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꽃망울 터질 때쯤엔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는데 눅눅한 여름이 다가서니 집 밖으로 다시 나서기가 망설여져 마음이 또 눅눅하다. 긴 삶에 짤막한 쉼표 하나 찍는다는 것이 이렇듯 번뇌로운 일이었던가.

 

어미로서의 불안을 먹이고 또 먹이는 것으로 대체하여 그런가. 영달이는 내가 쉬는 사이, 참 무럭무럭 많이도 자랐다. 위로는 친정엄마, 아래로는 딸내미로부터 끊임없는 구박덩어리 같은 존재지만 그저 남들과 다 같은 엄마라는 이름, 그 묵직한 자리 덕분인지 그럭저럭 효용 가치가 있었나 보다.

 

놀이터에 나가 있다 보면 울타리 밖으로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오는 아이들이 있다. 손만 번쩍 흔들고 가는 아이, 꾸벅 인사 하는 아이, 성큼성큼 다가와 안부를 묻는 아이... 봄에 만난 아이들은 반갑고 고마웠는데 지금 만나는 아이들은 반갑고 또 두렵다. 앞으로 마주할 과제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여름이 지나면 조금 먼 곳의 새로운 아이들과 만나야 한다. 전교생이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작은 학교, 높은 산이 굽이굽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 초가로 지은 문학관 옆에 자리한 시골 중학교, 그 곳이 내가 9월부터 근무할 학교다. 아주 큰 학교도 무섭지만 아주 작은 학교도 무섭긴 마찬가지다. 사실 나에게 새로운 것은 온통 다 무섭다.

 

스물 이후에 몇 번의 쉼표가 있었다. 같은 학번 중에 군대를 가는 남자동기들을 제외하고는 휴학을 한 건 나 혼자였다. ? 라는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요즘과 같은 취업난 세대가 겪는 대2병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회의와 환멸을 느낀 후, 실존적 방황으로서의 대2병 같은 것이었다. 슬렁슬렁 놀면서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했고 더 많은 것을 느꼈다. 복학할 무렵에는 너덜너덜해졌던 마음이 치유되면서 의욕이 되살아났다. 돌이켜보면, 내게 꼭 필요한 쉼표 같은 거였다. 그래서인지 실습 나온 후배 교생들에게도 주저 말고 휴학하라고 무책임한 권유를 하곤 한다.

 

교사가 된 후 3년이 지나고 다시 한 번의 쉼표가 있었다. 가끔 꿈에도 등장하는 우리 교수님. 학위만 받아 챙기고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서, 등의 핑계로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뿡뿡이 닮으셨던 우리 교수님.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 여전히 변함없지만 이제는 나 자신이 너무 많이 변해서 찾아갈 수가 없다. 어느 밤, 꿈속에서 비 맞지 말라며 우산을 건네주셨던 교수님, 다정히 마주앉아 추어탕이며 김치찌개며 소탈한 음식들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대학원 동기들... 마음껏 연구하고, 토론하고, 공부하는 인간으로 살 수 있었던 2년간의 대학원 생활. 싱글로서의 마지막 황금기였다.

 

나 자신을 위한 쉼표는 거기까지였나 보다. 이후에는 영달이를 배 안에 안고, 또는 배 위에 안고 다니며 1년을 쉬었고 영달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맞은 반년의 휴직 기간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 더 쉴까, 더 쉬고 싶다가도, 오래 쉬었다가 방황마저 길어진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두려움이 엄습하고 벌써부터 이런저런 일로 보채오는 새 학교에 대한 부담감이 마음을 죄어온다. 영달이는? 다행히 든든한 외할머니 덕분에 엄마의 복직을 어마어마한 일로 여기진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항상 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빠삐코나 마이쮸를 건네는 엄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때는 키즈폰으로 전화하라고 할까. 수업 중이라 못 받으면 어쩌지. 예전에는 쉬고 나면 재충전, 재도약이 되곤 했는데 어째 영달이를 낳고 나서는 불안 재가동이다.

 

그럼에도, 모처럼 친정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눴고, 영달이와 끈끈한 시간을 보냈고, 전업주부로서 남편에게 병아리 오줌만큼이라도 좀 더 잘해줄 수 있었고,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하며 반성하고 사색할 수 있었던 이 시간에 감사하며 감사해야 한다. 나는 쉬면서 조금씩 더 단단해지곤 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아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의 쉼표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후회 없이, 오히려 더 완벽하게 쉬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쉰다고 늦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더 잘 갈 수 있더라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더 잘 보이더라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실 2017-07-0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직하시는군요.
아이는 엄마의 걱정보다 훨씬 더 잘 자라지요. 때로는 속도 더 깊고...
화이팅입니다^^

깐따삐야 2017-07-04 11:46   좋아요 0 | URL
지금도 주위의 평판으로는 저보다 똑똑한 영달이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항상 아기 같아요.
세실님도 워킹맘이셨으니 제 마음 잘 아실 듯.
잘 지내시죠? ^^

순오기 2017-07-0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영달이가 초등생이 되었네요.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알라딘에서 요렇게 간간이 소식을 듣는데도 성장이 그려지네요.^^ 복직에도 힘내시라 응원해요!!♥

깐따삐야 2017-07-04 11:47   좋아요 0 | URL
네, 많이 자랐답니다. 이젠 업는 것도 힘들어요.
순오기님도 잘 지내시죠? 응원 감사합니다!
 
