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근 며칠 동안 고기 반찬을 안해주신다. 그나마 코끝을 자극하는 메뉴는 기껏해야 생선구이 정도고 잡채를 해준다고 하셔서 기대했더니 부추와 파프리카만 무진장으로 넣은 풀무침이었다. 내 몸은 동물성 단백질을 원하고 있다. 매일 아침 밥상 위에 올라오는 계란후라이는 나에겐 식물성 단백질이나 매한가지다.

"엄마, 고기 먹고 싶어."

"고기는 뭐하러 먹어. 김치하고 나물하고 이런 걸 먹어야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지."

"싫어. 두부된장 말구 소고기 넣은 미역국 끓여줘. 고추장 양념해서 빨갛게 불고기도 해줘."

"넌 텔레비전도 안 보냐. 넌 언제쯤 하늘하늘한 원피스 입고 나댕겨볼래. 처녀애가 무슨 월드컵 대표팀마냥 먹으려고 들어."

"오늘 기운 없어서 수업도 제대로 못했어. 막 어지럽고 짜증났어."

"네가 정신력이 무뎌서 그런게지. 그게 고기 탓이냐."

"엄마가 집에서 고기 안해주면 나 회식 가서 정신없이 먹는단 말야."

"에혀... 알았다. 엄마가 불고기 해줄게. 대신 고기 먹으니깐 밥은 조금만 먹어. 알았지?"

나는 어릴적부터 한 번도 말랐던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우람했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남산만한 배를 보고 다들 떡두꺼비같은 아들이거나 쌍둥이일 거라고 예상했단다. 일찍이 식탐도 남달라서 오빠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를 낚아채서 내 입으로 쑤셔넣는 등, 누군가 먹는 것을 보면서 시기질투도 대단히 심했단다. 결국 남달리 덩치가 좋았던 덕분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닭싸움으로 전교를 제패했던 영광의 추억도 있다. 그러나 성장이 빠른 대개의 소녀들이 그렇듯 중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키가 점점 안자라더니 뒷번호에서 중간번호로, 고3 무렵에는 급기야 앞번호까지 점점 작달막해지기 시작했다. 땅 넓은 줄만 알지 하늘 높은 줄은 모른다고 그 때부터 나의 바디라인은 처참하게 망가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3때는 얼굴은 누렇고 헬쓱한데 하체는 스모선수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한 괴이한 불균형 속에서도 대학 가면 빠진다, 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거짓말만 믿고 의자에 엉덩이를 고정시킨 채 빠다코코*, 사브*, 에이* 등 고열량의 비스켓을 와삭거리며 호리호리한 맵시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망상에 잠기기도 했다.

물론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살이 빠진다거나 하는 신기한 일은 내게 일어나주지 않았다. 노력도 안하고 노력할 생각도 없었으니 당연지사다. 대학생활은 별 스트레스 없이 즐거웠고 기숙사에서 나오는 밥은 어찌나 맛있고 푸짐하던지. 친구들이 점오시간 때문에 불편하지 않느냐고 할 때도 점오시간 어겨서 기숙사에서 쫓겨나는 것 보다는 너희들이랑 안 놀고 말겠다고 말할 정도로 참 입이 즐거운 하루하루였다.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서 넌 참 밥을 맛있게 먹어. 넌 참 밥을 이쁘게 먹어, 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너나없이 다이어트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손바닥만한 티셔츠와 발바닥만한 미니스커트를 벽에 걸어두고는 선식과 토마토 등으로 연명하면서 다들 죽음과 맞닿은 허기와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난 진짜 많이 먹는데 살이 안 쪄~ 라고 말하는 깜찍함이란. 그렇다고 내가 물만 먹어도 살이 쪄~ 라고 응수한다면 얼마나 가증스럽겠는가. 난 남달리 많이 먹기 때문에 찌는 것이다. 많이 먹는데 살이 안 찌다니. 그럼 먹는 족족 토하냐. 정직하지 못한 체질같으니라구.

