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동물원 범우희곡선 8
테네시 윌리엄스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아만다, 톰, 로라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슈처럼 열망하던 꿈을 잃고 좌절해버린 비극적 주인공들이다. 아만다는 한때 무도회에 나가면 수많은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이는 미녀였지만 지금은 한낱 가정주부로 전락해 버렸고, 해설자 톰은 모험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과거만을 회고하며, 연약한 불구의 소녀, 로라는 이미 약혼한 짐이 구세주가 될 수 없음에 그녀의 순정은 유리동물처럼 산산조각 나고 만다. ‘크러취’라는 비평가는 윌리엄스의 "여름과 연기"를 본 후, 주인공 앨마에 대해 “천성은 열정적이지만 생기 없는 상류문화를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귀족근성을 버리지 못한 불행한 여성”을 또다시 목격했다고 언급했는데 앨마, 아만다, 블랑슈 등 윌리엄스 특유의 여주인공들의 성품을 예리하게 지적한 코멘트라고 생각한다.

 블랑슈가 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 구축해 놓은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듯, 로라 역시 유리동물원이라는 자폐적인 세상 안에 칩거하고 있다. 아만다의 Blue Mountain, 톰의 영화관도 현실에서 도피한 illusion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유리동물의 특성처럼 로라의 세계는 투명하고 순수하지만 파손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뿐더러, 움직이지 못한 채 차갑고 견고하게 굳어 있다. 윌리엄스 초기 작품의 여성들은 외부의 세계와 타협하고 화해하는 길을 모색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세계로 숨어 버리거나 미쳐버린다. 블랑슈가 미치를 유혹하듯 아만다는 로라에게 짐을 소개하지만 극은 안이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으며, 실제로 스스로도 남부의 로망을 잊지 못했던 윌리엄스는 마치 그의 자화상과도 같은 히로인들에게 편리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는다. 블랑슈의 전등갓은 찢겨지고 로라의 유리동물은 깨져버린다. 이러한 상징적인 연출을 통해서 윌리엄스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절망감을 직시하게끔 하는 동시에, 구원의 문제를 보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요즘 사람들은 식당의 싱글테이블에 앉아 1인분의 식사를 하고 가족이나 연인 대신 애완동물을 선택한다. 대학 시절 친구 하나는 강아지를 분양 받을 때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었다면서 그 아래에는 싱글맘으로 살고 있는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이야기를 써놓기도 했다.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그녀는 그런 식으로 도시의 쓸쓸함과 조우하고 있는 것일지도. 근간의 싸이월드, 블로그, UCC(User Created Contents) 등의 유행을 보면서 만약 인터넷이 사라진다면 한동안 공황상태가 지속된 다음, 정신질환과 자살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블랑슈나 로라가 구축해놓은 자폐적 환상 세계처럼, 현대인들 역시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서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해받지 못한 윌리엄스의 퇴락미녀들은 좌절했지만 요즘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조차 하나의 개성이자 유행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은둔하거나 실성해 버리는 비극에서 비껴나 그런 식으로 시대의 우울을 견뎌가는 현대인들은 영리해 보이지만, 역시 외로워 보이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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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연극 수업 시간 때 관심 갖던 작품이었는데 잊고 있었네요-
알라딘은 나의 유리동물원일까요?

깐따삐야 2008-01-02 14:39   좋아요 0 | URL
어둡고 우울한 내용이지만 독특한 인물들 덕분에 지루하진 않은 작품이었어요.
절망테스트 결과를 보니 어쩌면 그런 것 같기도.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