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메모를 한다. 잠들기 전 스탠드를 켜놓고 포스트잇이나 메모지에 슥삭슥삭. 내일 해야 할 일 다섯 가지. 확인할 것 두 가지. 이런 식이다. 기억력 감퇴라기 보다는 시간을 조각조각 나눠써야 하는 분주한 일상 때문이다. 앞자리 동료는 내게 준비의 여왕이라고 했지만 배짱 없는 나는 자잘한 메모 없인 살 수 없는 엄마이고 아내이고 선생일 뿐.  

  주말이면 수목원으로, 무심천으로, 심지어 교육청 내의 공원까지 꽃구경을 다녔다. 영달이는 띄엄띄엄 발을 뗄 수 있게 되었고 나날이 자기만의 언어로 숱한 것을 표현한다. 꽃, 구름, 나무, 새... 자연의 모든 산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반갑게 조우하는데 오늘처럼 어둠이 자욱한 날엔 할머니랑 밖에도 못 나가고 무얼 하며 놀고 있을까. 공연히 심란해진다. 나는 너를 위해 내가 아닌 그 무엇이라도 좋다. 이 아이를 볼 때면 나는 나를 잊는다. 내 안에서 싹터 내 손길에 자라나는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는 축복이다.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하느라 한동안 교과서와 교재만 끼고 지내다가 엊그제 돌아가신 이윤기 옹의 <위대한 침묵>을 읽었다. 옛사람들은 어찌 이리 눈이 밝은가? 유전우전, 밭을 갖게 되는 순간 근심은 끝이 없게 된다는 뜻이리(p.32). 이런저런 치다꺼리에 내 시간이 없음을 한탄하던 와중에 콕, 와서 박힌 문장이다. 한때 너무 많은 자유 속에서 느릿느릿 유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연 행복했던가. 물만 부으면 성큼성큼 키가 자라는 콩나물처럼 나는 희고, 연약한 채로 자의식을 키워나갔다. 그때의 나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절의 내 모습을 한 젊은 여인들을 보면 공연히 애처로와진다. 그대로 멈춰라, 하고 싶다가도 이제 다른 춤을 추어도 좋지 아니하겠는가,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묻고 싶어진다.

  

 "스님, 대도에 이르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거라."(p.128)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고 내 몸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다행스럽다. 그 둘이 한곳에 동시에 머물러 보낸 세월은 거짓말처럼 짧다. 영달이 덕분인지, 나이 탓인지, 그저 바쁘기 때문인지, 잠시잠깐의 거짓말 같은 변덕인지, 이도저도 아닌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정답도 모르고 이르러야 할 대도랄 것도 없지만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라고 하면 과거와 달리 네, 그럴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시시때때로 건강에 적신호를 느낄 만큼 피곤한 일상이지만 내가 나일 수 있다는 것.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좋다는 것.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 생활의 힘에 놀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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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1-04-2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복직하신걸 오늘에야 알다니.. ㅠ.ㅠ
이제 몸에 좀 익숙해 지셨을까요? 영달이도 아침에 엄마가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에 익숙해 졌을까요?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렀네요.
빨리 날이 좋아지고 따듯해 져서 영달이가 꽃구경도 다니고 놀이터에도 나가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깐따님도 건강 잘 살피시구요~ ^^

깐따삐야 2011-04-29 09:00   좋아요 0 | URL
네, 올해부터 복직했답니다.
육아에 식사 준비까지 친정엄마의 노고 덕분에 저는 간혹 남편과 싸우기도 하고 짜증도 내면서 여전히 철모르는 아기엄마인 채로 지내고 있어요. 저는 괜찮고 너무나 좋습니다만 엄마께 늘 죄송해요.ㅠ
영달이는 날씨 불문하고 외출합니다. 이미 실물이 주는 생동감과 즐거움을 안지라 안 나가곤 못 배기죠.
안부 고맙습니다. 무스탕님도 건강히 지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