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윤대녕. 오랫동안 기다렸던 신작이다. 처음엔 책 제목이 낯익어서 언젠가 읽었던 작품인가, 했는데 최승호 시인의 시 제목에서 따왔단다. 『제비를 기르다』이후 이따금 검색창에 작가 이름 석 자를 넣어보며 혹시라도 나 몰래 신간이 나왔나 궁금해 했었는데 이 오락가락하는 봄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대설주의보』란 제목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안 만나겠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또 만나게 되는 그런 경우들을 경험하면서 ‘삶은 이런 거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요. 남녀 관계 뿐 아니라 모든 관계가 다 그래요. 사람이 사는 데 있어 인위적으로 안 되는 일들이 존재하는 거고, 또 그런 걸 받아들이면서 역동적으로 살아나가는, 그런 게 삶인 것 같아요.”

  “인간에겐 누구나 일상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외부적 삶과 욕망으로 가득한 내부적 삶, 두 가지가 있어요. 어느 게 진짜 삶인지는 모르는 거죠. 이런 속에서 폭넓은 진실을 발견해가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고립적 인물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등장인물을 만들고, 더 세밀하고 깊이 있는 시각으로 생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등단 20년이 되기도 했고, 앞으론 좀 더 절박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2010/03/19)

  항상 다른 소설들을 손에 들고, 혹은 다른 책들을 뒤적이면서도 변함없이 그리워했던 작가이다. 지난 청춘의 갈피에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는 알베르 카뮈와 윤대녕을 빼놓고는 나도 나 자신을 읽을 수 없다. 카뮈의 사상서들은 그 열정적이고 단호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뇌리에서 희미해져가지만 『안과 겉』에서 느껴졌던 노곤한 슬픔과 윤대녕의 단편들은 방금 만나고 헤어진 연인처럼 또 다시 그립다. 아마도 이것이 문학의 힘인 것 같다.

  # 며칠 전, 그는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다. 광고 메일을 정리하다 낯익은 이름에 조금 놀랐다. 뜻밖이었다. 벌써 오래 전 만남. 내 소식을 궁금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엿보이기도 했다. 나도 나이를 먹다보니 남자들의 유치한 허영심에 대해서는 대충 파악하게 되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순수하고 의젓한 사람이었다. 비록 나의 견고한 자의식 때문에, 혹은 그냥 인연이 아니어서,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담백한 관계에 머물렀지만 그와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세세한 기억력에 비하여 -나도 기억력이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듬성듬성 좋은 추억쯤으로 뭉뚱그리는 것을 보면 나 자신 생각만큼 다정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윤대녕의 인터뷰를 찾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변명을 하지 않아 좋다. 작품으로 자기변명을 하는 작가들이 없지 않은데 그는 항상 수줍은 듯 당당하고 무심한 듯 치열하다. 그리고 그것을 거북한 위장이 아니라 고상한 멋으로 승화시킨다. 엊그제 도착한 그의 책을 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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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5 0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7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3-2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항상 수줍은 듯 당당하고 무심한 듯 치열하다

아 제 느낌을 이리 콕 찝어서 말해주는 깐따삐야님이 좋아요.

깐따삐야 2010-03-27 15:04   좋아요 0 | URL
오! 휘모리님도 윤대녕 팬이시군요. 반가워요.^^

2010-03-26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7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7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