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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1~6 세트 (묶음) ㅣ 심야식당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뱃속의 공복을 채워주는 식당은 많지만 마음의 공복을 달래주는 밥집은 흔하지 않다. 커피향과 계피향이 상냥하게 맞아주던 헬싱키의 카모메 식당처럼 이 한적한 '심야식당'에도 외롭고 착한 사람들이 찾아든다. 마스터의 인상도 별로고 메뉴라고는 된장국과 몇 가지 술 뿐인데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하면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들어준다. 상술이라는 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무심한 듯한 그 한 그릇의 음식은 마음이 고픈 이들에게 담백한 위로가 된다.
내게도 잊지 못할 몇 군데의 밥집이 있다.
스무 살, 막막한 봄이었다. 기숙사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문득 H가 소풍에 가자고 했다.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니고 소풍에 가자고? 응. 절친 E와 그를 따라나서자 모교 후문 근처의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는 여기야, 라고 말하며 모퉁이의 조그만 대문으로 들어섰다. 젊은 아줌마가 채소를 다듬다 말고 어서오세요, 라고 인사했다. 실내의 가장 안쪽으로 테이블이 보였다. H는 이집은 테이블이 딱 하나야, 라고 말하면서 너를 꼭 한번 데려오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는 무슨 라면 종류를 시켰는데 카레라면과 열무김치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카레의 노르스름한 색깔에 열무의 초록, 듬성듬성 빨간 고춧가루까지, 따듯하고 부드러운 라면과 아삭하고 시원한 열무김치는 그 봄의 막막함을 환하게 걷어주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여자 기숙사 근처에 슈퍼를 겸한 순대집이 있었다.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십시일반으로 돈이 걷히면 총무 언니와 막내인 내가 주로 술을 사러 가곤 했다. 우리는 그집 단골이었다. 주인 아줌마가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간을 덤으로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아줌마, 정말 미인이세요, 라고 말하면 고맙다며 수줍게 미소짓곤 했다. 남재일 교수가 '공리'를 예찬하며 남성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미모는 흔해도 선의를 불러일으키는 미모는 드물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그 아줌마가 그랬다. 상상력이 용솟음쳤던 나는 아줌마를 볼 때마다 가난하고 무모한 나무꾼에게 보쌈당해 온 청순한 선녀를 오버랩하곤 했다. 가게는 오래되긴 했지만 언제 가봐도 탑쌔기 하나 없이 말끔했고 아줌마의 미모처럼 똑고르게 썰어진 순대는 깔끔하고 맛있었다. 지금 떠올려봐도 아줌마의 아우라는 뒷배경과 상관없는 고상함, 그야말로 레알이었다.
심야식당의 몇몇 주인공들도 엄마나 애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었던 음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 음식만 찾듯 내게도 역시 그런 음식이 있다. '국수'다. 다양한 채소로 색깔을 낸 면부터 해물 또는 사골로 만든 육수까지 요즘 별별 국수집이 다 생겼다지만 엄마가 그냥 집에 있는 재료를 넣고 만든 국수 맛을 못 따라온다. 호박이 있으면 호박 넣고 부추가 있으면 부추 넣고 이도저도 없으면 김치에 양념해서 솔솔 비빈다. 그 맛이 일품인지라 언젠가 엄마한테 국수집을 내자고 제안한 적도 있다. 여름엔 비빔국수, 봄가을엔 잔치국수, 겨울엔 칼국수 위주로 팔되 그렇게 딱 세 가지 메뉴만 팔아보자고. 엄마는 평생 일한 것도 모자라 이제 다 늙은 엄마 이용해서 돈까지 벌 셈이냐고 지청구를 했지만 눈빛에 끓어넘치던 자신감이란. 독감에 걸려 앓아누웠을 때, 실연당했을 때, 인간관계로 인해 상심 직전에 이르렀을 때 등등, 엄마는 제철 재료를 넣은 맛난 국수 한 그릇으로 말없는 위로를 건넸다. 책을 읽으며 심야식당에 간다면 난 무얼 먹을까, 생각하니 엄마표 다대기를 올린 따끈한 칼국수였다. 마스터가 그대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화는 직접 봐야 한다. 대충 분위기 파악했으면 직접 보고 그 맛을 음미하시기 바란다. 별것 아닌 음식을 찾는 별것 아닌 사람들의 특별한 밥집 이야기, 그나저나 6권은 언제 나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