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겨울, 블로그 ㅣ 푸른도서관 22
강미 지음 / 푸른책들 / 2007년 11월
평점 :
나에게도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서 좋은 성적을 기대했고, 이 친구 저 친구를 헐뜯으면서도 나에 대한 비난은 참지 못했다. 이길 것 같으면 덤벼들었고, 질 것 같으면 꽁지를 내렸다. 친구나 이성을 상대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고, 해치고 죽이는 상상까지 마다않았다. 당신은 그렇지 않았는가?
작가의 말이다. 동시에 이 소설집에 담긴 사연들이기도 하다. 당신은 그렇지 않았는가? 라는 작가의 물음에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대개 저러한 감정의 파고를 겪으며 청소년기를 지나와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변덕스런 감정선에 절망하곤 한다. 결국 아이에서 어른으로 껑충 성장한다기 보다는 이런저런 현실의 벽과 사회의 제약들을 경험하면서 얼마간의 체념과 절제를 통해 어른인 척 하면서 살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엔 네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네 편 모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현직 교사로 재직 중인 작가는 공들여 매만졌다 싶은 섬세한 필치로 아이들의 속사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소설집을 다 읽고 났을 땐 내용이 다소 무겁고 어두운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것이 가감없는 현실이 아니더냐, 라고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어떤 면에선 소설 속 주인공들이 조금 더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언어를 갖고 있으므로. 내가 보아왔던 아이들 중에는 가슴 속에 많은 고통스러운 것들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풀어내고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갑갑해하는 경우도 많았더랬다. 교사를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동시에 마음 아프게 하는 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잘 모르겠어요."가 아닐까.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정답이다. 아이들도 모른다. 자신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건강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수면부족의 창백한 얼굴로 공부에 매진해야 하며, 관용과 조화의 정신을 배우면서도 친구들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해야 하고, 사랑의 설레임을 가장 예민하게 느낄 나이에 누군가를 향해 내달리는 마음을 안으로 모아쥐어야 한다. 비판하고 사색할 심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빡빡한 삶 속에선 모순조차 일상이 된다. 요즘의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정신적인 면에 있어선 나보다 더 늙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끔 수업시간에 어떤 문제에 대해 혼자 열을 내다가 아이들의 피로하고 시큰둥한 표정에 질려서 그냥 웃기는 농담처럼 마무리 한 적도 있다. 이미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심각할대로 심각해지고 무거워질대로 무거워진 아이들이기에 텔레비전의 오락프로그램과 컴퓨터 게임, 한번 웃고 나면 공중분해되고 말 시덥잖은 농담 속에서 쉴 틈을 찾는 건지도.
아이들의 문제를 섣불리 과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아이들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하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와 닿았다. 소설 속에서도 드러나듯 어떤 아이들이 조숙하고, 어떤 아이들이 미숙한 게 아니라 아이들 안에 어른도 있고 아이도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어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 내면에도 어른과 아이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 속의 아이들을 대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고, 생각했던 것보다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많이 기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허탈하기도 했다. 작가인 선생님은 아이들의 억눌린 마음을 자유로운 언어로 그려주었다. 서쪽 능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흐느끼던 수희가 하는 말. "아름다운 건 항상 슬퍼. 왜 그런지 모르겠어." (p. 181) 아이들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