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L 선생님이었다. 조리원에 있을 때 와주었는데 그 이후로 연락을 못했다. 그집도 갓 돌이 된 막내까지 아이가 둘이다 보니 혹시 방해될까, 머뭇머뭇하다가 그리 된 것이다. 선생님도 아기가 자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울고 있으면 어쩌나 싶어 미루다가 지금에야 연락한다며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근무할 땐 학교 이야기, 남편 뒷담화를 많이 했는데 둘 다 엄마이다 보니 화제는 역시 육아였다. 돌이 된 막내는 이제 말귀도 알아듣고 혼을 내면 제법 노여움도 탄단다. 영달이는 코에 바람이 들어가서 매일 드라이브 겸 마트에서 함께 시장도 본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깔깔 웃으며 아이가 빨간 불일 때 차가 안 움직이면 찡찡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단다. 우리 영달이도 그래요!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이 사는 아파트 단지 맞은편 단지로 이사왔다고 했더니 횡단보도만 하나 건너면 되겠네, 하며 아기 업고 한번 놀러온단다. 친정에서 뭉개고 있는 바람에 영달이가 우리집을 낯설어하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L 선생님과 아기를 한번 보고싶다. 선생님은 지난번에 대학 후배가 아기를 데리고 놀러왔는데 9시쯤 와서는 5시에 가서 환장하는 줄 알았단다. 가라고도 못하고, 가지 않고 있으니 힘은 들고. 그 후배도 아마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 남편의 후배가 살고 있었다. 오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는데 임신한 내 모습을 보고 축하한다며 언제 한번 놀러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인사치레로 그러세요, 했는데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문자. 아무개가 놀러오고 싶다는데? 남편은 학교에 있었고 나는 부른 배를 좌우로 들썩이며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몸도 무겁고 너무 귀찮은데다 그집에 아이들이 둘이나 있다는 생각에 친정 갔다고 해요, 라고 답문을 보냈다. 그리고는 정말 친정으로 줄행랑. 나중에 후배가 뭐라 그러더냐고 했더니 친정 가까워서 좋겠다고 그러더란다. 그 후배는 친정이 어디냐고 했더니 남편도 헛갈려하더니만 아무튼 여기는 아니라고 했다.  

  그 후로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더 마주쳤고 서로 안부를 물었는데 친정 가까워서 좋겠다는 말을 한번 더 들었다. 몹쓸 놈의 학교가 어린 딸이 둘이나 있는 애엄마를 기숙사 사감으로 부려먹는단 말을 듣고 비록 도와줄 수도 없고 더구나 놀러오고 싶다는 걸 나몰라라 한 입장이지만, 좀 안타까웠다. 그 후배는 학교 아이들이 직접 키운 거라며 버섯을 갖다주더니 지난번 버섯이 별로 안 싱싱했다며 토마토도 갖다 주었다. 뭔가 보답을 해야한단 생각에 신경을 쓰고 있다가 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남편을 시켜 피스타치오, 엄마는외계인 등등을 섞은 아이스크림을 갖다 주었다. 후배는 벌써 이사를 가냐며 많이 아쉬워했단다.   

  L 선생님의 친정도 이 도시와 매우 가깝다. 이십분 정도 운전을 해서 교외로 나가면 금방인 곳이다. 조만간 복직하면 아이들은 친정엄마가 봐주실 예정이고 요즘은 워밍업으로 친정엄마가 왔다갔다 하시며 막내와 친해지려고 애쓰는 중이란다. 우리는 그래서 참 다행인데 만약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정말 갑갑하고 심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아기 엄마는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고 어딘가를 가더라도 짐보따리 하며 혹시 아기가 울어 민폐나 끼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그냥 집에 눌러 있게 되고 점점 고립되어 간다. 남편이 올 때까지 육아를 도와주거나 말벗이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기는 유일한 사람인 엄마한테만 매달리며 모든 욕구를 해소하려 한다, 점점 체력이 고갈되면 귀엽던 아이가 귀신처럼 보이고... 생지옥이 따로 없다.

