때엔 짜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차장에 대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주차장도 갖추지 않고 건물을 짓나?"가 아니라, "주자장 사용증도 없는데 자동차 등록증을 내주나?"로.

3부│머니 게임의 공간 : 현상과 구조_ P.269

 

아파트 길가의 좁은 도로에 기어코 빽빽이 주차를 하는 차들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였는데, 취향 저격 사이다 발언을 만나고야 말았다.

진짜 우리나라도 주차장 사용증 없이는 자동차 등록증을 발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이유로(1주택 2대 이상의 차량 보유로 인해 주차장이 부족하거나,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일조차 귀찮거나) 대로변에 아무렇지 않게 상시 주차를 하는 차량들 때문에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나 아파트 주변에선 아이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주차된 차들 때문에 아이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고가 나는 경우가 꽤 있어서 안전 문제도 심각하게 다가온다.

주차에 관련된 저자의 이런저런 의견들에 좋아요, 꾹! 하트, 꾹!

 

 

평화 시대의 비무장지대가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공간이 되는 것은 반대다. 대한민국은 너무 잘 잊는다. 아픈 기억이 많아서인지, 감추고 싶은 기억 때문인지 더욱 지우려 들고 완전히 새롭게 인위적 공간을 만들려는 성향이 있다. …중략…

비무장 지대가 얼마나 슬픈 공간이었는지, 얼마나 잔혹하고 치열한 공간이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2부│감感이 동動하는 순간 : 스토리텔링_ P.183

 

비무장지대를 앞으로 어떻게 우리가 사용하고 지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은 읽을수록 가슴 깊이 와닿았다.

권력에 따라 땅의 의미도 바뀌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상적인 토지의 이용을 실현해 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그렇지만 비무장지대만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장소이고, 잊지 말아야 하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장소이기에 제발 권력에 휘둘려 함부로 다뤄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예로든 독일의 모습들도 인상적이었다.

철책과 비무장지대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이 시대 신도시에 빠져 있는 가치는 어떤 것들일까? '복잡성, 비 예측성, 돌발성, 즉흥성, 다양성, 의외성, 개별성, 변화, 개성, 정조'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런 가치들을 달동네에서 발견한다.

4부│도시를 만드는 힘 : 진화와 돌연변이_ P.301

 

달동네는 달동네만의 정겨움과 아름다움이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달동네를 바라보며 신도시에 빠져있는 것들을 아쉬워할 필요 또한 없지 싶다.

나는 신도시가 좋다.

그 단조로움이, 명확함이, 쾌적함과 편리함이 좋다.

낯선 곳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내가 그나마 낯설어도 두렵지는 않는 곳이 있다면 바로 신도시다.

이유는 간단하다. 길을 잃어도 길을 찾기 쉽기 때문이다.

구획별로 나눠진 반듯한 길을 따라 걸으면 반드시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사실 나는 심각한 길치다. 그래서 낯선 길, 낯선 동네를 싫어한다.

요즘처럼 구글 지도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공포로 다가왔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진짜 여행을 하게 된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심각한 길치로서의 페널티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에나 가능한 일 같다.

늘 낯선 곳에선 경직되어 있기 마련이고, 길 위에서 미아가 되어버릴까 봐 두렵기만 했던 시절에는 낯선 길의 아름다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은 나도 길을 잃어도 예전처럼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든 찾겠지 싶은 마음으로 한참 느긋해졌지만.)

그래서 내게 신도시는 길 찾기의 유토피아 같은 공간이었다.

세상에 이런 쉬운 도시가 있었다니, 처음 신도시에 살았을 때의 그 감사함을 잊지 못한다.

달동네에 나를 떨어트려 놓는다면 나는 밤새 길을 찾느라 잠들지 못할 테니까.

지금은 신도시에 살고 있지 않지만, 예측 가능한 '신도시'라는 공간이 나는 여전히 좋다.

 

 

 

무엇보다 격렬하게 공감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해운대의 '엘시티'였는데, 그 이야기를 쓰자면 너무 많은 비난을 쏟아낼 것만 같아서, 전적으로 격하게 저자의 말 하나하나에 모두 몹시 공감한다고 쓴다.

그 건물이 그곳에 세워져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 한숨이 나고 분통이 터지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다들 같은 황당함을 가지고 있을 테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믿는다.

 

 

 

'차이는 존재한다. 세상이란 수많은 차이로 풍성해진다. 차별은 바보짓이다. 세상은 수많은 차별로 불행해진다.'

 

2부│감感이 동動하는 순간 : 코딩과 디코딩_ P.205

 

 

이상하게 여기는 시각은 아주 특별한 능력이다. 인지하고 식별하는 능력이고, 더 나아가 바꾸고 개선하는 역량이다. 일상을 너무도 당연해하는 것,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 것, 그저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쓰거나 갖은 꾀를 부리는 것으로는 절대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질문하면서 변화의 단서를 찾는다. 이상하게 볼 줄 아는 이방인의 시각을 잃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시민의 태도를 잃지 말자. 좋은 도시적 삶으로 가는 길일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 지레 패배감을 갖지 않게 만드는 길이다. 

