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혜 - 사랑밖엔 난 몰라
그러고보니 노래를 불러본지도 참 오래다. 다리를 다치고 난 후로는 회식 자리에도 종종 불참했고 특별한 약속도 잡지 않았으며 나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직접 우리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기분이 울적해 있었기 때문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일도 드물었다. 학창시절에 오락부장을 하거나 사회를 본 적이 있지만 나는 지금도 행사 MC들만 보면 마음이 뛰며 감정이입을 할만큼 노는 것을 좋아한다. 가무에 소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웃고 마시고 떠들고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참 좋다. 물론 노는 자리 전후로 따라오는 부작용 때문에 사람들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사람이 제대로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것 또한 축복이자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나의 레퍼토리는 이러하다. 낭만고양이나 DOC와 춤을, 정도로 진하게 흥을 북돋워 주다가 촉촉하게 술이 오르고 다들 센치해질 무렵 즈음해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불러준다. 술이 좀 올랐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면 칼칼하던 목과 찐득하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희(오지혜 분)가 부르는 사랑밖에 난 몰라, 는 심수봉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감이 좋았다. 나는 그 장면을 자꾸 반복해서 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지혜란 배우가 평소에 참 연기를 잘하는 배우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수준급의 노래 실력까지 지닌 줄은 몰랐다. 그녀는 너무 멋있었다.
남성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전국 각지를 돌며 연주를 하는 출장 밴드다. 팀의 리더 성우(이얼 분)의 시선을 따라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꿈을 이루었든, 그렇지 못했든 불행한 삶을 견디며 살고 있다. 학창 시절 함께 공연을 하며 일류 밴드의 꿈을 키우던 친구들은 약사가 되고 환경 운동가가 되어 현실에 매여 있고 성우의 첫사랑이었던 그녀, I love Rock & Roll을 부르던 록밴드의 보컬 인희(오지혜 분)도 남편과 사별한 채 채소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 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사는 방식에 있어선 거칠고 서툴기만한 밴드 멤버들은 이런저런 상처를 안은 채 각자의 길로 흩어지게 되고 성우는 여수로 내려와 남아있는 멤버인 키보디스트와 보컬 인희를 데리고 새롭게 밤무대 밴드 생활을 시작한다.
언젠가 내가 아는 한 친구가 그랬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나오는 황정민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는 실제로 학교 밴드의 드러머로 활동 중이며 말수가 적고 우직한 한편 속을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 성격이다. 단지 드러머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떠나서 그는 정말 황정민같고 황정민스러운 사람이다. 여전히 그를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가 말하면 다 진실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황정민이 대마초에 취해 멀건한 얼굴로 "그 여자, 네가 가져." 하는 장면에서 문득 그가 보고싶었다. 소주와 오뎅을 앞에 놓고 흘러간 노래를 들으며 시덥잖은 얘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조만간 그를 한 번 봐야겠다.
인희는 말한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그 때였는데." 그렇듯 전성기가 지나고 나면 이제는 내려와야 할 순서일까. 사는 게 그런 것 같긴 하다. 정신적으로 무르익고 성장하는 나이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전성기가 아니라 내가 가장 나다웠고 행복했던 시점에서의 전성기. 그러한 의미에서의 전성기는 누군가에게는 학창시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백발이 되고난 시점의 어느날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한 때의 열광 뒤에는 누구나 대개 평범해지고 만다. 일류 밴드를 꿈꾸던 아이들은 삼류 밴드가 되고 음악 선생님과 연애하던 도도한 보컬 소녀는 가끔 노래방에 가서나 전성기를 떠올리는 채소 장사 아줌마가 된다. 끝까지 하고 싶은 음악을 선택한 성우나 시류에 맞게 약대를 나와 약사가 된 친구나 삶에 대해 불만족스럽고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술집에서 발가벗고 기타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성우의 모습은 꼭 나같고 내 주변 사람들같고 세상 사람들같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개판인데 나는 벌거벗은 채로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칠 수 밖에 없다.
삶 자체를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때때로 이 보다 조금 더 낫거나 조금 더 못할 수는 있겠지만. 메뚜기도 한 철이듯 사람도 한 철이다. 그 한 철을 그리워하면서 평생을 평범하게 사는 게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른 거라도 알면 조금은 편해지련만 사랑밖엔 난 모른다면 더없이 버텨내기 버거운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참 아름답지 않은가. 사랑밖엔 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