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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대학 초년생이었을 무렵, 거의 전작주의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윤대녕을 탐독했던 것은 윤대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윤대녕을 좋아하는 어느 선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내 사랑의 방식은 그토록 무분별했다. 좋아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가 아니라 좋아하면 알아야 하며 알고 나면 보이지 않을까, 였다. 선배는 윤대녕과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좋아했고 아마 고정희나 기형도 같은 시인들도 좋아했을 것이다. 나는 우선 <은어낚시통신>과 <그리스인 조르바>로 고단한 짝사랑의 여정을 출발했다. 나중에 선배가 모교를 떠나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을 때 이미 감정은 식은 지 오래였지만, 나는 여전히 윤대녕과 카잔차키스와 기형도 등을 좋아하고 있었다. 선배는 어느 가을 날, 롤링페이퍼에 예의 그 독특한 글씨체로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을 찾아"라고 써주었고 동경하던 선배의 소중한 말씀이니 고이고이 새겼으나, 나는 여전히 휠 줄 모르고 여기저기 부러져서는 상처만 늘려가며 살고 있다.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라는 작품집에서 만났던 단편 '상춘곡'은 내가 가장 아름다운 단편들 중의 하나로 꼽는 작품이다. 그림이 되려다 만 시처럼, 시가 될 뻔한 그림처럼, 행간마다 연두와 분홍이 엇갈리는, 애틋하고 아슴아슴한 봄빛 그 자체였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듯한, 가장 윤대녕다운 작품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늘 얼마만큼의 기대치가 있다. 현실의 변방에서 역마살과 도화살의 운명을 피해 갈 수 없는 남자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파탈 같은 여자들, 실패한 시인이 지어준 듯한 카페 이름들, 바흐나 굴렌 굴드, 아바 등 시공을 초월하는 음악들, 베스킨라빈스의 화려한 달콤함에 이어지는, 고개를 떨군 채 바싹 타들어가는 초췌한 식물들의 이미지, 희망을 예견하되 현실에의 복귀가 아니라 또 다른 방황을 시작할 것만 같은 쓸쓸한 결말들... 그러한 것들이 거기에 있을 거라는,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할지언정 그 특유의 톤과 색조는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엄습한다. 그것은 뻔함도, 진부함도 아니다. 익숙한 기대감 같은 것이다. 장편 <달의 지평선>이 나왔을 때 혹자는 적잖이 실망했다고도 하고 윤대녕은 장편은 무리지 않겠냐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완벽하게 몰입하여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그녀들과 몽땅 사랑에 빠졌다. 그럴 만큼 말랑말랑한 연령이기도 했지만 삶의 한복판이 아니라 그 귀퉁이에서 아무 것도 결론 내리지 않고 시와 잠꼬대의 중간 정도 되는 은유들이나 읊조리면서 그네들과 더불어 살아갔으면 했다. 매력은 있지만 생활력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그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들을 골려주었다 얼러주었다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매력은 없지만 둘째 가라면 서러울 생활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그들을 가끔 그리워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시답잖은 낭만을 꿈꿨더랬다. 당시엔 누군가 짱돌을 넣은 양파망을 던진대도 꿈쩍 않을 만큼 삶에 관한 탄성 또한 대단했으니까. 지금은 세월의 각질층으로 인해 뻔뻔해져서 그렇다지만 그 때는 당최 아무 것도 몰라서 도리어 용감했다.
옅은 제비꽃 빛깔로 곱게 장정한 <제비를 기르다> 역시 익숙한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좀더 따스하고 의젓해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마음은 어쩐지 처연하고도 호젓했다. 가까스로 청승을 비껴나 그럴듯한 폼만 잡고 말만 청산유수로 뻔드르르하게 할 뿐, 사실은 웅크린 어린애나 다름없었던 윤대녕의 남자들이 이제는 조금 달라진 것도 같았다. 우연인 듯 필연처럼 인연이 엮이고, 문득 하나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섬으로 육지로 떠돌고, 일상 저 너머에 있는 헛것에 매달려 녹록찮은 은유를 덧씌우는 기법은 비슷했지만, 이제는 운명에 쓸리고 휘둘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라도 순응하고 감싸고자 하는 곡진함이 느껴졌다. 일상에 침입한 예고 없는 변화나 균열들에 대처하는 방식들도 지지부진하고 어릿어릿하기만 했던 과거에 비하면 상당 부분 적극성과 현실성을 띄고 있었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스토리 라인에 여전히 비슷한 플롯의 반복이었지만 언제나 '나'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를 통해서 타인을 바라보거나 의식하고, 타인의 내면에서 들여다보고자 했던 것 또한 '나' 뿐이었던 우울하고 이기적인 나르시스트가 타인의 운명과 상처의 생김생김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 같았다. 찬이 초라하기에 역설적으로 손이 많이 갈 수 밖에 없는 밥맛의 깊이(연), 당신의 입안에 남아 있는 치약 냄새를 사랑했노라는, 다소 유치하지만 이보다 더 사실적이기도 힘든 고백(못자국), 하루 세 번 먹는 밥과 세 번 닦는 이처럼, '나'는 포즈 잡을 겨를 없이 꾸역꾸역 이어지는 생활의 발견 앞에서 슬그머니 겸손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회한 것 까지는 아니고, 윤대녕은 한 두 갈피 정도는 언제나 옹골차게 노회함이 쳐들어오지 못할 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을 법 하지만, 오랜만에 성숙의 향기가 은은히 우러나는 근사한 작품들을 만나 반갑고도 즐거웠다. 안 보는 사이, 무턱대고 퍼져가지고는 달통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접스런 이야기들을 묶어가지고 새 책이랍시고 들고 나오는 작가들도 있는데 <제비를 기르다>는 역시 믿고 읽을만한 중견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신뢰감을 주었다. 어디 하나 꼬집을 데 없이 유려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읽히는 문체 또한 건재해서 역시 내가 좋아하던 그 사람 맞구나 싶어 다행스럽기도 했다. 선배는 떠났고 윤대녕은 남았다. 어차피 남을 사람은 윤대녕이었던 것이다.