 

3부│머니 게임의 공간 : 현상과 구조_ P.274~275

 

 

일상을 너무도 당연해하며 살아왔고,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참거나 회피하며 살아왔다.

무엇이 잘못되었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왜?'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한 것을 이상한 채로 묵인했기 때문에,

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튀는 것이 싫었다.

앞에 나서는 것이 싫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질문하는 삶, 이방인으로 눈으로 낯설게 바라보는 도시의 일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그녀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사람' 또한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도시의 생만큼이나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볼 순간들도 많다.

도시의 생과 사람들의 생은 그만큼 깊게 얽혀 흘러간다. 비슷하게 닮은 얼굴을 하고.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뿐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책을 통해 넓어졌음을 고백한다.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을 먼저 살았던 그녀의 넓고 깊은 시선들은 좁고 얕은 나의 시선 앞에 돋보기가 되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오래 익은 시간은, 그 시간의 힘만으로도 설득력이 생긴다. 언제나 거기에 있었고 언제나 거기에 있을 듯한 안정감을 준다. 과거의 경험은 그대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흩어지기만 하는 것 같은 오늘에 깊이감을 드리운다.

 

1부│모르는 사람들과 사는 공간 : 기억과 기록_ P.119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이것으로 끝이 났지만 책을 넘어, 나의 도시 이야기를 꺼내본다.

 

 

나는 한 번도 도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내게 도시는 영원히 친해지지 않는 타인 같은 존재로 여겨질 뿐이었다.

알 것 같다 싶다가도 모르겠고, 익숙해지다가도 낯선, 속을 보여주지 않는 의뭉스러운 존재였다.

아무리 발붙이고 살아봐도 이방의 낯선 거리를 걷는 생경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십 년을 도시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내게 도시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이방의 땅이다.

 

어쩌면 내가 도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스토리가 없는 텅 빈 공간을 도시라고 믿으며 그 삭막함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도시가 품은 이야기들, 도시의 숨겨진 얼굴들, 도시가 움직이는 걸음들에 나는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 낯설고 배타적인 이방의 공간에서 살아가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도시란 모르는 사람들과 사는 공간'이다. 즉 '익명성'은 도시의 가장 근본적 속성이다.

 

1부│모르는 사람들과 사는 공간 : 익명성_ P.31

 

 

나는 도시의 익명성을 갈망하며 도시로 왔다.

익명성 따윈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시골에서의 삶이 너무 피곤했다.

남의 집 밥숟가락 개수까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지나친 관심이 싫었다.

누구 집 딸인지, 누구 집 아들인지, 건너건너 죄다 아는 사람인 지독한 친밀성에 숨이 막혔다.

어느 곳에서도 나는 '오롯한 나'로 존중받지 못하고 누구의 딸 혹은 누구의 동생임을 자각한 채 행동해야만 했다.

개성은 억눌러지고 감춰지기 일쑤였고, 늘 꼬리처럼 가족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어디서든 착실하게, 반듯하게, 예의 바르게, 싸우지 않고, 배려하며 산다는 일은 얼마나 지치고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

 

도시는 내게 익명의 매력으로 유혹해 왔다.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잘못은 그저 나 하나의 잘못으로 이해되는 공간이 주는 자유란 엄청난 것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삶을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훨씬 더 멀어진 거리감이 나를 그저 나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 자유로움이 기꺼웠지만 완벽한 무관심은 집중된 관심만큼이나 나를 할퀴는 흉기가 되고는 했다.

혼자가 되고 싶어서 낯선 곳에 서 있지만,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진 공포를 감당하기엔 나는 너무 여린 인간이었다.

 

도시는 그 익명성을 미끼로 나를 끌어들였지만, 매번 차가운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돌려버리고는 했다.

익명성이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한참 뒤에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저렇게 도시의 삶에 상처받고 나서야.

 

익명성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또한 외롭게 한다.

우리를 홀가분하게 하지만 때론 부유하게 만든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낯선 존재들을 견디는 일이다.

 

 

 

 

그렇다고 도시가 영영 낯선 공간인 것은 아니다.

책에서 말했듯이 도시에도 길이 있고, 수많은 발자국들이 모여드는 광장이 있다.

길로 쏟아져 나온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얽혀들어간다.

비슷한 시각 같은 길에서, 같은 골목에서,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다 어느 순간 익명을 버리고 이웃이 된다.

좀 더 쉽게 익명성을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 도시이긴 하지만, 결국 그 도시에 사람이 모여 '살다'보면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다.

이 익명의 공간에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필터를 씌운 듯 불투명한 얼굴에서 선명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 낯선 무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금세 완벽한 타인의 옷을 뒤집어쓸 수 있다.

그것이 도시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특혜이자 슬픔이다.

