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집에 친구 K가 왔었다. 지난 가을 내가 다리를 다쳤을 때 출장 겸 문병 겸 우리집에 들렀던 이후론 처음이다. 일단 나도 참 좋아하는 친구지만 배울 점이 많은 애라고 우리 엄마가 좋아라 하시는 친구라서 만날 일이 있으면 꼭 집으로 부르게 된다. 엄마는 전복을 넣은 미역국을 끓이고 더덕을 무치고 잡채를 하고 만두를 빚고 수정과를 내오는 등 마치 큰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친구를 대접했다. 딸의 친구는 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며 부지런을 떠는 엄마 덕분에 우리는 실컷 먹고 떠들며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K는 엄마 말씀처럼 참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나한테는 친구라기보단 언니같고 선배같은 그런 존재인데 철 모르고 어벙벙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내가 별 무리 없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누릴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던 친구다. 짧게 올려 친 머리에 헐렁한 후드티와 물빠진 청바지를 즐겨입던 그녀는 보이시한 외모뿐만 아니라 남자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처음부터 선배들과 동기들의 눈에 띄어 당당히 과대표로 선출되었다. 학기초부터 대외적인 활동에 참여하느라 공사가 다망했던 그녀와 공사가 다망해질까 두려워 일과가 끝나면 거의 기숙사에만 틀어박혀 사는 나는 학과 내에서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같이 기숙사에서 지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학교를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범생으로 지내오다 처음으로 자유의 전당이라고 하는 캠퍼스에 발을 들인 나는 한 마디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모르며 갈팡질팡하는 미운 오리 새끼같았다. 그런 나를 알아보고 기꺼이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물론 내 곁에는 K보다 더 친하게 지내게 된 단짝 E가 있었지만 E와 나는 여러모로 성향이 비슷해서 함께 있으면 편하고 다정하기는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K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대개 유쾌하면서도 역동적이었다. 당시의 나는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해가 지기 전에는 E와 함께 도란도란 차분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기울면 K와 함께 기숙사를 빠져나와 흥청망청 고성방가도 마지 않으며 젊음을 소진하고 또 소진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리고 예민했던 나와는 달리 무감하고 털털했던 그녀는,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나를 충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진심을 다해 나를 아껴주었고 난 온갖 까탈스런 변덕으로 그녀를 지치게 하면서도 언제나 힘든 일이 있거나 버거운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구원 요청을 하곤 했다. 나는 솔직한 것 빼고는 봐줄 것이라곤 없는 눈치 없고 철 없는 어리광쟁이였고 그녀는 언니처럼, 엄마처럼 그런 나를 얼렀다 혼냈다 하면서 나를 키웠다. 난 아직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는 그녀를 불러내 도서관 앞 벤치에서 찔찔 눈물을 흘렸던 내 모습을 확연히 기억한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고 안아주니 훌쩍거리던 것이 꺼억꺼억-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도 기억한다. 푼수였던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저 의아할 뿐인 어떤 상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아프고 괴로웠던 짝사랑을 접으면서 북받쳐 오르는 설움과 대학생활 전반에 대한 환멸과 우울로 이성을 잃은 채로 울고 또 울었다. 동갑내기인 친구 앞에서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울어보기는 K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K는 휴학을 했던 나보다 일 년 먼저 교단에 섰고 임용고시를 며칠 앞둔 날, 그녀는 자취방 주인 아주머니께 내 앞으로 찹쌀떡과 편지를 전하고 갔다. 내가 복학을 하고 그녀가 졸업반이었던 시절, 우리 사이엔 말도 안되는 오해가 있었고 복학을 해서 우왕좌왕하던 나나 시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그녀나 복잡하게 엉켜버린 오해의 실타래를 풀기엔 둘 다 너무 여유가 없었고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 상태로 세월은 잘도 흘러주어 다행히 그녀는 순조롭게 사회에 첫발을 들였고 나는 4학년이 되어 행주처럼 흐물흐물 찌든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는 심리적인 거리보다 물리적인 거리가 우리를 떨어뜨려놓고 있었고 가끔 K를 그리워 하면서도 우리는 아마도 그냥 이렇게 멀어지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날 잊지 않고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드디어 내가 교단에 섰을 때 우리는 언제 우리가 멀어졌었냐는듯 반갑게 재회했다. 보이시하던 그녀는 공들여 다듬은 손톱에 치마 정장만을 고집할 정도로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해 있었고 토실토실한 볼안에 개구리처럼 팔뚝 핫도그를 잔뜩 씹어삼키고 있던 나도 갸름해진 턱선의 변화를 겪으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만나면 언제나 옛날처럼, 너만한 여자가 어딨겠냐고 서로를 부추겨주며 웃고 까불고 수다를 떨곤 한다. 딸부잣집의 둘째딸인 그녀와 달랑 남매 있는 집의 막내인 나는 무엇 하나 썩 닮은 점이 없지만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며 여전히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고 있다. 이번 방학에 청소년 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중국에 다녀온 그녀는 그 느끼한 음식도 아무 불만 없이 다 먹고, 벽에 기대기만 하면 코 골며 잠들고, 가이드의 수완에 두리뭉실 얼결에 바가지를 쓰고도 허허 웃으며, 무디고 대범한 성격의 편리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곧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는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도 쉽게 먹고 쉽게 잠들고 손해를 보고도 웃어넘길 수 있는 그녀가 부럽기만 했다. 엄마가 늘상 K 좀 보고 배워라, 하시는 것도 이해가 간다.

우린 서로 다르지만 아이들에 대한 고민, 가르치는 일에 대한 고민, 연애와 결혼에 대한 고민, 대개의 관심사들은 비슷했다. 같은 또래이고 같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겹치는 생각거리들이 많을 수 밖에. 재작년보다는 작년이, 작년보다는 올해 아마도 처음의 그 열정이 더욱 식어버릴 것이라는 점에 아쉽게 동감했고 아이들을 대할 때 잘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상처만 주었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는 점에 긍정했다. 욕심과 열정부터 앞지르는 무리수를 둘 때 어떠어떠한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을 겪어왔기에 이젠 위험할 정도로 휘청대는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 위험천만한 휘청거림에 대해서 둘 다 그리움을 표했다. 연애나 결혼 문제는 그랬다. 노처녀로는 늙지 말자고. 죽어도 시간이 안 나는 수억대 연봉의 전문직 여성도 아닌데 그냥 왠만하면 남들 갈 때 가자고. 한 때 하늘을 찌를듯한 오만으로 원기충천했던 우리는 그렇듯 세월과 쓸쓸히 타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요즘 쓸만한 남자 찾기가 왜 이렇게 힘든거냐며 또 다시 예전처럼 주제 파악 못하는 소리로 결론을 맺었다.

대학생활이란 인생의 한 페이지를 함께 넘겼던 우리는 이제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한창 살아가고 있다. 겉모습은 조금 변했지만 K나 나나 예전 모습의 일정 부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고 그 동안의 경험과 상처들 덕분에 새롭게 추가된 또 다른 모습도 지니고 있었다. K는 낙천적이고 씩씩하므로 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그녀는 예전부터 어느 자리에 두어도 항상 능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였다. 남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그녀를 부지런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각자 변해갈테지만 중요한 면에 있어서는 늘 한결같은, 그런 사람, 그런 사이로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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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2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꾹.

깐따삐야 2006-02-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