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와 셀린느

같은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영혼끼리 공감하는 운명같은 하루를 보내고 작별하는 두 사람. 그들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섰지만 우리는 세월이 훌쩍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Before Sunset이란 영화 속에서 더욱 성숙해진 그들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예상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같다. Before Sunset은 아직 보지 못했다. 개봉 당시에 봤더라면 추억으로 남을 뻔 했다. 그 때 못 보길 잘했다. 나중을 기약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늘 더 많은 자유를 느낀다. 마음 놓고 일탈을 한다거나 누군가를 일부러 속인다거나 그런 의미의 방종이 아니라 왠지 다리 힘을 풀고 터덜터덜 걸어도 좋을 것 같고 호흡할 수 있는 산소의 양마저 좀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미국 청년인 제시(에단 호크 분)와 프랑스 아가씨인 셀린느(줄리 델피 분)도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엔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랑의 아픔, 결혼의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평소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던 사연들을 공유한다. 젊고 순수하고 풋풋한 이들은 상대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빠져들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의 갈 길로 떠난다. 두 사람은 아마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고 떠올리며 살 것이다. 닮은 두 영혼이 마주쳐 불꽃을 일으키는 순간은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쉽게, 자주 일어나 주지는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론 그렇게 꿈처럼 시작된 만남이라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서서히 퇴색되기 마련이니 어쩌면 두 사람이 여운만을 남긴 채 서로의 일상으로 복귀한 것은 참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어떤 한 사람을 허무하게 떠나 보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나와 영원히 오래오래 친구가 되길 바랬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려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연인 이외에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으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서로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보다 먼저 사랑해 온 사람이 있었고 그는 이런 나를 설득했고 이해했고 기다렸지만 나는 당최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리고 고집이 세었던 나는 그를 이기적인 욕심쟁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다. 이후 시간은 흘렀고 나의 이별 통보로 우리는 헤어졌다. 살다가, 간혹 그와 나눴던 대화가 한 움큼씩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한참 어린 나를 위해 대화의 코드를 그 편에서 섬세하게 맞추어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우리는 잘 맞았고 서로의 매력에 탄복했으며 너를 만나 행복하다는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나는 어렸기 때문에 그와 헤어졌지만 어렸기 때문에 그와 행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두 가지 일이 벌어지는 데 한 가지 이유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단 한 번 뿐일지언정, 혹은 앞으로 나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질지도 모르겠으나 그 기억을 내 인생의 보너스 정도로 여기고 있다. 나도 영화같은 추억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 정말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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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3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포 선셋 보고 너무나 좋아서 얼마전 선셋관 선라이즈 시리즈를 디비디로 구입했어요. 선라이즈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어여 시간내서 봐야겠어요. 사랑은 정말 어렵죠. 너무나 예측 불가능하고 매번 다르기때문에 힘들어요.

깐따삐야 2005-12-3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사람끼리 감정의 저울질 없이 담백하게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