 

내게 도시는 아직도 낯선 타인이지만, 오늘 도시의 숨겨진 이름들을 발견했으니 타인의 옷을 벗고 이웃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때인 듯하다.

도시와 잘 사귀어 보기로 결정했다.

 

 

 

도시를 완벽하게 미화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냉소적인 비판만 하고 싶지도 않다. 모든 도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 도시가 과연 좋은 도시일 것이냐는 의심도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도시란 없다. 어떤 도시든 불완전하다. 흠결이 있고 아픈 역사, 부끄러운 역사, 슬픈 역사가 있으며 숨긴 이야기나 숨은 사연이 있음을 안다.

 

프롤로그_ P.12

 

 

 

도시는 우리를 닮았다.

공간이 우리를 닮은 건지, 우리가 공간을 닮은 건지 모호하지만, 분명한 건 닮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모두 이런저런 흠결이 있고, 완벽하지 않아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간직한 아픈 기억, 부끄러운 기억, 슬픈 기억, 숨긴 이야기들을 이 도시도 똑같이 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앓는 만큼 도시도 함께 앓고, 우리가 발전하는 만큼 도시도 함께 발전한다.

같은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마치 쌍둥이처럼.

 

나와 꼭 닮은 이 도시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_________ 이 책에 사진이 실려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저자가 설명하는 어떤 공간에 대한 사진들이 없는 게 너무도 아쉬웠다. 물론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고, 직접 가서 보는 방법이 가장 좋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좀 더 빨리 쉽게 그 공간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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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The Cat Edition)
손힘찬 지음 / 부크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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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너무 많이 봤다. 그 이유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베푼 호의는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되었다.

_ P.40

 

 

 

매일매일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많은 것들을 얻고, 또한 많은 것들을 잃는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절망하고, 사람으로 인해 치유되고 희망을 노래하는 우리들.

 

그래서 늘 인간관계는 어렵다.

옳고 그름도, 좋고 싫음도 늘 모호하다.

오늘 정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일은 오답인 경우가 허다하다.

당신과 나 사이에 난 수많은 길들 중에서 어떤 길로 당신에게 가닿아야 하는지를 몰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맴돈다.

좋은 사람과 만나고 싶고,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지만,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미움이 되기를 반복하는 시간들.

수많은 당신들과 만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길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계가 힘들고, 관계에 상처받기 일쑤인 우리들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지치고 피곤한 오늘을 쉬는 일.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인간관계, 자존감, 사랑, 인생

이 모든 것에 지친 당신에게 필요한 이야기

 

 

 

사실 나는 좀 더 다정하고 포근하고 나른한 글을 생각했었다.

지친 하루의 끝을 쉬게 될, 내 방, 내 침대, 내 이불의 포근한 안락감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표지와 제목이 딱 그런 느낌을 떠오르게 했으니까.

 

이 책은 조언서에 가깝다.

내겐 그렇게 읽혔다.

고민을 토로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인 듯하다.

실제로 글에서도, 자신의 글을 읽고도 답을 찾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인스타로 상담도 해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니 글이 조언의 뉘앙스를 깊이 풍기는 모양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인간관계에서 오는 힘듦에 관한 이야기,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가 정답을 알기 힘든 일들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들을 공유한다.

그를 통해 누군가가 위로받고, 방법을 찾고,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삶은 살수록 더 모호해진다.

나이가 들면 정답을 알게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어디에도 정답이라는 것은 없는 것만 같다.

오히려 정답을 모르던 때, 어리고 미숙하고 부족하던 그때가 더 삶이 선명했었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글은 단호하고 선명하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불투명한 무언가를 견디기 싫어했고, 명확하고 선명한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직접 겪으며 알아낸 삶의 진실들을 정답이라 확신했었다.

지금보다 되려 그때, 좋고 싫음이 더 분명했고, 선과 악의 기준마저 선명했다.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기를 즐겨 했고, 서로의 답을 확인하며 새로운 답안지를 작성해나갔다.

그때의 나는 좀 더 분명하고 명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나의 대답들도 점점 더 모호해진다.

객관식 답안에서 골라낸 정답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모두 고르시오' 문제를 잘못 읽은 기분이 든다.

하나의 정답만을 고르기 힘든 문제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간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이 맞았는지, 그때는 맞고 지금이 틀린 건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유연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우유부단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둥글어진다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경계가 옅어지고, 열린 문이 많아진다는 것이 과연 내게 이로운 일인 걸까?

이해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지는 일은, 사실은 확신을 점점 잃어가는 일은 아닐는지.

넓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 건지.

문득 의문이 든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겸손은 자신을 과장되게 포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되돌아본다. '나'와 '남'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자신을 낮추는 자세는, 말 그대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을 말한다. 안 그래도 타인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고, 이렇다저렇다 할 평가들을 내릴 텐데 미리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있다. 

P.110~111

 

 

 

답을 알지 못한 채 한없이 무너지고 있을 청춘에게 이 책은 다정한 오빠 같고, 듬직한 형 같은 역할을 해 줄 것만 같다.

