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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아내 생각이 나면 나는 새벽에 거리로 나간다.

깊이 잠들어 있는 거리를 혼자 걷는다.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가 않다. 그 새벽의 마지막 풍경들이 따뜻하게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날, 모든 것이 좋았다. 꿈결 같기만 한 그날 새벽 거리. 바람도, 가로수도, 불 꺼진 창들도, 모든 것이 정갈했었다. 그래서 기억은 쓸쓸하지 않다.

새벽 거리를 걷고 있으면 아내를 느낀다. (p.191)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남자가 있다. 직업은 남의 인생을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남자는 낯선 의뢰인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을 활자화하고 이따금 동네에서 마주치는 죽은 자들의 인생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써내려가는 일기장 같은 이 소설은 죽은 아내에게 ‘나 이렇게 살고 있어.’ 라고 말을 거는 고백록 같다. 무명 대필 작가의 사무실 책꽂이 한켠, 묵묵히 꽂혀 있을 것 같은 처연한 일기장.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그 심상을 담담히 읊조리는 이 작품은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에 등장했던 젊은이들의 중년을 보는 것 같다. 자의식 강했던 달변의 청춘들은 사회에 발을 딛고,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 혼자 밥을 먹고, 적막한 새벽 거리를 홀로 걷는다. 더 이상 누구와도 싸울 필요 없이 잔잔한 그리움만 남은 삶. 천진한 소녀 같기도 하고 세월을 헤아리는 노파 같기도 했던 아내는 현생을 떠나서도 남자의 삶에 슬픈데, 쓸쓸하지는 않은 따뜻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또한 모든 것을 비우고 쓴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는 기다란 기차 안에 혼자 탄 승객 같기도 하고 조금씩 흔들리는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가는 여행객 같기도 하다. 다가가 말을 걸고 싶다. 내치지 않을 것 같다. 태양계 안에서 가장 맛있다는 영주 막걸리든, 편의점에서 파는 소주든, 마주 앉아 술 한 잔 하고 싶다. 그는 소설 속 대필 작가 마냥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고 나는 사소한 것 하나 갈음하지 않고 속내를 털어낼 것 같다. 그가 이튿날 필름이 끊겨 나를 잠시 마주쳤던 죽은 여자라고 생각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쓰리라, 는 결의에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말이 없던 남자가 어깨와 아귀힘을 빼고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뒷모습을 드러내 보인 작품이란 느낌이다. 청승맞지 않은 고백, 침울하지 않은 우울이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마음 풍경과 도시 풍경이 담담히,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련한 온기를 뿜어낸다. 윤대녕만큼 세련된 멜랑콜리는 아니지만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와도 같은 이 소설에서 그 이상의 진솔함을 보았다. 정갈하고 진지한 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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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10-02-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 얻어갑니다~ 정갈하고 진지한 소설을 기다리는 1인 ^^

깐따삐야 2010-02-16 16: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rainy님.^^

L.SHIN 2010-02-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가 않다"

저는 그 반대의 경우는 있어봤어요. '마음은 슬프지 않은데 쓸쓸하다' 같은..^^;

깐따삐야 2010-02-16 16:36   좋아요 0 | URL
저도요. 슬프지는 않은데 쓸쓸한. 슬픈데 쓸쓸하지 않은 것보다 훠얼씬 더 춥춥한 느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