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자폐 성향이 다분한 것 같다. 자폐가 자기 안으로 숨어들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 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오늘도 어느 자리에선가 그 동안 소식을 몰랐던 많은 지인들과 마주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의무만 다 한 채 누가 볼까봐 겁이라도 난다는 듯 그 자리를 총총히 떠나왔다. 바쁜 일이 있었다거나 특별히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냥 얼굴 아는 사람들과 혹시라도 마주쳐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안부를 묻고 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는 사람들 서넛을 만났다. 다들 길을 헤매다가 나를 마주쳐서 길만 묻고, 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느그들같은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그냥 일찍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오는 길에 맥반설 달걀을 세 개 사고 호빵을 하나 사고 집에 와서는 된장 기운을 약간 풀어 라면을 끓여먹었다. 아까 어느 오락프로그램에서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것 같은 사람, 이란 타이틀로 순위를 매기더라마는 그것이 그렇게 안되고 딱한 일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오후에 라면 한 대접을 먹고 고구마 찐 것 까지 먹고 맞벌이 부부로 산다는 것, 이라는 실용서를 몇 장 읽다가 쿨쿨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방학을 맞이한 나의 뒷치닥거리를 하시느라 기어이 엄마는 몸살이 나셨고 내가 좋아라하는 개고기 삶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있다. 난 저 된장 기운 섞인 개고기 누린내가 왠지 뿌듯하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인간 관계를 상당히 무시하며 지내온 것 같긴 하다. 주변 사람들을 무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대체로 심신이 피곤했고 다시는 그런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됐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만나서 즐거운 적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매우 드문드문 아껴서 만나곤 했다. 이후에 사회에 나온 뒤로도 직장에서 만난 사람은 딱 직장에서의 관계만 유지한다, 는 룰을 지킨 것 같다. 그래도 회식 자리에 가선 열나게 놀고 열나게 분위기 띄우고 그랬지만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 다리를 다치고 난 다음엔 나는 정말 내성적이고 자폐적인 인간이 되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고통의 공유는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사소한 불편이라도 끼친다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게 사람이란 걸 그 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뒷담화나 까고 서로 반목이나 하느니 책이나 주문해서 읽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겉으론 사람 좋은 척 웃는 사람들이 뒤로는 얼마나 깍정이 짓을 하는지 익히 보아왔고, 특히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은 그것이 누워서 침 뱉기라 할 지언정,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살기에 물처럼 조화가 될 수 없는 인간형들이 태반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즐겁게 지내면서도 왜 나는 늘 혼자이고 싶어서 안달인걸까.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벽이 있고 한 때는 그 벽이 무너지는 기분좋은 체험도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나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해도, 불가피한 벽이 있다는 걸 실감한다. 그렇다고 나란 사람이 매일 찡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다니는 건 아니다. 대개 주변 사람들은 내가 밝고 씩씩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면의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어서일수도 있으나, 정말 사람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직업이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내가 사람을 싫어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5-12-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끼리라도 고통의 공유는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사소한 불편이라도 끼친다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게 사람이란 걸" 요 대목 참 좋아요. 저도 자폐성향을 가진 人입니다.

깐따삐야 2005-12-2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징징거리는 글에 동감을 표해 주시니 반가울 따름. ^^ 근데 어쩌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더 칭찬 받고 싶고 존경 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안달인지도 모르죠~

마늘빵 2005-12-28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