경험은 아직 부족하고, 선택의 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을 나이를 살아가고 있는 이십대 청춘에겐 좀 더 명확하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조언들이 필요한 법이니까.

누군가의 말들이 내 삶에도 맞춤옷 같은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 글, 생각을 통해서 우리들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고민이 있고 힘들 때마다 우리는 책을 읽고, 가까운 누군가에게 기꺼이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그저 캄캄하기만 할 때,

내일 내디딜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이런 책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 같다.

 

 

 

 

내게는 위로로 다가오기보다는 공감 가는 말들로 읽혔던 책이었지만, 분명 읽는 사람에 따라 커다란 위로로 가닿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마음이라는 것은 전해지기 마련이니까.

 

 

 

아쉬운 점 한 가지.

문장을 읽다가 덜컥이는 부분이 꽤 있었다.

문장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그냥 문장 자체의 매끄러움의 문제인 듯하다.

종종 조사가 잘못 사용되어 있는 문장도 있어서 문장의 뜻이 한 번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기도 했다.

워낙 천천히 글을 읽기도 하고, 문장의 매끄러움에 집착하는 편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독성을 위해서도 사소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말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 받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남 앞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놓는 셈이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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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행방 새소설 3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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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본디 안개처럼 흩어져 있다. 당신이 길을 걷다 어깨나 목덜미가 돌연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면 죽음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죽음은 해당되지 않은 자에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예정된 곳에 다다르면 자기장을 형성시키듯 고요히 주위를 감싼다. 죽음은 아주 천천히 스며들기도 하고 일거에 대상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죽음의 표정 같은 건 없다. 그것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죽음은 형체도 근원도 없으므로 막아설 수도, 밀어낼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음을 불러내는 자들이 있다.

불행히도 그렇다. 죽음을 창조하는 자, 죽음을 가공해내는 자들이 있다. 죽음은 고지식한 논리학자, 성실한 수학자, 부지런한 시종이다. 창조자가 누구든 죽음은 순리대로 움직인다. 요구되는 곳으로 마땅히 몸을 옮겨간다. 신이 예정하지 않은 죽음,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죽음을 만들어내는 자. 그들은 인간이다.

P. 221~222

 

 

 

「 우리 모두가 기억하게 될, 슬픔에 대한 묵직한 기록 」

 

이 책은 우리 모두의 슬픔의 기록이자 아픔의 기록이다.

도처에 널려있는 이해되지 않는 죽음을 향한 또렷한 응시이고, 깊은 물음이기도 하다.

너무 쉽게 사라져버린 목숨들에 대한 의문이고, 사과이기도 하다.

죽음의 예정된 목적지가 아닌, 인간의 탐욕스러운 부름에 의한 죽음의 발걸음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본다.

그렇게 인간이 불러들인 죽음의 종착점을 바라보며 맥없이 울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기록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가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을 단단히 묶어두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슬픔이 여기에 있다.

 

 

지워진 것에는 지워질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사라진 기억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다.

P. 8

 

 

누군가에게는 망각만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너무 아픈 상처는, 너무 깊은 슬픔은,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삶이 우리에게 망각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방관자였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그날의 시간들을.

무책임했던 어른들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 죽음에 빼앗겨 버리고 만, 보드라운 생명들을.

책을 읽는 내내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주워진 주제에 별로 깐깐하게 굴고 싶진 않지만, 음, 이곳은 집이라고 하기엔 좀, 형편없네요.

_ P. 10

 

 

 

잎이나 곁가지를 한 번도 틔워본 적 없다는 듯 결이 매끈한 초콜릿색 나뭇가지는, 말을 했다.

귀신을 붙이러 간 누나가 아닌, 주혁에게 잡귀가 붙은 모양이다.

까탈스럽고 요구 사항이 많은 나뭇가지와 힘든 길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던 주혁의 기묘한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뭇가지, 반은 누군가의 죽음을 본다.

자신과 접촉한 사람이 겪은 죽음이나 겪게 될 죽음을.

덕분에 무당도 없는 신당에서 팔자에도 없는 '신녀'노릇을 하게 된 주혁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알려준다.

 

죽음의 순간을 알고 있다는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점집에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간절한' 사람들이다.

거짓말이라도, 사기라도 믿고 싶을 만큼, 희망을 간절히 원하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주혁을 찾아왔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부, 직장 내 시달림에 미칠 것 같은 청년, 할머니의 죽음을 걱정하는 손녀, 동생의 마지막을 알고 싶은 언니.

 

그들이 내려놓은 삶의 무게는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선의와 애정과 장난을 빙자한 폭력들.

다른 옷을 뒤집어쓰고 마치 폭력이 아닌 것처럼 우리를 속이려 드는 악의들을 끝없이 마주 보아야 했다.

그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또한 끝없이 자리를 바꾸곤 했다.

피해자의 얼굴로 앞에 앉아 고통을 토로하는 그 얼굴에서조차 가해자의 얼굴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뒤엉킨 폭력과 악의와 상처와 슬픔들.

