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사랑니가 속을 썩이고 있다. 그것도 누워서 배 째라는 식으로 올라오는 중이라서 대학병원까지 방문해야했다. 내 몸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쓸데없는 막니 하나가 아주 매트릭스를 찍고 앉았다. 05년 후반기는 참 고단하기도 하다. 튼튼한 것으로 보자면 이십세기 마지막 히로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건강을 자랑하고 다니던 내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신세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차츰 모든 것이 좋아질 무렵 방학을 즐겨볼까 했더니만 기어이 사랑니가 경종을 울리는구나. 어쨌거나 마지막 경종을 울리다, 가 되었음 좋겠는데.

한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도착한 대학병원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병원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참 많기도 하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은 아들의 네 번 째 다리 수술의 예약을 확인하러 온 것 같았는데 병원 측에서는 예약이 빠진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럴리가 없다고 의사 샘과 전화 연결을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참 안쓰러웠다. 네 번 째 수술이라니. 세상에 그걸 빠뜨리면 어쩌자는 건데. 접수원들의 기계적인 손놀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불안해졌다. 파바방 도장 찍고 드르륵 카드 긁고 찍찍 영수증 구분선 뜯어내고 눈이 오락가락했다. 엄마는 대학병원 특유의 복잡다단한 진료 절차를 밟으면서 내 돈 내고 이렇게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일도 드물다면서 다 때려치고 식구 중에 하나를 의사 만들던지 해야지 불편해서 못 살겠다 하셨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는데 기왕 하는 거 아주 오지게 열심히 해서 의사나 될 걸 그랬나, 에혀. 암튼 산골에서 줄창 미끄러져가며 여기까지 왔다는 엄마의 기지가 없었다면 아마 어둑어둑해진 지금쯤에나 간신히 집에 도착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니 발치는 실패했다. 오늘 확 빼버리고 왔음 좋았을텐데 염증이 있어서 가라앉힌 다음 뽑아야 한단다. 그것도 열흘 뒤에나. 어쨌거나 열흘 동안 이 쥑일놈의 사랑니와 한 몸 한 뜻으로 동고동락 해야 하는 것이다. 네모난 마스크를 쓴 얼굴이 네모난 의사 샘은 차분차분한 말투의 여자 샘이었고 뭐 그런 얼굴이 따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내 느낌 상 이를 잘 뽑게 생기신 것 같았다. 마치 영구치 중의 하나인 두 번 째 어금니처럼 억세고 튼튼하게 생기셨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랑니 뽑기 전에 이틀 정도 학교에 나가서 근무를 해야 하고 입시 때문에 아이들도 봐야 될 것도 같다. 만나려고 했던 친구들을 만나게 될는지는 잘 모르겠고. 어차피 맛난 것도 못 먹고 볼이나 싸매고 앉았을텐데 귀찮아서 얼른 집에 보내려고 들겠지. 이 쥑일놈의 사랑니, 방학을 아주 통째로 잡아먹을 심산이구나. 켁! 샘들은 지금쯤 제주도 앞 푸른 바다를 내다 보면서 싱싱한 바다회를 먹으며 간만의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겠구나. 사랑니를 마지막 액땜으로 다가오는 2006년엔 본래의 건강하고 발랄했던 내 모습을 찾고 싶다. 아프면 다 소용 없다. 정말루.

※ 사랑니가 영어로는 wisdom tooth라는데 지혜를 알 나이에 나기 때문이란다. 처음에 솟아날 때의 아픔이 첫사랑의 고통과도 같다고 해서 사랑니라는 설도 있고. 근사한 이름과 그럴듯한 의미에 비하면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당최 꼴 뵈기 싫어 미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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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12-2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랑니가 났는데 안뽑아도 된대요. 저도 모르게 다 났어요.

깐따삐야 2005-12-2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받으셨구랴. 부럽소. 부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