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유하 지음 / 열림원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엔 옛날에 사두었던 시집들을 한 권씩 꺼내서 읽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맞는 건지, 아니면 내 감수성의 감이 떨어진 건지, 서점에 가봐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시집이 없다. 세계의 문학은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문혜진의 시를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새롭다는 느낌이 들기는 커녕, 김정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김선우 식으로 풀어놓았다는 느낌만 들더라는.

 초임 발령을 받고 그 해 여름 즈음해서 쉰을 넘기신 선배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문혜진의 '질 나쁜 연애'라는 시집을 권해주신 적이 있었다. 불량한 남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검은 구름을 몰며 떠나보자는 내용이었는데, 왜 이 시집을 권해주셨냐는 물음에 대해 아버지뻘 되시던 그 선생님은 알듯말듯한 미소와 함께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더랬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너무 FM적으로 보였던 내 삶에 나름의 자극을 주고 싶으셨는지도. 어쨌든 이제는 시든 소설이든, 날것과 본능이라는 근래의 트렌드를 따르기 보다는, 본래의 정공법으로 성실하게 써나간 작품을 만나고 싶다. 

 유하도 물론 정공법이나 성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시인이다. 황동규나 이수익 같은 격조 있는 시인들에 비하면 그냥 산문을 쓰지, 할 정도로 장황하고 수다스럽다. 그러나 유하는 스스로의 장점을 미덕으로 끌어올리는데 나름 성공했고 그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김수영 문학상에 걸맞는 새로움과 발랄함 그 자체였다. 나는 그의 청승과, 허풍과, 유머를 좋아한다.

 기형도가 일기 쓰는 멜랑콜리커였다면 유하는 편지 쓰는 멜랑콜리커랄까. 그것도 연애편지 전문. 새끼 치는 조건으로 무보수 대필 편지 가능이라는 푯말을 들고 있을 듯한. 도무지 건조하고 냉정한 데라곤 없어뵈는 유하는 시를 쓰고 영화를 찍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청승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듣기로는 보기 드문 거구라는데 그 안에는 순정만화에나 나올법한 웅크린 소년 하나가 엄마나 누나를 기다리며 울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시집은 99년 3월. 내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충동구매한 책이다. 일단 표지와, 제목과, 시인이 마음에 들었고 아브라카다브라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오 그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나니(p.41)라는 구절을 보고 주문을 외워야겠단 생각에 망설임 없이 질러버렸다. 나중에 내가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을 때 이 사람은 자기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냈네, 뾰루퉁하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이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땐 정말 잘 쓴 시구나, 라고 생각했다. 없는 것을 끌어와가며 공들여 제조한 듯한 기교가 아니라, 안에서 솟구치는 청승의 봇물이 그분이 오시는 타이밍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열정으로 터져나온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음울한 실연의 감옥인 몸둥아리로부터 벗어나 한 그루 아름드리 시로 피어나고픈 욕망. 

나무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서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새로 인해 무성한 이파리를 피워내고 사랑하는 자, 윤회를 믿게 되듯 시인은 날아오르는 새떼 속에서 내세를 본다. 

나무를 낳는 새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게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떨어진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그렇듯
새가 낳은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떼가 날아갑니다
울창한 숲의 내세가 날아갑니다

농담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경고하건대 제발 오버하지 말아요. 하지만 이처럼 귀여운 고백에 웃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이여. 당신은 유하의 개미지옥에서 오래도록 빠져나올 수 없을지니.

학교에서 배운 것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그 많던 상상력은 누가 다 치웠을까. 상상력 절제 상실증으로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유하. 그가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고생의 뒤꽁무니를 쫓는 세운상가 키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뛰어난 시인과 감독을 보는 대신, 주류일절을 애호하는 비주류 수다맨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유하라는) 베짱이는 허기진 노래를 부를 것이다. 개미를 한입에 먹어치우고 싶다고. (p.47) 그가 허기를 느낄 만큼 살아있고, 욕망을 채우기 위한 뜨거운 노래를 멈추지 않는 한 그의 행로를 계속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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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물오른 깐따삐야님, 노느라 책도 못읽는 전 깐따삐야님 리뷰 읽는 게 더 즐거워요 흐흐흐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아, 여기 ㅠㅠ 나 이제 확 엎어버릴까봐

깐따삐야 2008-01-09 01:03   좋아요 0 | URL
아이구. 웬디양님이 즐겁다니 정말 좋으네요.
요즘 한가할 때 바짝 읽으려고 노력 중인데 언제 잠수탈지 모르는 게 또 내 특성이라는. 그간의 행로에 대해선 메피님이 잘 아시죠. 흐흐.

엎은 거 닦을 땐 살청님 수건 빌려다 씁시다.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09 01:04   좋아요 0 | URL
입속에 들어갔다온 수건인데 괜찮을까요?
하도 악~ 물어서 이빨자국 강하게!! ㅋㅋ

잠수하기만 해봐요 청주로 날라갈테니 ㅎㅎㅎ

깐따삐야 2008-01-09 01:12   좋아요 0 | URL
앗! 그렇다면 살청님을 시켜서 닦으라고 합시다. ㅋㅋ

웬디수사관 날라오고 살청님이 비글 풀고 메피님이 펠레의 저주 내리면 난 벼랑에 몰린 깐들쥐겠구만. -_-



웽스북스 2008-01-09 01:46   좋아요 0 | URL
그러기전에 먼저 혈육을 잃은 슬픔에 젖은 엘신 형님이 깐따삐야 별에 있는 도우너에게 교신을 보내 텔레파시로 깐따삐야님을 잡아오라고 할 거에요 ㅋㅋ

아 근데 깐들쥐, 어째 징그러워요 (깐 들쥐라니 ㅠㅠ 너무 편혜영 소설이다 ㅋㅋㅋㅋㅋㅋ)

깐따삐야 2008-01-09 01:53   좋아요 0 | URL
엘신형님은 나의 잠수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왠지. ㅋㅋ

사육장 덕분에 요즘 야생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지낸다는. 으흐흐.

깐따삐야 2008-01-09 18:02   좋아요 0 | URL
어쩌면 위에 보이는 웬디양님은 메피님일지도 모른다는. 항간에는 메피님의 분신설이 나돌고 있거든요. ㅋㅋ (커피는 맥심 커피믹스가 쵝오에요!)

채찍은 없지만 가죽허리띠가 있으니 이리 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