그들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양면성을, 선의와 악의의 그 얇은 간극의 틈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어쩌면 선의와 악의는 같은 종이의 앞뒷면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민낯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러나 제보의 절반 정도는 착각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장난과 조롱과 사기의 경계 어디쯤에 있었다. 우철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배려도 없이 악질적인 전화를 걸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_ P. 51

 

아이가 사라진 뒤 우철과 그의 아내는 너무 쉽게 무시당했고 너무 자주 조롱당했고 이 모든 걸 너무 오래 견뎌왔다.

_ P.58

 

 

간절히 아이를 찾아 헤매는 부부에게 세상은 조금도 관대하지 않았다.

너무 쉽게 장난을 치고, 너무 쉽게 외면하고, 너무 쉽게 그들의 간절함을 이용했다.

사람들은 타인의 상처에 무심했고, 잔인했다.

그리고 부부는 아이의 삶을 제멋대로 재단했다.

 

 

 

 

- 네가 정의로운 사람인 것 같아? 네가 기울어진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아? 넌 그냥 사회 부적응자일 뿐이야. 다들 그러고 살아. 다들 기울어진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기를 쓰고 버티고 있어. 그만큼의 노력도 해보지 않은 네겐 우리의 성실함을 비난할 권리가 없어.

- 그럼 내가, 뭘 했으면 좋겠는데?

-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가만히 좀 있어.

_ P. 168

 

- 가만히 있으라니. 그거야말로 제가 동생에게 끝없이 강요했던 말 아닌가요.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가만히 있는 게 널 위한 거다. ……결국 제가 동생을 죽인 거예요.

_ P. 181

 

 

아마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명 나와 같은 사건을 떠올렸을 거라 믿는다.

부당해고 노동자의 투쟁과 죽음들.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부조리를 눈 감지 않는 사람들.

기어코 잘못을 들추고 꼬집어 내는 사람들.

그로 인해 옳은 일을 하면서도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그 속에서 죽어간 무고한 목숨과 존중받지 못한 또 다른 목숨들.

 

그리고,

그와는 전혀 다른 색의 죽음인, 세월호.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마치 주문처럼 세월호로 나를 데려간다.

어디 나뿐이랴, 4월 16일을 지나온 모든 사람들이 같은 슬픔을 떠올릴 것이다.

 

책 속에서 터져 나오는 깊은 슬픔의 순간들은 우리를 실제의 어느 날로 자꾸만 데려다 놓는다.

우리가 놓쳐버린 아깝고 아픈 목숨들을 기억하라고 속삭인다.

너무 아파서 망각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나약한 우리의 알량함을 비웃는다.

기억, 해야 한다고.

 

 

 

 

집단 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압박과 위화감을 외부인에게 전달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감정과 확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타인. 영주는 종종 주혁을 그렇게 느꼈다. 수아와 관련된 일에 대해 주혁은 무지했고 안일했으며 비현실적일 정도로 무책임했다.

_ P. 126

 

주혁과 영주의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에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곳엔 누구의 아이든 있을 수 있었고, 누구의 아이든 죽을 수밖에 없었다.

_ P. 131

 

 

사실 이 책의 큰 축을 이루는 이야기는 주인공인 주혁의 이야기다.

왜 그가 편안할 수 없는 건지, 왜 그는 힘들게 길 위에서 삶을 견뎌야 했던 건지 그의 슬픔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조금도 퇴색되지 못한 채, 고통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의 발자국이 무성하다.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슬픔의 무덤에 묻힌 채 그는 자신의 죄의 무게를 그저 견디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을 감히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으려나.

아이를 키우는 나조차도 차마 짐작으로 알 것도 같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책 속의 상실은 소설의 탈을 쓴 실제의 어떤 사건이었기에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의 가슴이 떠올라서.

 

여리고 고운 숨들이 화마에 휩싸여 죽어가던 밤.

그 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남겨진 사람들의, 어른이라는 이름을 단 우리들의 유일한 사죄의 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욕심으로,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제 겨우 점하나 찍은 아이들의 생이 끝나버렸다.

선도 면도 형체를 가진 도형도 되어보지 못한 채, 그렇게 겨우 작고 작은 점하나를 찍고 영영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많은 미래들이.

 

 

 

- 사십대엔 말야.

- 입체도형 안에 자기가 원하는 걸 넣을 수 있지. 가족이나 직장처럼 구체적인 것도, 의지나 희망처럼 추상적인 것도 전부. 도형 안엔 가장 소중한 걸 넣어야 해. 그래야 여생 동안 그걸 지키면서 도형을 늘려나갈 수 있거든.

…중략…

-그럼 아저씨의 도형 안엔 뭐가 들어 있어요?

- ……아무것도.

- 아무것도?

- 아무것도 없다, 내 도형 안엔. 도형 자체가 없어.

