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인디북 테마가 있는 단편소설
버지니아 울프 외 지음, 북클럽 세 번째 달 / 인디북(인디아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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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고종석의 <여자들>을 그다지 새로울 것 없이 재미없게 읽고 나서 지적인 남자가 쓴 여자론은 사서 읽지 말고 빌려 봐야겠단 이상한 다짐을 했다. '삼인'에서 십년 전에 출간한 <자유라는 화두>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저자가 고종석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아마 그 비슷한 류의 책을 기대했는가 보다. 

  '북클럽 세 번째 달이 찾아낸 아홉 나라의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여자>라는 소설집은 올해 들어 처음 읽은 소설집이자 어쩌면 올해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로 남을 책이다. 책날개나 소개말을 건너 뛰고 다 읽고 나서 그제서야 구석구석에 적힌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만큼 여기 모인 단편들이 좋았고 이 진귀한 작품들을 찾아낸 이들이 궁금해졌다. '북클럽 세 번째 달'은 열다섯 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독서 모임이란다. 직업도 다양한데 아마 정기적으로 모여 작품을 읽고 선별하여 이렇게 책으로 묶어 내기도 하는가 보다. 세상에 이렇듯 사랑스러운 모임이 있었다니. 무조건 부럽다.   

  이 책엔 다자이 오사무의 '뷔용의 아내'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어떤 연구회'까지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체홉의 <귀여운 여자>와 제임스 조이스의 <이블린> 외에는 아직 어느 책에서도 접해보지 않은 신선한 작품들이었다. 모든 작품 하나하나가 재미있게 읽혔고 깔끔한 번역과 친절한 해설도 장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여자들만이 고를 수 있는 여자들, 여자들의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다 좋았지만 특히 타고르의 '눈'과 로렌스의 '국화 냄새'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타고르는 인도의 성자답게 사랑과 결혼에 있어서도 구도자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의대생인 남편의 아집으로 시력을 잃은 쿠모는 볼 수 없다는 고통보다 물질 앞에서 변해가는 남편을 의식해야 한다는 고통으로 더 괴로워한다. 탐욕과 허영 앞에서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남편을 맹인이 된 쿠모가 바른 길로 이끈다는 설정은 다소 윤리적이고 도식적인 감이 있지만 시시때때로 캄캄한 미혹 속에서 헤매곤 하는 우리네 삶을 돌아볼 때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혼은 고행이고 삶은 구도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작품.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마음의 불을 밝혀 길을 잃지 않는다면 벽이 아닌 문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국화 냄새'는 메시지보다 정황 묘사가 특출했다. 덕분에 <아들과 연인>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광부의 아내 베이츠는 결혼할 때, 아이를 낳았을 때, 축복의 의미로 국화를 받았지만 그 꽃은 만취해 돌아온 남편의 단춧구멍 안에도 있다. 그녀는 더 이상 국화를 아름답게 볼 수 없을 만큼 결혼생활에 지쳐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귀가가 늦어진 남편이 갱에 갇혀 시신으로 돌아오고 베이츠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어떤 진실을 깨닫는다. 알몸의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아기는 그녀의 자궁 속에 있는 얼음 같았다(p.270). 함께 아이를 낳고 살았고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있는 상태이지만 베이츠는 위와 같이 느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쪽으로 건너올 수도, 저쪽으로 건너갈 수도 없는 깊은 골짜기 앞에서 베이츠는 공포와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한다. 삶이 결코 가르쳐 줄 수 없었던 진실, 죽음을 통해서만이 드러나는 진실의 이면을 로렌스 특유의 섬세하고 촘촘한 묘사로 그려낸 수작이었다.  

  나는 2011년을 사는 요즘 여자이지만 이 책 속의 옛날 여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세상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아졌고 여자들 스스로도 할 일이 많아진 요즘 내가 아는 여자들과 여자로 성장할 내 딸에게도 언젠가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좋은 소설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교훈을 주고 그렇듯 희귀한 소설을 찾아낸 북클럽 세 번째 달이라는 모임이 다시 한번 무조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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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1-01-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궁금한데요!!
보관함으로..^^

깐따삐야 2011-01-17 14:24   좋아요 0 | URL
여자들의 이야기라 많이 공감하면서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보석 2011-01-1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끌리는 리뷰! 저도 보관함으로 ..ㅎㅎ

깐따삐야 2011-01-17 14:25   좋아요 0 | URL
새색시가 되신 보석님께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