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재회한 셀린느와 제시

Before Sunrise 이후 9년이 흐른 다음 다시 파리에서 마주치는 두 사람.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제시는 셀린느를 기다리며 비엔나에서 이틀간이나 머물렀지만 공교롭게도 셀린느는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약속 장소로 나오지 못했다. 뉴욕에서, 파리에서, 한 때 가까운 공간에 머물렀으면서도 스쳐갈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깝고 장난같은 운명에 이들은 서로 아쉬워하며, 9년 전 나누었던 대화와는 사뭇 달라진 어른들의 대화를 나눈다. 제시의 이마와 눈가에는 주름이 늘었고 셀린느 또한 싱그럽고 건강하던 예전에 비해 다소 여윈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영화 속 두 사람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제시의 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뭔가 와닿는 느낌이야..." 지난날의 러브스토리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와 과거 점술가의 예언처럼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모색하며 일하고 있는 셀린느. 9년 전의 그들이 모호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함께 고민했다면 지금의 그들은 산다는 일이 너무 뻔하고 분명하고 변함 없다는 것 때문에 불만에 차 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뭔가 와닿는 느낌 때문에 편안해진 그들이지만 그 편안함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셀린느는 말한다. 연애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이 점점 죽어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제시는 27살 이후로 자신의 삶은 그냥 미쳐버렸다고 말한다. 제시는 소설을 통해 셀린느를 간직하고 셀린느는 그녀가 작곡한 왈츠 속에서 제시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여전히 닳지 않고 반짝이는 추억과 사랑이, 그들 사이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Before Sunrise를 보고 나서 나는 두 사람이 재회할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감독이 후일담을 만든다면 좋은 얘기 갖고 욕심 내거나 장난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을 것 같았다. 그만큼 Before Sunrise가 담고 있는 젊은이들의 정서와 고민이 좋았고 서로 쿵닥거리다가 프로포즈나 결혼식으로 끝을 맺는 상투적인 결말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나의 상상 속에서 앞으로 만날 수도 있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런데 Before Sunset이란 영화가 개봉되었고 나는 나의 염려가 현실화 되는 것을 보았다. 후일담으로 나온 영화가 나쁘면 나빴지 더 좋아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혼자 보기 위해 아껴두었다. 개봉 당시 나는 아마 다른 사람과 액션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공감한다. 나머지 모든 생이 둘이서 공감했던 그 날 하룻밤 만도 못하다는 것을. 삶이란 것이 때론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굴러갈 때가 있다는 것을. Before Sunrise에서 제시는 셀린느를 열차에서 내리게 하기 위해 "넌 나중에 결혼을 해서 나같은 놈을 알고 지냈다는 것 때문에 위로를 받을거야. 아, 지금 내 남편같은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말야." 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제시도, 셀린느도 꿈에서 현실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비엔나에서의 추억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밟고 서 있는 현실이 더욱 초라하고 안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을 지켜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더라면? 과연 지금처럼 설레고 행복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여타의 평범한 커플들처럼 간신히 서로를 참아주며 살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속편은 허접하다는 편견을 옹호하는 편에 속했던 나도 이 영화만큼은 꽤 좋았다. 전편에 비해 뭔가 허전하고 밍숭맹숭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것은 젊은 그들이 어느 새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특히 셀린느가 제시를 위해 기타를 치며 왈츠를 불러주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불어를 발음할 때 만큼이나 아련하고 근사했다. 줄리 델피만큼 변함없이 아름답게 나이들 수만 있다면 길거리에서 첫사랑과 마주친들 무엇이 문제리요.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이 나라면 속편은 만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영화든 나의 현실에서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6-01-0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셋 보셨군요. 선라이즈 본거 곧 올려야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깐따삐야 2006-01-0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편을 먼저 보고 나서 전편을 보았을 경우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