P. 112 ~ 113

 

 

 

 

 

죽음을 볼 수 있는 안테나이자 안내자인

신비한 나뭇가지 '반'이 마주친 무수한 손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음들에 대한 단단한 응시

 

 

나뭇가지 반은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게 될 죽음을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이 어쩌면 반의 운명이었다.

그런 반에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주인공인 주혁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지현.

 

반은 예정되지 않은 죽음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죽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신이 예정하지 않은 죽음,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죽음', 반이 볼 수 없는 죽음.

그런 죽음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다.

 

책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의 문장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자음과 모음의 '새소설'시리즈는 처음 읽는다.

다른 출판사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간간이 찾아 읽고는 하는데, 그 시리즈만큼 '자음과 모음'의 이번 시리즈도 단단히 뿌리내려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얇지만, 결단코 얇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유쾌한듯 하지만 더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있다.

어찌 보면 캐주얼한 글처럼 읽히지만, 단단하고 무겁고 견고한 글이었다.

작가의 이런 응시가 너무 좋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밤은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거리에 밤의 씨앗을 흘리고, 누군가는 그림자처럼 발끝에 매달린 밤을 지르밟으며 걷고, 누군가는 폐로 스며든 밤의 기척에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렵다. 그리고,

슬프다.

 

작가의 말 _ P. 244~245

 

 

'안보윤'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

다음 작품을 설레면서 기다려야겠다.

작가의 단단한 응시가, 문장 속에 숨어 흐르는 선과 악의 엉킴이 인상적인 글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슬픔의 시간을 추모한다.

글로 슬픔의 알갱이를 빚어 토해내고 있다.

잊지 않고 있다는 것, 타인의 상처에 예민하다는 것, 슬픔을 온전한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런 작가들이 있어서 안도가 든다.

 

잊지 말아야 할 슬픔들이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무뎌지고 무감해져 간다.

고통스럽고 마주보기 어려운 상처라 할지라도 기억해야만 하는 슬픔이 존재한다.

그렇게 다시 잊혀져버리지 않도록, 자꾸만 그 기억들을 '살아있게' 해주는 작가들의 행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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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 독일인에게 배운 까칠 퉁명 삶의 기술
구보타 유키 지음, 강수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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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에 '게뮈트리히'라는 말이 있어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뜻하는 덴마크어 '휘게'의 독일어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단순히 기분 좋은 것과는 다른, 좀 더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고 독일 사람들은 말해요.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요. 따뜻한 방에 촛불이 흔들리거나 하루를 마무리하며 소파에서 와인을 마시는 것처럼 내가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람과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독일판 휘게, '게뮈트리히'랍니다.

- 본문 중에서

<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뒤표지 글.

 

 

 

「도망치다시피 떠난 독일에서 살며 쉬며 배운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책의 뒷면에 쓰여있지만, 책을 읽으며 어디에서도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개인주의'를 마주친 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알고 있던 개인주의는 딱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이기주의가 되는 간극의 어디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기적이라고 말하기엔 남에게 크게 해를 끼치는 것 없고, 그렇다고 이타적이지도 않은 사람을 칭할 때 '개인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 같다.

워낙 우리나라가 남을 배려하는 문화에 익숙하고, 단체 행동이나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세습적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조금만 '나'를 먼저 앞세워도 개인주의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 속에서 나 또한 알게 모르게 개인주의를 '좋다'라는 인식보다는 '별로다'에 좀 더 기울게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보여주는 독일인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개인주의'보다는 '합리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솔직히 책 읽는 내내 전혀, 조금도 불편하거나 별로라고 느꼈던 구석이 없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당연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엿본 기분이랄까.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한국이 싫다'라고 말할 때도, 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이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었다.

어차피 어떤 사회든 명과 암은 존재하기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고 해도 분명 싫은 점이 존재할게 뻔한데 이왕이면 익숙한 곳이 더 낫지 않겠나 싶었다.

가끔 여행서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타국의 모습에 홀려 나도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행의 의미였다.

낯선 곳을 지극히 싫어하는 내가 낯선 나라에서의 삶을 열망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내게 낯선 타국에서의 삶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든 이 책은 그래서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내게 와닿았다.

 

 

 

 

일본에서 편집자로 살아가던 저자는 어느 날 '쉼'을 잃어버린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일에 치여 날카로움이 극에 달하고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어갔을 무렵, 그녀는 이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쉼'을 찾아 일본에서의 삶을 버리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어릴 적 1년간 살았던 독일이었다.

좀 더 느긋하고 좀 더 천천히 삶을 누리고 싶었던 그녀에게 독일에서의 삶은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은 그녀가 지난 10년간 독일에서 살면서 느끼고 배우고 얻은 삶의 지혜들을 담고 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독일인의 삶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일하기, 쉬기, 살기, 먹기, 입기'라는 다섯 챕터로 나누어 그들의 라이프 생활을 전해준다.

 

 

 

 

그로부터 15여 년이 지났건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장시간 노동에 대한 뉴스가 나와요. 성과보다 오래 일하는 것 자체를 알아주는 문화가 여전하다는 증거겠죠.