  요즘 친구 S가 꼭 그와 같은 사정이다. 출산과 동시에 고향과 직장이 있는 도시를 떠나 남편의 직장이 있는 도시로 갔는데 생전 가도보도 못한 도시에서 낯선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는 불어난 몸무게 걱정을 하는 나에게 '나는 몸무게가 잔뜩 나가도 괜찮으니 삭신만 좀 안 쑤셨음 좋겠다'고 말해 나를 넉다운시켰다. 엄마는 S가 가까이 있으면 아플 때라도 내가 가끔 도와줄텐데, 라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런데도 S는 둘째를 낳을 생각을 하고 있고 그녀의 시댁도 대놓고 종용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고된 육아로 바쁜 선배네 집에 와서 밥 얻어먹어가며 부득부득 눌러있는 L 선생님의 후배는 눈치 없고 배려 없긴 하지만 늘 상대방을 생각해주면서도 싫은 소리 못하는 L 선생님이 아마 무척 편했는가 보다. 아기 엄마끼리 통하는 이야기도 많지, 복작대지 않고 한가로와 좋지, 아기들끼리 같이 놀 수도 있지, 얼마나 좋았겠는가 말이다. 남편의 후배와 친하게 지냈다면 나도 비슷한 그림이었을텐데 영달이에게 함께 놀 수 있는 언니들이 생기는 것은 좋지만 이래저래 귀찮을 걸 생각하면 그닥 바라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친정은 멀고 남편은 오지 않고 아기는 코에 바람냄새 좀 맡게 해달라고 떼를 쓰면, 누구한테라도 연락해서 어디든 가고 싶을 것도 같다.   

  L 선생님은 조리원에 왔을 때도 선물로 아기 모자를 전해주고 금방 일어섰다. 나는 수유 중이었고 영달이는 먹다 말고 울고 있었고 다크서클로 판다 같은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나오지 말라며 묻어왔던 바람 냄새 그대로 갖고 갔다. 그만큼 남한테 폐 끼치지 말자, 를 신조로 삼고 사는 분인데 그런 성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워낙 사려깊고 부지런해서이기도 하지만 주변 상황이 여유 있는 덕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선생님이나 나나 민간에 폐 끼치기는 싫어하면서도 친정엄마한테는 끝없는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식 잘나게 키울수록 부모는 골병 든다고, 돈 좀 번답시고 애는 친정엄마 차지로 일찌감치 떠안기고 아, 난 폐 끼치기 싫다고 주장하고 있다니.  

  마땅히 갈 곳 없는 엄마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안 통하는,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라곤 나 자신밖에 없는 엄마들, 사정이야 우야됐든 내 새끼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하는 엄마들, 스스로 민폐 덩어리라고 자아비판 하고 있는 엄마들 심정부터 조속히 헤아려야 이 나라의 출산율이 높아지던지 말던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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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08-1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 엄마를 기숙사 사감으로 부려먹는 학교도 있군요...하긴 별별 사람들 다 있지요...

깐따삐야 2010-08-14 21:59   좋아요 0 | URL
심한 거죠? 머잖아 복직할 저는 더 심한 일만 없었으면, 소심하게 바라고 있어요.

BRINY 2010-08-16 00:11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점점 중등교직에도 여자들이 많아지다보니...이것저것 따지면 일할 사람이 없긴합니다. 남자들은 역차별이니 그러고...에고...

깐따삐야 2010-08-16 13:0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래요. 남의 사정 봐주기엔 내코가 석자고. 잡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수업에만 집중해봤음 좋겠어요.

레와 2010-08-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아로 힘들어 하는 모든 엄마들에게 토닥토닥..

깐따삐야 2010-08-14 21:59   좋아요 0 | URL
레와님이 토닥토닥 해주시니 어깨가 시원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