이렇듯 자신만만하고 그칠줄 모르는 식탐 때문에 내게 관심이 있었던 한 남자애와 그냥 친구가 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동기 H가 어느 날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이고 자신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인데 턱선이 예리해서 별명이 나이키라고. 머스마처럼 실속 없이 활개치고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소개팅은 개뿔 뭔놈의 소개팅이냐고 어색해하는 나에게 H는 점심 무렵에 카페테리아 식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냥 편하게 학교 식당에서 나이키가 사주는 점심 한 끼 먹는 건 괜찮지 않냐면서 말이다. 그냥 내 친구로서 만나봐. 다 같이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너도 발도 넓힐 겸. 그래서 나는 당시에 붙어다니던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정오 무렵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바글바글한 학생들 틈에 H와 나이키가 보였다. 남자애들은 왜케 별명을 잘 짓는거샤. 척 보니 나이키였다. 바나나도 괜찮았을 듯. 아무튼 선하고 순진해 뵈는 눈매에 아직 덜 자란 소년같아 보이던 나이키는 우리에게 안녕, 하고 쑥스럽게 인사를 건네더니만 먹고 싶은 걸 다 시키라고 했다. 오늘은 자기가 쏘겠다고. 얘가 카페라고 우습게 보는구나. H가 나의 식탐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안했던지, 아니면 이런 자리에서 지가 먹어봤자 얼마나 먹을 수 있겠냐고 안심했던 게 분명했다. 첫 만남인데다 다들 주머니 허전한 대학생이었기에 물론 자중하기로 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속도에 있었다. 우리가 시킨 음식들은 김밥, 만두, 쫄면같은 양 많고 쌈직한 분식류였는데 나는 걸신 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나이키는 말수가 적었고 나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H와 내 친구들은 사범대생 특유의 소심함을 내보이며 나보다 더 어색해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먹다가 넌 왜 잘 안 먹니? 내가 묻자 나이키가 대답했다. 너 정말 잘 먹는다... 그 호기심에 가득찬 눈빛이라니. 그 말을 듣자마자 놀랍게도 나는 식욕을 반쯤 잃었으나 음식은 이미 거진 다 없어진 상태였다. 그 후로도 H는 이런저런 모임에 나이키를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키는 뭐에 미련이 남았는지 가끔 내 옆자리에 옮겨 앉아서 안녕, 하고 어색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으나 그 예리한 턱선을 느릿느릿 움직이며 너 정말 잘 먹는다...라고 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응, 안녕~ 하고 짧게 인사를 맺곤 했다. 그 이후 그나마 H를 매개로 나이키와는 무덤덤한 친구로만 지내게 되었다. 지금쯤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그런데 나이키 이름이 뭐였더라.

대학 때도 여전히 과체중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사회에 나가면 힘들어서 빠질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참으로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들다고 안 먹나요. 힘든만큼 더 먹지요. 이젠 결혼하면 힘들어서 빠질거라는 하릴없는 소리가 나올 차례인가. 사회에 나오니 주변에선 대개들 그렇게 말한다. 얼굴 진짜 귀여운데 살 조금만 빼봐. 살 조금만 빼서 귀여운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랑 짧은 치마 입으면 정말 깜찍할 거야. 피부 참 곱네. 살만 빼면 되겠어. 물론 4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는 후덕한 이 모습 그대로 각광받고 있으나 내 또래의 2,30대 층에서야 어디 그런가. 나야 토실토실한 나의 몸뚱아리에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해왔다고는 하나, 낭창낭창한 바디라인에 길들여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구쓰나미 정도로 버겁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현실은 이토록 야멸찬 것이다. 그까이꺼 남은 남이지, 맛있게 먹고 기분 좋고 건강하게 살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다가도 옷을 사러 갔을 때 모조리 아동복 사이즈로 나오는 옷을 꿰어 입어보다가 한숨 쉬며 돌아설 때나 선생님은 다이어트 안하세요? 나중에 베트남 가서 남자 사오실 거죠? 라고 아이들이 들이댈 때는 이렇듯 자기관리 하나 못하고 식탐에 휘둘리면서 뭔놈의 교육인가 싶어서 마구마구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기반찬 타령을 하고 있는 나. 도무지 식탐의 굴레를 벗어날 조짐이 보이질 않는다. 요즘은 그나마 먹는만큼 움직이고 있으니 체중이 더 불어나는 일은 없다지만 이제 곧 방학 아닌가. 게다가 여름은 내가 좋아라 하는 각종 탕의 계절이 아닌가.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 등등. 먹는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해도 해도 싫어지지 않는다. 내일은 고기 먹으러 간다. 고기를 먹으려고 일부러 외출을 계획했다. 난 살 빼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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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6-06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갑자기 어제 유학시험 인터뷰 준비를 하던 3학년 애의 말이 생각나서...자기 소개를 준비하는데, '친구들이 너보고 뭐라고 하냐?'고 물어봤더니 '후덕하다고 그래요'라고 대답하던 그 녀석의 동글동글 동안이 생각나서리...ㅍㅎㅎㅎ

깐따삐야 2006-06-07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ㅡㅡ;

마태우스 2006-06-0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자고 사는 건데, 남들 시선의식해서 식탐을 절제하는 게 과연...으음... 원하는 거 드시고 운동을 해보심 어떨까요. 글구 귀여운 얼굴이라면 굳이 살을 빼지 않는다 해도 남자는 몰려올 거로 사료됩니다. 20대 초반을 지나면 귀염성이 키 포인트죠

깐따삐야 2006-06-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예쁘다고 말하기 뭣하면 귀엽다고 말하는 건 이미 대중화된 위로 멘트라는 걸 아시면서 그러시나요. 그리고 뭐가 몰려온다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