독일 사회에서는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반대의 평가가 내려져요. 성과가 안 나는데도 항상 야근을 하는 사람은 일정 시간 안에 일을 못 끝내는 무능한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관리직에 있는 사람은 부하 직원이 야근을 많이 하면 본인 능력의 문제인지,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은지, 업무 내용이 안 맞는지 등 원인을 따져 본다고 해요.

반대로 일을 빨리 끝내는 걸 좋게 평가하며, 그런 사원은 급여를 올려준다고 한 경영자도 있어요. 사원에 따라 담당 업무가 정해져 있어서 자신의 업무가 끝나면 바로 퇴근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일하기 _ 039

 

 

그중에서도 첫 번째 챕터인 일하기에서 정말 많은 부러움을 느꼈다.

'일하기' 부분에서만큼은 우리나라 또한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근무시간을 나라에서 정해줘도 실제 일을 하는 현장에서는 결국 더 오래 남아있기를 원한다.

야근이 당연하고, 주말에도 툭하면 회사에 나가고, 내 일이 끝나더라도 상사 눈치를 보느라 퇴근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

물론 지금은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여전한 부분 또한 존재한다.

결혼 초에 참 힘들었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서 힘에 부쳐 끙끙대고 있을 때, 남편은 회사 일에 치여서 야근은 기본이고 공휴일의 대부분도 회사에 나가야 했었다.

휴가 또한 제대로 찾아서 가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그동안 일한 야근, 공휴일 수당만 찾아 받아도 아파트 한 채는 거뜬히 살 것 같다는 농담을 다 할까.

이제는 직급이 올라가고, 회사의 분위기 또한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면이 있어서 공휴일에도 쉬고, 야근하는 횟수도 좀 줄어든 편이지만, 여전히 남편을 보면 안쓰럽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그런 회사에 너무너무 화가 났지만, 이제는 그냥 남편에게 쌓여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피곤'의 기운이 마음 아플 뿐이다.

 

우리나라의 아빠들이 어느 순간 아이들과 멀어지고 데면데면 해지는 데는 회사의 역할이 아주 크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제대로 퇴근만 하더라도 분명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텐데, 퇴근 후 술자리까지 일의 연장이라고 여기는 태도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아빠가 아빠 역할을 할 시간을 주지 않는 회사, 엄마의 역할을 하려면 일을 그만둬야만 하는 회사, 이제 그만 제대로 된 공존의 길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도 물론 스트레스지만, 독일에서는 짧은 시간 내에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인한 또 다른 형태의 스트레스가 존재해요.

일하기 _ 052

 

 

물론 어느 사회든 완벽할 수 없다.

합리적으로 일하는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독일에서도 그 나름의 고통은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는 독일의 태도는 정말 본받을 만한다고 여겨진다.

아주 여러 가지 형태로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는) '워라밸'을 지키려고 하는 독일의 모습은 일에 지친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부러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직장인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일에 치여서 소중한 것들을 너무 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쉬기'챕터에서는 여행하는 쉼과 도심에서 자연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시간 계획적인 여행이 가능한 삶의 밸런스도 부러웠지만, 도심에서 쉽게 초록을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부러웠다.

우리나라도 도심에서 산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만, 좀 더 가깝게 초록이 무성한 공원이 존재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가져온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공원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자연을 그대로 담아 우리에게 '쉼'을 언제든지 선물해주는 공간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책 속에서 그 초록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도시에 살면서 가장 힘든 점 중 하나가 바로 '숲 같은 공원'이 근처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또한 도심에 큰 공원이 존재하는 곳이 여럿 있지만, 어쩐지 자연에서 함께 사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오로지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초록의 위로가 너무도 간절하기에 저자가 설명하는 공원이 있는 삶은 내겐 너무 가닿고 싶은 삶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클라인 가르텐'이라는 시민농원을 임대해 직접 채소를 기르는 것이 도심에서도 가능하다고 한다.

내겐 직접 기른 채소의 건강함보다도, 도심에서도 그렇게 가까이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갓 없는 전구 아래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살벌한 방에서도 사람은 머물 수 있죠. 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맞도록 안락하게 꾸미면, 집은 잠만 자는 '거주' 장소에서 '삶을 만끽하는' 나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살기 _ 146

 

 

'살기'에서 보여주는 주거지에 대한 독일인들의 모습은 좀 새로웠다.

전혀 알지 못했던 그들의 생활의 모습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외국에서 오래된 주택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이사를 하려는 집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입주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전등 하나 없는 완벽한 無의 상태에서 시작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독일이 D.I.Y가 그토록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도 몰랐다.

집을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으로 꾸미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한국에서는 이미 완벽하게 세팅된 집에 이사를 간다.

물론 이사 전에 이것저것 바꾸거나 손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싱크대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구들이 붙박이로 존재하는 아파트가 많다.

그래서 D.I.Y가 한때 잠깐 유행하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처럼 익숙한 생활 자체가 되지는 못한 것 같다.

