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정 백수니 집안일이라도 빈틈없이 해야 한다는 부담.
생활비가 줄었으니 씀씀이를 확 줄여야 한다는 압박.
주어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영달이와 알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집념.
복직 이후 헤매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닌, 꾸준히 공무원 마인드로 지내야 할 것만 같은 강박.
입맛을 잃고 잠을 설치고... 혹시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싶은 불안...
어미가 이러는 사이 영달이는 기사식당 같은 급식 메뉴만 빼면 그런대로 즐겁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시간차로 오가는 길이 어긋나면서 영달이를 보자마자 울고불고하는 엄마를 혼내고 다독거리는 당찬 딸, 왁자지껄 친구들 사이에서도 살짝 드라이한 성격으로 어필하는 믿음직한 딸이 우리 영달이다. 키즈폰을 사서 매달아주고 혹시나를 대비해 만날 장소를 거듭 확인하고 수업 끝나기 20분 전부터 밖에서 서성여도 손을 꼭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만가지 불길한 상상과 수천가지 복잡한 잡념이 엄습한다. 이쯤 되면 단순한 우려를 넘어 정신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친정엄마한테 맡겼을 때보다 나 자신한테 내 딸을 맡겼을 때가 훨씬 더 불안하니 정말 자괴감이 든다.
올해 초 서울에 가서 공연도 보고 체험도 하며 타로 점을 잠깐 본 적이 있다. 나보고 쉬지 말라고 했던가. 꼭 쉬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렇게 쉬어봐야 직장 생각이 더욱 간절해질 거라고 했다. 영달이는 자존심이 강하고 똑똑한 아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타로 점을 봐달라고 했다. 타로 책 한 권으로 야매 타로점술사가 된 남편 앞에서 카드를 척척 골랐고 이상한 그림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절망했다. 나는 정말 쉬면 안 되나 봐, 영달이한테 도움이 안 되는 엄마인 게 틀림없어, 나가서 돈이나 버는 게 낫겠어... 남편이 서울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야매로 타로 점을 본 이후까지 많은 말로 나를 위로했지만 가슴에 돌 하나 얹은 것 같은 먹먹함과 무력함이 그칠 날이 없다.
대학 졸업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일종의 경제인으로 살아오는 것에 세팅이 되어 있다 보니 내 역할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잠시 쉬고 있을 뿐인데도 이토록 공황장애 비슷한 것에 시달리는가 보다. 아이가 여럿도 아니고 영달이 하나뿐이라 집안이 그다지 더러워질 일도 없는데 무슨 강박증 환자마냥 쓸고 닦고 정리하고 물건을 이리로 옮겼다 저리로 옮겼다, 책을 뺐다 꽂았다, 냄비를 겹쳐 놓았다 떨어뜨려 놓았다, 옷을 계절별로 정리했다 색깔별로 정리했다... 아마도 내가 나의 모습을 본다면 정상은 아니지 싶어 혀를 끌끌 찰 거다.
친정엄마는 집안일 요령 있게 하는 법, 다 소홀해도 괜찮지만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 몇 가지만을 간추려 주면서 전업주부 2주차인 내게 매일 매일의 교육을 하신다.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고 의지하는 영달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려면 친정엄마의 소중한 전언들을 새겨 들을 일이다. 영달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엉엉 울어대는 나와 그런 약해빠진 엄마 모습에 화를 내는 영달이를 보고 노쇠한 엄마는 얼마나 안쓰럽고 답답하셨을까. <참 쉬운 인생>이란 책에 소피아라는 주인공이 나온다. 여장부 같은 할머니와 영특한 손녀 사이에 철부지 짐짝처럼 끼어 있는 엄마 역, 요즘은 내가 꼭 소피아 같다. 어제는 영달이가 레고 역할놀이 중에 우울증에 걸린 엄마 이야기를 꾸며내서 좀 놀랐다. 나와 남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어느새 들었나 보다. 아!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