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에휴, 하는 한숨 소리. 콜록콜록, 기침 소리. 슬슬 방학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신호다. 나도 지쳐 있다. 이십대에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가뿐했는데 어쩔 수 없다. 나이를 인정해야 할 때인가 보다. 동네에 핫요가 플랭카드가 걸려 있는 것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노동이 아닌 운동을 하고 싶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 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육아휴직 후 복직해서 다시 신규 교사가 된 것처럼 모든 일에 삐그덕, 삐그덕, 잡음 섞인 한 해를 보냈다. 교실 붕괴라는 말 이전에 나 자신부터 붕괴될 지경이었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한 끝내 평범한 교사조차 되기 힘들다는 쓰라린 자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우울과 자책에 매몰되기에는 매일의 일상이 쉼 없이 찾아왔고 무엇 하나 똑부러지지 못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써댔다.
그럼에도 영달이는 찡그렸다 웃었다 하면서 새록새록 자라나고 올해 인연을 맺은 학생들도 훌쩍 커서 조만간 졸업을 앞두고 있다. 어쨌거나 한 해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고 나 역시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여기, 이 자리에 있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 또한 내가 선생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은, 매일매일이 새로우면서도 매일매일이 제자리 같고, 날마다 설레면서도 날마다 울음보를 터뜨리곤 하는, 다분히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준다.
학창시절, 노트 귀퉁이나 책상머리 앞에 꼬박꼬박 써놓았던 삶의 모토들을 어느 순간 다 잊어버렸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 잊고, 버렸다. 어른이 되면 그러한 모토들이 자연스레 체화되어 굳이 꼬박꼬박 상기하거나 자극을 주지 않더라도 잘 살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어느 순간 배움을 멈추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퇴화하는 존재였던 바.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잡념만 늘려봤자 낯빛만 칙칙해질 뿐. 소설 <상록수>에 나왔던 구호. "배워야 산다."는 말이 요즘 내게 딱 어울리는 모토다.
돌아보면, 청춘의 많은 시간이 허구와 같이 느껴진다.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책을 읽고, 그밖의 경험치를 쌓으면서 나는 대체 무얼 배웠던 걸까. 어쩌면 그냥 놀았다, 는 생각을 한다. 너무 많이 놀고 있었다. 소위 삶의 밀도라는 것을 촘촘히 느끼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지난 세월 속에 그런 순간이 없지 않지만 이 뻑뻑하고 단단한 통밀빵 같은 시간에 비하면 지나간 몇몇 순간들은 얇고 부드러운 식빵 같다.
모토를 정하고 나와 관련된 주변 이들을 멘토 삼아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는 삶. 모토와 멘토. 그리고 놀토! 연말이 되어 정리해보는 앞으로의 내게 필요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