오래된 책이 말을 걸다 -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된 당신에게
남미영 지음 / 예담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던 소녀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나이를 먹고... 그 공통의 과정 속에서 때때로 위안과 활력이 되어준 동반자 같은 책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흔 이후 - 나의 가치를 발견하다 소노 아야코 컬렉션 2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격적인 중년에 대비하여 먼저 중년을 살아본 지혜로운 선배가 건네는 조언과 통찰. 나잇값 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정 백수니 집안일이라도 빈틈없이 해야 한다는 부담.

생활비가 줄었으니 씀씀이를 확 줄여야 한다는 압박.

주어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영달이와 알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집념.

복직 이후 헤매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닌, 꾸준히 공무원 마인드로 지내야 할 것만 같은 강박.

입맛을 잃고 잠을 설치고... 혹시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싶은 불안...

 

어미가 이러는 사이 영달이는 기사식당 같은 급식 메뉴만 빼면 그런대로 즐겁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시간차로 오가는 길이 어긋나면서 영달이를 보자마자 울고불고하는 엄마를 혼내고 다독거리는 당찬 딸, 왁자지껄 친구들 사이에서도 살짝 드라이한 성격으로 어필하는 믿음직한 딸이 우리 영달이다. 키즈폰을 사서 매달아주고 혹시나를 대비해 만날 장소를 거듭 확인하고 수업 끝나기 20분 전부터 밖에서 서성여도 손을 꼭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만가지 불길한 상상과 수천가지 복잡한 잡념이 엄습한다. 이쯤 되면 단순한 우려를 넘어 정신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친정엄마한테 맡겼을 때보다 나 자신한테 내 딸을 맡겼을 때가 훨씬 더 불안하니 정말 자괴감이 든다.

 

올해 초 서울에 가서 공연도 보고 체험도 하며 타로 점을 잠깐 본 적이 있다. 나보고 쉬지 말라고 했던가. 꼭 쉬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렇게 쉬어봐야 직장 생각이 더욱 간절해질 거라고 했다. 영달이는 자존심이 강하고 똑똑한 아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타로 점을 봐달라고 했다. 타로 책 한 권으로 야매 타로점술사가 된 남편 앞에서 카드를 척척 골랐고 이상한 그림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절망했다. 나는 정말 쉬면 안 되나 봐, 영달이한테 도움이 안 되는 엄마인 게 틀림없어, 나가서 돈이나 버는 게 낫겠어... 남편이 서울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야매로 타로 점을 본 이후까지 많은 말로 나를 위로했지만 가슴에 돌 하나 얹은 것 같은 먹먹함과 무력함이 그칠 날이 없다.

 

대학 졸업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일종의 경제인으로 살아오는 것에 세팅이 되어 있다 보니 내 역할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잠시 쉬고 있을 뿐인데도 이토록 공황장애 비슷한 것에 시달리는가 보다. 아이가 여럿도 아니고 영달이 하나뿐이라 집안이 그다지 더러워질 일도 없는데 무슨 강박증 환자마냥 쓸고 닦고 정리하고 물건을 이리로 옮겼다 저리로 옮겼다, 책을 뺐다 꽂았다, 냄비를 겹쳐 놓았다 떨어뜨려 놓았다, 옷을 계절별로 정리했다 색깔별로 정리했다... 아마도 내가 나의 모습을 본다면 정상은 아니지 싶어 혀를 끌끌 찰 거다.

 

친정엄마는 집안일 요령 있게 하는 법, 다 소홀해도 괜찮지만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 몇 가지만을 간추려 주면서 전업주부 2주차인 내게 매일 매일의 교육을 하신다.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고 의지하는 영달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려면 친정엄마의 소중한 전언들을 새겨 들을 일이다. 영달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엉엉 울어대는 나와 그런 약해빠진 엄마 모습에 화를 내는 영달이를 보고 노쇠한 엄마는 얼마나 안쓰럽고 답답하셨을까. <참 쉬운 인생>이란 책에 소피아라는 주인공이 나온다. 여장부 같은 할머니와 영특한 손녀 사이에 철부지 짐짝처럼 끼어 있는 엄마 역, 요즘은 내가 꼭 소피아 같다. 어제는 영달이가 레고 역할놀이 중에 우울증에 걸린 엄마 이야기를 꾸며내서 좀 놀랐다. 나와 남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어느새 들었나 보다. ! 반성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상처의 인문학 - 삶을 위로하는 가장 인간적인 문학 사용법
김욱 지음 / 다온북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이토록 정열적인 필력과 문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문학에 대한 애착과 열정, 젊은 세대를 향한 간절함이 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