그에 반해 독일은 벽과 바닥만 존재하는 공간 속에 내가 모든 것을 꾸며야만 한다니, 매우 귀찮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주 애착이 넘치는 공간이 될 것만 같다.

그래서인가 그들이 집이라는 공간을 대하는 방식이 참 아름답게 여겨졌다.

내게 집이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나 일정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그 시간의 질이 높아지면 생활이 더 알차지겠죠. 그러면 결과적으로 보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결코 남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이 충만해지는 걸 느끼려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질을 높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기 _ 155

 

 

책 속에 등장하는 삶의 모습들 중에 유일하게 나라와 상관없이 바꾸는 게 가능한 부분이 '집'에 관한 부분인 듯하다.

다른 부분들은 나 혼자 노력한다고 바뀌는 것들이 아닌, 제도적인 부분이나 관습적인 부분 또한 많아서 변화가 어렵게 느껴졌지만, 집에 관한 것만큼은 나의 노력에 따라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어느 곳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집 안의 내 공간을 바꾸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니까 말이다.

 

인테리어에 딱히 큰 관심도 없고 센스도 부족한 편이라서, 일단 한 곳에 가구를 놓으면 옮기는 일도 없고, 청소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충 치우고 사는 편이었는데, 공간이 주는 삶의 질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뜨끔했다.

특히나 집순이인 나는, 문지방 파이터라는 어떤 연예인의 별명이 너무도 찰떡처럼 어울리는 사람인지라 내 공간에 대한 스스로의 노력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조금만 신경을 더 쓰고,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고,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지금보다 만족스럽고 충만한 공간에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내가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리고 비우고 정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부터 착실히 도전해 볼 예정이다.

 

 

 

 

실제로 "난 그 브랜드가 맘에 들어."라는 말보다는 "난 그 기업을 지지하지 않아."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노동자를 부당한 환경에서 일하게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그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그런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 언제부턴가 '쇼핑은 선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한정된 예산 안에서 기업의 자세를 최대한 응원하며 취향에도 맞는 제품을 고른다면, 쇼핑도 하나의 권리로 행사할 수 있으니까요.

입기 _ 246

 

 

'입기'와 '먹기'에서 보여주는 독일인의 삶의 모습은 간소하고 간결하다.

허례허식도 없고, 불필요한 소비도 거의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자가 말한 일본의 모습처럼 우리나라도 먹고 입는 것에 굉장히 많은 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 또한 먹고 입는 것에 굉장히 많은 지출을 하고 있다.

패션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왜 때문인지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작년엔 벗고 다녔던 건지 입을 옷이 없다고 여겨진다.

매년 옷을 다시 구매하고 있다. 이런 소비 패턴에 허영은 들어있지 않았나 의문이 든다.

딱히 남에게 보이려고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나의 만족으로 소비하는 일이 더 많았지만, 알게 모르게 사회가 추구하는 소비패턴에 최적화되어 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먹기'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에는 공감하면서도, 식문화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식습관의 변화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독일과 정반대로 아침은 간소하게 저녁은 꾹꾹 눌러 담아 가득히 먹고 있다.ㅠㅠ)

우리나라 음식은 정말 손과 정성과 시간이 많이도 들어가는지라, 음식을 만들며 소비된 시간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개인적으로 음식을 만드는 일을 정말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독일식 저녁이 너무 마음에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익숙한 한식에 대한 애정을 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아마 바뀌기 가장 어려운 것이 의외로 식생활이 아닐까 싶다.

 

현명한 소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정말 많은 소비생활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제대로 된 소비를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게다가 이왕이면 좋은 기업의 제품을 선택해서 사용한다면, 좋은 기업들이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과 관련한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으니 '현명한 소비생활'은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지금 보다 더 쇼핑을 올바른 권리 생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겠다.

좋은 소비자가 되도록.

 

 

 

 

저자는 부드럽고 단정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꼭 독일의 라이프가 옳고 좋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런 삶도 있다고, 너무 일에 쫓기며 살지 말라고, 바삐 뛰어가며 살아야만 무언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잠깐이라도 삶 속에서 쉼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 또한 너무 바쁜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 놓친 채 살았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녀가 보여준 독일인의 삶의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당장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작겠지만, 그것에서부터 내 삶의 질을 조금씩 바꿔나가야겠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다.

독일에서 살고 싶다는 건, 현재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니까 그냥 꿈으로 남겨두고, 지금의 내 삶에서의 변화에 집중해야겠다.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 보자.

 

 

이렇게 우선순위를 판가름하는 기준을 세운다는 건 크게 봤을 때 나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예요.

일에서도 개인 생활에서도 내 나름의 기준을 갖지 않으면 그때그때 상황에 휩쓸리고 맙니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늘 남 탓만 하게 되죠.

반대로 내 안에 기준을 정하면 다양한 일에 바로바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요.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서 후회를 남기지 않죠.

일하기 _ 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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